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7화. 낯익은 사람
예상대로, 이준이 실력을 드러낸 뒤로 그를 바라보는 한씨 가문 투사들의 눈빛이 변했다. 누구도 더 이상 예전처럼 그에게 허물 없이 장난을 치지 못 했다. 진작 예상했던 바였지만 막상 겪고 나니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후로 며칠간은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됐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남은 여정이 길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도시가 보이자, 한총을 비롯한 한씨 가문의 사람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들의 반응을 본 이준은 그 도시가 바로 천북성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가볍게 도시를 훑어보던 이준은 뒤로 두 걸음 정도를 물러나 한총 앞에서 멈춰섰다.
한총은 이준을 보자마자 곧바로 주먹을 감싸며 예를 취하려 했다. 이에 이준은 곧바로 손을 뻗어 그의 손을 붙잡았다.
“한총 형님, 그렇게 예의 차리실 거 없어요. 제 목숨을 구해주신 분이잖아요. 그냥 예전처럼 대해주세요.”
“이준 선생……. 아, 동생. 정말 고마웠네. 자네 실력이라면 우리 도움 없이도 충분히 잘 살아남았을 거야.”
말투는 예전대로 돌아갔지만, 한총의 표정에는 여전히 강자에 대한 동경이 가득했다.
이준은 속으로 쓴 웃음을 지으며 연금비약 한 알을 한총에게 건넸다.
“이거 가져가세요. 투왕을 돌파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거예요.”
이준의 한마디에 한총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벌써 투령 계급 최고 단계에 수 년간 머물러 있었지만, 여전히 그 벽을 넘어서지 못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투왕의 벽을 넘게 해주는 연금비약의 가격을 생각해보면 그리 덥썩 받을 수는 없었다.
“이……. 이준 동생, 이건 받을 수 없네. 내가 해준 거에 비해 너무 과한 선물이야.”
연금비약을 다시 돌려주는 한총의 모습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을 구해주고, 자신이 구해준 이가 보답을 하겠다는데도 그것을 마다하는 인품을 가진 사람은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보답이 하찮은 것이라면 모를까, 투왕을 만들어 주는 연금비약인데 그것을 거절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인격자라 해도 쉬이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었다.
“제 목숨 값보다 과하겠어요? 받으세요. 형님이 받지 않으면 사막에 던져 버리고 갈 거예요.”
이에 더욱 연금비약을 주고 싶어진 이준은 다시 한번 연금비약을 한총의 손에 쥐어주며 미소를 지었다.
결국 한총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면서도 연금비약을 받아 들 수 밖에 없었다.
잠시 후, 그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한가지 질문을 던졌다.
“자네 혹시 떠날 생각이야?”
이준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하. 동생, 불편해 할 거 없어. 우리 한씨 가문과 아무 인연도 없으면서 오는 길에 두 번이나 구해주지 않았나. 이 정도면 충분하니 마음의 빚 갖은 건 털어버려. 홍씨 가문은 만만치 않은 자들이니, 자네에게 화가 갈지도 몰라. 두 번이나 목숨을 구해줬으면 됐네. 더 이상은 아니야.”
한총의 진심어린 말에 이준은 더욱 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다그닥! 다그닥!
바로 그 때, 멀리 떨어진 성문 쪽에서 말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기척에 놀란 한총은 곧장 무기를 잡아 쥐었다가 이내 웃음을 지어보였다. 자리에 나타난 것은 한씨 가문쪽 사람들이었다.
“우리 쪽 사람이야.”
말 등에 타고 있는 사람들의 나이는 대략 23살에서 24살 정도로 보였다.
그 중 유난히 잘생기고 몸 좋은 사내 하나가 곧바로 한설을 향해 다가가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설아, 괜찮은 거야?”
사내를 보자, 한설의 차가운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난 별일 없어.”
그 때, 한설의 눈에 슬금슬금 달아나는 이준의 모습이 보였다.
“잠깐만! 거기 서!”
그녀가 자신을 향해 소리를 지르자, 이준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자리에 멈춰섰다.
“미안해. 내가 아까 너무 쓸데없는 소리를 했나 봐. 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가. 정말 미안해. 그 말 하려고 부른거야.”
결국 그녀의 그 말이 이준의 마음을 돌렸다. 무릎을 꿇고 부탁을 하는 것보다, 이런 것이 더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휴우……. 됐어. 남아 있을 게. 그렇지만 나한테 너무 큰 기대 하진 말고.”
“응? 정말?”
이준의 대답에 한설은 얼떨떨해 하면서도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즐거워하는 얼굴을 보자, 이준은 속으로 쓴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은빛성을 떠난 이래로 온갖 사람들과 싸우고 손을 잡아왔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본 것은 처음이었다.
“설아, 저 친구는 누구야? 처음 보는 분 같은데? 우리 한씨 가문 호위는 아닐 테고.”
“한림, 손님 앞에서 예의 좀 차려. 우리 호위무사가 아니라 우리 한씨 가문에게 큰 도움을 주신 분이야! 그리고 홍씨 가문과의 문제를 해결하는 걸 도와주시기로 하셨고!”
잘생긴 청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던지자, 한설의 표정이 또 다시 평소의 그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그래? 그런데 뭐가 좀 잘못된 거 아니야? 홍씨 가문을 상대하려면 아무리 그래도 투황 강자는 되어야 할텐데…….”
“홍목, 홍열을 잡은 사람이야. 그런데도 안 된다고?”
이어지는 한설의 말에 사내의 얼굴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익숙한 두 사람의 모습에 한림은 완전히 넋이 나가고 말았다.
“홍열이랑 홍목이야? 이 두 사람을 어떻게 너희가 데리고 있어?”
“우리 앞길을 막고 날 잡아가려 했어.”
한설의 담담한 대답에 한림은 너무 놀란 나머지 말까지 더듬기 시작했다.
“저, 저걸, 저, 저 녀석이 한 거라고?”
한림이 알기로 두 사람은 6성 투황에 달하는 강자로, 한씨 가문 전체를 뒤져봐도 그 둘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헌데 눈앞에 있는 젊은 사내가 두 사람은 이 꼴로 만들어 놓았다고 하니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당황한 한림은 그 상태로 말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무언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이준에게 고개를 숙였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한림의 시선이 다시 한설을 향했다.
“설아, 가자. 일단 집으로 돌아가야지. 가주님이 얼마가 걱정하셨는데.”
한설은 기절한 홍씨 가문의 두 강자를 마차 안으로 옮기도록 명한 뒤 몸을 돌려 이준을 바라봤다.
“가자. 우리 가문 사람들을 소개해 줄게.”
이에 이준은 깊은 한숨을 내뱉은 뒤 그녀의 뒤를 따랐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달아나고 싶었지만, 이미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한 이상 무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설의 얼굴에도 모처럼 웃음꽃이 피었다.
마차 행렬이 천천히 도시 내부로 들어가자, 사방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막에서 며칠을 지냈던 탓인지 도시의 소음이 더욱 낯설게만 느껴졌다.
성의 규모는 이준이 예전에 봤던 그 어떤 도시보다도 작았다. 그러나 거리에는 그 크기와 어울리지 않게 온통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씨 가문은 성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었고, 홍씨 가문은 반대로 북쪽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이 두 세력이야말로 천북성 전체를 들었다 놨다 하는 세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외에도 여러 자잘한 세력들이 있었지만 한씨 가문이나 홍씨 가문에 비하면 그 세가 너무나 미약해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게 번잡한 거리를 통과해 한참을 이동하자, 마침내 큰 정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원 입구에는 수십 대의 마차가 서 있었고, 그 위에는 모두 붉은 휘장이 달려 있었다.
그 장면을 보자마자 한설과 한림의 얼굴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홍씨 가문 사람들이 무슨 일로 우리 가문까지 온 거지?”
한림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설을 바라보며 물었다.
“들어가자.”
하지만 한설은 가볍게 고개를 저은 뒤 곧바로 뒤를 따르는 호위들에게 명령을 내릴 뿐 이었다.
정원 안으로 들어가 조금 더 걸어가니 한씨 가문의 회의실이 나타났다. 회의실 안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때, 이준의 시선이 회의실 안에 있는 누군가에게 멈춰섰다. 화려하게 번쩍거리는 은색 치마가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한율 선배? 어떻게 여기에…….’
그 순간, 이준은 왜 한설의 얼굴이 그렇게 낯익게 느껴졌는지 깨달았다.
과거 이준은 한율이 힘들게 찾은 지하의 유액을 몰래 가져갔고, 이에 대해 어느 정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자신이 구름 불꽃을 가져가 천계의 탑이 가동을 멈춘 사이 그녀가 졸업을 해버렸으니, 아쉽고 미안한 마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늘, 중주로 가는 첫 번째 길목에서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이다.
* * *
회의실 내부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홍씨 가문의 강자들은 팔짱을 낀 채 한씨 가문 사람들을 바라보며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회의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는 청색 옷을 입은 사내였다. 나이는 대략 26에서 27살 정도 되어 보였는데, 잘생긴 외모는 아니었지만 묘하게 인상에 남는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특히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풍당당한 기운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홍신,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리고 예고 없이 찾아오다니, 너무한 거 아닌가? 자네가 풍뢰북각의 제자라고 해서 너무 오만하게 구는 것 같군.”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시는군요. 저는 그저 한씨 가문이 지금까지 제시해온 조건에 응하실 의향이 있냐는 걸 묻고 있는 겁니다.”
홍신이라 불리는 사내가 은발의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한씨 가문은 가문의 안위를 위해 딸을 팔아먹는 집안이 아니네.”
그러자, 한씨 가문 측에 앉아있던 중년의 사내가 단호한 태도로 답했다. 상석에 앉은 것으로 보아 그가 바로 한씨 가문의 가주인 듯했다.
“하하. 가문이 있어야 딸도 있지요. 계집 둘을 지키다 집안이 망해서야 어디 조상님들 뵐 낯이 있겠습니까? 어르신께서는 제가 며칠 전 정식으로 풍뢰국각의 내각 제자가 됐다는 걸 모르시는 것 같군요.”
홍신의 말에 사내의 눈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홍신이 풍뢰북각의 내각제자가 된 이상, 홍씨 가문의 영향력이 더욱 커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 두 가문의 지난 정을 생각해서 제가 선택지를 하나 남겨 드리죠. 동년배 중 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삼일 후에 성 중앙 천석대로 보내십시오. 만일 제가 그 자에게 패한다면 앞으로 십 년 간은 한씨 가문을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대신 그 쪽이 진다면 한설과 한율은 모두 우리 가문에 시집을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한 가주와 장로들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갔다.
풍뢰북각의 내각에서 그를 내각 제자로 받아주었다는 것은 그의 실력이 이미 7성에서 8성 투황이 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정도 실력이라면 온 천북성을 통틀어도 그와 겨룰 만한 상대를 찾기 힘들었다.
아무도 선뜻 대답을 하지 못 하고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을 때, 한율이 입을 열었다.
“좋아. 한씨 가문에서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대신 져도 내 동생은 안돼. 나 혼자 시집가는 걸로 하겠어.”
“좋습니다! 그럼 일단 첫 째만 데려가도록 하지요. 그럼 삼 일 후에 천석대에서 뵙죠!”
말을 마친 홍신은 곧바로 사람들을 데리고 회의실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