제459화. 약로의 행방
바람이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자, 이준이 빠르게 한전의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한전 선생님, 정말 대단하군요. 한수 배웠습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완전히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방금 전 이준이 보여준 것은 틀림없이 투종 강자만이 할 수 있는 공간 왜곡이었기 때문이다.
“공간의 힘이잖아? 투종 강자였단 말이야?”
한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이며 이준을 위 아래로 훑어봤다. 하지만 이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은 분명 투황 강자 수준에 불과했다.
“하하. 한전 선생님, 오해입니다. 그저 우연한 기회로 아주 약간이나마 공간의 힘을 쓸 수 있게 된 것 뿐 입니다.”
“정말 놀랍군. 투황이 공간의 힘을 사용하다니……. 자네의 천재성과 능력이라면 중주에서도 금방 이름을 떨칠걸세.”
이준의 실력을 직접 확인한 한전은 완전히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이 정도라면 홍신을 꺾고 한씨 가문을 지켜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틀림없이 그럴 수 있었다.
“너희들 말이야, 아주 사람 보는 눈이 있는 걸?”
한전의 말에 한설과 한율은 당연하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둘의 대결이 끝나자, 한철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다시 한 번 이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젊은이, 이번 한번만 우리 한씨 가문을 도와준다면 그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네!”
이에 한철 뒤에 서 있던 한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이준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망설임 없이 한참이나 어린 자신에게 예를 다하는 한씨 가문 사람들의 모습에 이준은 어깨가 더욱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잘 부탁하겠네. 혹시 친구도 한씨 가문의 도움이 필요하게 된다면 언제든지 얘기하게.”
사실 한씨 가문에 홍신만한 실력을 가진 강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홍신보다는 까마득한 선배였고, 동년배 중에는 감히 홍신과 겨룰만한 자가 없었으니 한씨 가문의 운명은 벼랑 끝에 선 것처럼 위태로웠다.
그러나 지금, 홍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아니 그 이상의 젊은 강자가 나타난 것이다. 이에 한씨 가문 사람들은 할 수만 있다면 전재산을 털어서라도 이준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싶었다.
“사실 제가 필요한 약재가 몇 가지 있습니다. 몸 상태가 아직 회복이 덜 돼서 삼 일 정도 회복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고요.”
“뭐라고? 부상을 입은 겐가?”
부상을 입었다는 말에 한철을 비롯한 이들은 거의 기절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이는 한율보다도 어린 투사가 부상을 입은 채로 8성 투황을 가볍게 제압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하하. 그건 걱정 말게. 이 분은 우리 한씨 가문의 수석 연금술사, 제건 선생일세. 5레벨 연금술사지. 이 친구가 자네의 부상을 치료하는 것을 도와줄 걸세.”
한철의 시선이 곁에 있는 노인에게로 향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가슴에는 약솥 모양의 휘장이 달려 있었고, 약솥 위에는 다섯 갈래의 물결이 새겨져 있었다.
노인은 이준이 막 방에 들어올 때부터 유독 눈에 띄던 사람이었다.
겸손하고 예의 바른 한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줄곧 눈을 감은 채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5레벨 이상의 연금술사라면 어딜가든 귀빈 대우를 받았으니, 그 정도 오만함은 평범하다 못해 겸손한 축에 속했다.
제건은 이제 막 투황이 된 상태로, 그 정도 계급은 한씨 가문에서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가문 내에서의 지위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수준이었다. 이 역시 5레벨 연금술사라면 당연한 일 이었다.
한철의 명령이 떨어지자, 제건이 연금술사 특유의 오만한 표정으로 이준에게 손짓을 했다.
“이리 오게. 내가 한 번 봐주지.”
그러나 현재 이준의 연금술 실력은 6레벨과 중상급 수준이었으니 5레벨 연금술사인 제건이 그를 도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손을 제건에게 뻗었다.
제건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이준을 쓱 올려다보고는 그의 손목을 잡아 영혼의 힘을 몸속으로 투입했다.
그 순간, 거대한 영혼의 힘이 화산이 폭발하듯 느껴졌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엄청난 수준의 영혼의 힘에 제건은 화들짝 놀라 온 몸을 파르르 떨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자, 자네…….”
이정도 영혼의 힘이라면 6레벨, 아니 어쩌면 7레벨 연금술사 일지도 몰랐다.
“무슨 일이지?”
제건이 기겁하는 모습을 본 한철이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하하. 제 몸 내부가 좀 희한하게 생겨 선생님이 놀라신 모양입니다.”
굳이 자신이 6레벨 연금술사인 것을 밝히고 싶지 않았던 이준은 대충 얼버무리며 하얀 종이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그 위에는 여러 약재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제가 필요한 약재들이니 이것들을 좀 모아주세요. 5레벨 연금술사시니 약재들의 약효가 잘 보존되어 있는지 볼 줄도 아시겠죠.”
이준의 말투는 말이 좋아 부탁이지 명령이나 다름 없었다. 이에 한철은 제건이 이준의 말을 들어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제건은 사실 한씨 가문 사람이 아니었고, 한씨 가문에서 큰 힘을 들여 겨우 모셔온 연금술사였다. 따라서 평소에 가문의 사소한 일에는 거의 나서는 법이 없었고, 큰 일이 있을 때나 가끔 나서서 손을 쓰는 정도였다. 그런 제건이 새파랗게 어린 젊은이의 부탁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한철의 예상과 달리 제건은 서둘러 하얀 종이를 받아든 뒤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걱정 말게. 내가 약효가 살아 있는 좋은 재료들로 준비할 테니.”
종이 위에 적힌 약재의 이름들을 확인한 제건은 상대가 연금술사임을 확신했다. 이준이 부탁한 약재들은 모두 진귀한 고급 약재로, 연금술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름조차 모르는 약재도 허다했다.
하지만 그 약재들로 무엇을 만들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자신이 모르는 뭔가 진귀한 연금비약을 만들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 정도로 진귀한 약재들을 모아 만들어야 하는 연금비약의 조합표를 알고 있다는 것은, 눈앞의 청년이 대단한 연금술사임을 증명하는 것인 동시에 그의 스승이 엄청난 연금술사의 대가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설아야, 저 친구가 지낼만한 방을 마련해 놨으니 네가 직접 안내해 주거라. 약재는 오늘 안에 구해 전달해주고.”
제건의 공손한 태도에 잠시 넋이 나가있던 한철이 웃으며 말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한씨 가문 입장에서는 좋은 일 이었다. 제건이 이준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도, 이준이 제건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도 그들 입장에서는 난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쪽으로……. 오세요.”
한편, 제건의 반응을 보고 무언가를 눈치 챈 한설은 어느새 저도 모르게 이준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이준은 그녀의 변화에도 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한철을 비롯한 한씨 가문의 사람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 뒤 한설을 따라 숙소로 향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점차 시야에서 사라지자, 한철이 진지한 표정으로 제건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건 선생, 조금 전은 왜 그랬던 겁니까?”
이에 제선은 한숨을 푹 내쉬며 한율을 한 번 쳐다보고는 조심스럽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준씨도 연금술사로군요?”
“제가 본원에서 수련하던 때 5레벨 연금술사였어요.”
그녀의 말에 제건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입을 쩍 벌린 채 멍하니 한율을 바라봤다.
하지만 제건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 이었다.
“설아가 이번에 아주 큰일을 했구나. 우리 가문에 이런 귀한 분을 모셔오다니.”
이준의 방은 한씨 가문의 뒤뜰에 위치해 있었다.
한설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간 이준은 곧바로 한숨을 내쉬며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여러 가지 이유로 한씨 가문을 도와주기로 하기는 했지만, 홍신이라는 사내의 실력이 그리 만만해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홍신이라는 사람을 멀리서 한 번 본 게 전부지만 실력이 강하다는 게 느껴졌어. 잘난 척 하는 만큼 믿는 구석이 있겠지.’
이준은 침대 위에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방금 회의실에서 본 강자들이 한씨 가문의 전부일리는 없었다. 이준의 예상대로라면 한 세대 위의 선조 강자들이 뒤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한씨 가문이 천북성에서 홍씨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것은 투종 강자의 지지 없이는 절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전 본 사람들 중 가장 강한 한철조차 투종 강자에 근접한 수준에 불과했으니, 보이지 않는 곳에 그 이상의 강자들이 숨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한씨 가문과 천북성을 양분하고 있는 홍씨 가문 역시 이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전력을 가지고 있을 것 이다.
‘중주에 오자마자 골치 아픈 일에 말려들었군.’
아무리 생각해도 발을 빼는 편이 현명했다. 하지만 이준은 본래 빚을 진 것이 있다면 확실하게 갚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말이다. 이번에는 한설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줬고, 한율에게도 빚이 있었으니 도저히 발을 뺄 수 없었다.
홍신의 실력은 7성 투황으로, 지금의 자신과 비슷했다. 물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비슷한 계급의 투사에게 패배해 본 적이 없는 이준이었지만, 홍신은 풍뢰각의 가르침을 받는 투황이었고, 자신은 약로가 영혼의 궁전에 끌려간 이래로 쭉 혼자서 수련을 해야 했으니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 이다.
게다가 홍신에게 이기고 난 뒤에도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니 마음이 무거운 것이 당연했다.
‘이 일을 잘 해결하고 나면 빨리 떠나야겠어. 연금술대회 전에 투종이 되야 별의 불꽃을 얻을 수 있을 텐데.’
연금탑에서 개최하는 연금술 대회는 투기대륙에서 가장 내로라하는 연금술사들이 모이는 자리로, 자타가 공인하는 투기대륙 최고의 연금술 대회였다.
그렇게 한참동안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있던 이준은 무언가 떠오른 듯 손을 뒤집어 저장반지 안에 있던 옥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의 손 위에 나타난 것은 한샘의 영혼을 가둬둔 옥병이었다. 병의 입구는 여전히 무형의 불꽃으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병 입구를 슬쩍 건드리자, 허약해진 영혼 하나가 무형의 불꽃에 감싸인 채 눈앞으로 날아왔다.
구름 불꽃에 의해 오랜 시간 고통 받은 한샘의 영혼은 이미 넝마가 된지 오래였다.
“어때요, 즐거우셨나요?”
이준의 음성을 들은 한샘은 온 몸을 파르르 떨며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대체 뭘 어쩌려는 거지? 차라리 죽여!”
“스승님은 어디에 갇혀있죠?”
“킥킥. 그 노인네를 찾을 셈이야? 네 실력으로 감히 영혼의 궁전에 맞서겠다는거냐?”
약로의 행방을 묻는 이준의 질문에 한샘은 코웃음을 치며 그를 비웃었다.
“아아아악!”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목구멍에서 또 다시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나왔다.
“아직 맛을 덜 본 모양이군요.”
이준이 불꽃의 온도를 올리며 또 다시 옥병을 꺼내들자, 한샘의 얼굴이 더욱 새파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그, 그, 그만! 말해주면 되잖아!”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번에 또 들어가면 일 년이 걸릴 지 또 얼마나 걸릴지 모릅니다. 병 안에서 비참하게 죽게 될 수도 있고요.”
이준의 손에서 일렁이는 무형의 불꽃은 한샘에게 있어 지옥불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제 아무리 화가 나도 그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
“노인네가 있는 곳만 말해주면 날 놓아줄 텐가?”
“지금 나랑 협상할 처지가 아닐 텐데.”
“잠, 잠깐. 말해줄게! 제발 그러지마! 중주 서쪽 지역에 있는 멸망의 도시에 있어!”
“중주 서부, 멸망의 도시라……. 그곳은 몇 사람이 지키고 있죠?”
“꽤 많은 영혼들이 있어! 지부이기는 하지만 귀중한 영혼이 많은 곳이라 영존이 그곳을 지키고 있지!”
“영존?”
영존이 지키고 있다는 말에 이준의 표정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영존이라면 바깥에서는 투존에 해당하는 강자였다.
‘투존이라면 지금의 나로는 어림도 없겠어. 목숨을 걸고 만든 화련으로도 생채기 하나 못 낼 거야.’
생각을 마친 이준은 곧바로 한샘의 영혼을 다시 약병 안에 집어넣은 뒤 구름 불꽃으로 입구를 봉했다.
“얘기해준 사실이 모두 사실이길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고 싶어도 못 죽게 해줄 테니까요.”
옥병을 다시 저장 반지에 넣은 이준은 조용히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지금 가장 급한 것은 실력을 회복하는 것, 그리고 홍신을 물리친 뒤 투종 강자가 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