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8화. 탐색
홍씨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한참 뒤, 한씨 가주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율아, 괜찮겠니?”
“잘 모르겠어요……. 천북성에서 홍신과 비슷한 또래 중에 투황 계급에 들어선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게다가 그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있어!”
한율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누군가가 회의실 안을 박차고 들어오며 말했다.
“이 녀석…… 왔구나. 하지만 이번 일은 네가 끼어들만한 일이 아니다.”
한율과 눈이 마주치자, 중년의 사내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홍신의 제안은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그의 제안은 천북성의 또래 중에서는 자신이 최고라는 자신감에서 나온 것 이었고, 그것은 결코 오만이나 허황된 자신감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어서 들어와.”
이어지는 한설의 행동에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른 침을 집어 삼켰다. 설마 정말로 홍신보다 강한 사람을 데리고 왔단 말인가?
잠시 후, 삼베옷을 입은 청년 하나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회의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한율 선배. 그동안 잘 지냈어요?”
평범한 차림을 한 어린 청년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자, 한율의 불그스름한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이준?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응? 언니, 이 사람을 알아?”
한율과 이준이 서로 면식이 있는 듯하자, 한설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잠시 후, 한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알지. 내가 얘 선배거든.”
“그럼 이 친구도 가람아카데미 출신이란 말이냐?”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한 가주의 얼굴에 순간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준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기운이 홍신보다 강하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네, 아카데미 최고의 천재였어요. 이준, 이 분은 우리 아버지야. 한씨 가문의 가주, 한철.”
자신의 아버지를 소개한 한율은 곧바로 환히 웃으며 이준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준은 본원에 들어온 지 일 년도 안 되서 바로 세 손가락 안에 꼽는 강자가 된 사람이에요. 천재성이나 대담함이나 본원에서는 따라 갈 사람이 없었죠.”
그녀의 말을 들은 한씨 가문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씩 변해갔다. 가람 아카데미는 중주에서도 이름난 투사 양성소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일 년 안에 세 손가락 안에 꼽는 강자가 되었다니, 그 정도라면 정말로 홍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본원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는 강자였다는 말에 평소 무표정하기 짝이 없던 한설의 얼굴에도 놀란 표정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알기로는 자신의 언니조차 10위 권 안에 간신히 이름을 올렸을 뿐 이었다. 헌데 일 년 안에 세 손가락 안에 꼽는 강자가 되었다니, 듣고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과찬입니다. 그냥 운이 좋았죠.”
한율이 치켜 세워주자 더욱 민망해진 이준은 연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어떻게 설이랑 같이 있는 거야?”
한율의 질문에 옆에 있던 한설이 이준을 대신해 사막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랬군……. 정말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으면 딸아이도, 가문의 투사들도 잃을 뻔 했어.”
이준이 하온과 홍씨 가문의 두 장로로부터 한설과 한씨 가문의 호위 무사들을 지켜주었다는 말에 한철은 곧바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이준에게 머리를 숙였다.
“가주님, 이러지 마십시오. 서로 돕고 사는 건 당연한 거죠.”
아버지뻘 되는 사람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이준은 화들짝 놀라 손사레를 쳐댔다.
“우리 율이와도 아는 사이인데다가 설이의 목숨까지 구해준 은인이니 어렵게 생각 말고 어르신이라 불러주게.”
한철의 시원시원하고 예의바른 태도에 이준은 또 다시 마음이 흐뭇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한철의 태도는 실로 몇 번이나 자신을 감동시킨 인품을 가진 한씨 가문 사람들의 가주다운 훌륭한 것 이었다.
“아버지, 홍씨 가문 놈들이 또 우리 가문에 와서 난리를 피운 거예요?”
두 사람의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한설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 홍씨 가문 놈들이 이제 천북성 전체를 손아귀에 넣고 싶은 모양이구나. 지금까지야 어떻게든 버텨냈지만, 홍신이 풍뢰북각의 내각 제자가 되어 돌아왔으니, 군소 세력들이 모두 홍씨 가문에게 줄을 서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풍뢰북각이라는 말에 의문을 느낀 이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풍뢰북각이요? 풍뢰각이 아니고요?”
“풍뢰각은 동서남북 네 개로 나누어지거든. 각각 중주 북쪽 지역 네 자락을 차지하고 있어. 풍뢰북각은 천북성에서 천리 떨어진 단풍산에 있어. 홍신은 그 풍뢰북각의 내각(內閣) 제자라는 거지.”
한설의 설명에 이준은 다시 한 번 풍뢰각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네 개로 쪼개진 세력 중 북각(北閣)의 내각 제자가 된 것만으로 한 성의 세력 구도가 재편될 정도이니, 그 곳의 정점에 선 자가 얼마나 대단한 자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홍신은 너와 네 언니가 모두 홍씨 가문의 사람이 되길 원한다. 우리 한씨 가문을 흡수하려는 속셈이 뻔한데, 어떻게 그 요구를 받아들인단 말이냐.”
“그래서 그 쪽에서 내건 조건이 아까 그 대결인가요?”
“그래. 하지만 동년배 중에 한씨 가문에서 가장 강한 율이조차 이제 막 투황에 들어선 정도이니, 사실상 하나마나한 대결이지. 이 대결에 응하지 않는다면 전면전이고, 응한다 해도 승산은 없을게다. 홍신은 최소 7성 투황에 풍뢰각에서 배운 여러 고급 무투기까지 있으니…….”
한철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나갔다.
“솔직히 한씨 가문은 물론이고 천북성을 통틀어 그 나이대의 투사 중 홍신을 상대해서 이길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
“그랬죠. 그런데 지금은 조금 희망이 보이네요.”
한율이 미소를 지으며 이준을 바라보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약속이나 한 듯한 곳으로 향했다.
“맞아. 이준씨라면 분명 홍신을 이길 수 있을 거야!”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무뚝뚝한 두 자매가 이렇게 능청스럽게 분위기를 몰아갈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 했던 일 이었다.
“이준. 이건 우리 한씨 가문에게 엄청 중요한 일이야. 이번에 힘을 보태주면 지하의 유액 가져간 일도 없던 걸로 해줄게.”
이어지는 한율의 한마디에 이준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하니 한율이 그 일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선배……. 어, 어떻게 알았어요?”
“그 곳을 지키던 원숭이들이 말을 할 줄 안다는 걸 잊었구나?”
이준의 질문에 한율은 피식 웃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어때?”
이에 이준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긴다는 장담은 못해요. 그냥 최선을 다 해볼게요.”
이준이 끄덕이자 무뚝뚝하던 한율과 한설의 얼굴에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웃음꽃이 피었다.
“정말이지?”
“아버지, 홍신도 동년배면 된다고 했잖아요. 꼭 우리 가문 사람일 필요도 없고요.”
두 자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한철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허허. 그래. 너희들 눈이 정확하겠지. 하지만 이 친구가 홍열, 홍목 두 사람을 잡았다고 하더라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그건 홍신도 할 수 있는 일이니 말이다. 게다가 풍뢰각 북각 제자이니 그만큼 고급 무투기도 많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이 친구가 괜히 우리 가문의 일에 끼어들어 다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는구나.”
“아버지, 설마 이준씨가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한철의 말에 한설은 발을 구르며 성을 냈다. 그녀가 보기에 지금 한씨 가문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이준 뿐 이었고, 그 실력 역시 결코 홍신에 밀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설아, 율아. 그럼 저 젊은이와 삼촌이 한 번 겨뤄보는 것은 어떻겠느냐? 나를 이길 수 없다면 홍신과 싸워도 이길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자칫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 우리 가문의 일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 희생시킬 수는 없지 않느냐.”
그 때, 대략 40세 정도로 보이는 사내 하나가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에 한설과 한율은 머뭇거리며 이준을 바라봤다.
“우리 둘째 삼촌이야. 이름은 한전이고. 실력은 8성 투황 정도인데……. 괜찮겠어?”
가문의 흥망이 걸린 상황에서 도움을 줄 사람의 안위까지 걱정하다니, 왠지 모르게 이들을 돕기로 결정했다는 마음이 들기까지 하는 이준이었다.
“그럼 열 수만 피해 보겠습니다.”
이준의 말을 듣자 한설이나 한율 할 것 없이 모두가 깜짝 놀랐다. 열수를 모두 피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이준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제 곧 9성 투황이 될 한전을 상대로 과연 그런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하하. 이거 정말로 기대되는구나.”
이준의 자신만만한 선언에 한철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표정에는 기대가 가득했다.
“이준, 괜찮겠어? 둘째 삼촌은 바람 속성의 염력을 다루는 사람이야. 속도라면…….”
반면 한율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걱정 말아요 선배.”
하지만 이준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웃으며 자세를 잡을 뿐 이었다.
“한전 선생님, 시작하시죠.”
“하하. 아주 자신만만하군요. 기대가 큽니다.”
다음 순간, 한전의 몸에서 염력이 홍수처럼 쏟아지더니 이내 광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젊은이, 조심하게!”
곧이어 한전의 두 다리에 폭풍이 일며 그의 몸이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이준의 코 앞에 나타났다.
이준이 가볍게 왼쪽으로 몸을 비틀자, 염력이 담긴 주먹이 아슬아슬하게 옷깃을 스쳐 지나갔다.
“꽤 민첩하군!”
“바람의 발자국, 2장!”
이에 한전은 조금 당황한 듯 바람의 강도를 높였다. 그의 몸은 마치 바람과 하나가 된 것처럼 가볍고 민첩했다.
그러나 이준이 자신의 뒤를 바싹 쫓아오는 한전을 보며 가볍게 발을 구르자, 한전과의 거리가 좁혀지기는커녕 더욱 멀어질 뿐이었다.
“3장!”
이준이 움직이기 무섭게 등 뒤에서 또 한 번 광풍이 불어 닥쳤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준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가볍게 몸을 틀어 한전의 공격을 피해냈다.
회의실 안은 영혼의 힘으로 가득했고,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풀잎조차 이준의 탐지 능력을 벗어날 수 없었다. 아무리 빨라도 영혼 탐지능력이 있다면 미리 알고 피할 수 있었다. 바람의 발자국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대단한 무투기를 쓰더라도 이준의 반응 속도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4장!”
세 번의 공격이 모두 아슬아슬하게 빗나가자 한전의 표정이 점점 더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바람의 발자국’이 4장에 다다르자, 소용돌이에서 흡입력이 발생하며 한전의 몸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5장!”
“6장!”
한전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고, 바람의 발자국이 6장에 이르자,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그의 움직임을 볼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정작 한전을 상대하는 이준의 얼굴은 누구보다도 평온했다.
그렇게 한전이 한 걸음 다가가면 이준이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하는 일이 반복됐다.
“9장!”
바람의 발자국이 9장에 이르자, 한전의 발밑에 짙은 녹색의 회오리가 만들어지며 광풍에 의해 바닥이 깨지기 시작했다.
쉭!
다음 순간,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 푸른빛이 이준의 망토를 스치고 지났다.
“10단!”
마침내 한전의 무투기가 정점에 이르는 순간, 아홉 갈래의 푸른색 돌풍이 이준의 모든 퇴로를 차단했다.
한전이 인을 바꾸자, 아홉 개의 바람이 미친 듯이 회전하며 이준을 향해 조금씩 포위망을 좁혔다.
하지만 아홉 개의 돌풍이 이준에게 막 닿으려는 찰나, 공간에 미세한 파동이 일며 돌연 바람이 잦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