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6화. 홍씨 가문
밝은 햇살이 쏟아지는 하늘 위에는 구름 한 점 걸려있지 않았다. 갓길에 서 있는 나무도 허리를 천천히 굽힐 정도로 뜨거운 날씨였다.
“다들 주목! 곧 천북성 지대에 도착할 거야!”
한씨 가문의 마차들은 투우장의 소처럼 미친 듯이 앞으로 질주했고, 불과 몇 분 만에 멀찍이 떨어져 있던 표지판에 도달했다.
슉! 슉! 슉!
그 순간, 돌연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숲 속에서 수 십 개의 화살이 날아왔다.
“하하. 나름 준비를 한 모양인데, 이것 참 미안하게 됐군……”
곧이어 숲 안에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새카만 그림자들이 튀어나와 천북성으로 가는 입구를 막았다. 한총을 비롯한 이들은 그중 가장 앞에 서 있는 두 노인을 노려봤다.
두 사람은 붉은 옷을 입고 있었고 두루마기 가슴 쪽에 빨간 휘장을 달고 있었다.
“홍씨 가문 사람이군.”
“하하하. 한설 아가씨를 데려와. 우리가 여기 온 건 바로…….”
노인들은 한총의 따가운 시선을 무시하며 한설이 있는 마치를 가리켰다.
그러자 마차의 문이 천천히 열리며 차가운 표정을 한 한설이 마차 밖으로 걸어 나왔다.
“저 같은 여자아이 하나 잡겠다고 홍목, 홍열 두 장로님까지 나서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쓸데없는 소리는 않겠다. 따라와!”
“꿈 깨시죠.”
노인들을 한설의 눈빛은 전에 없이 살기로 가득했다. 그녀가 손을 움켜쥐자, 염력으로 만들어진 장검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리석군.”
한설이 완강히 맞서자 홍열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기며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쾅!
두 사람의 염력이 맞닿는 순간, 강렬한 에너지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나지 않은 노인과 달리 한설의 갸날픈 몸은 하늘에 날린 연처럼 한참을 뒤로 밀려나 있었다.
“실력이 제법이군. 도련님이 좋아하시는 이유가 있었어.”
노인이 가볍게 발을 움직이자, 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한설의 앞에 나타났다.
홍열의 무시무시한 속도와 힘 앞에 한설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녀는 단 한 수만에 3성 투왕의 힘으로는 제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투황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러나 홍열이 막 한설의 어깨를 붙잡으려는 순간, 돌연 무형의 에너지 한덩이가 그의 등을 향해 날아들었다.
쾅!
잽싸게 염력을 끌어 모아 무형의 에너지를 막아낸 홍열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공격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봤다. 무형의 에너지가 날아든 방향에는 처음 보는 젊은 사내 하나가 서있었다.
“휴. 나이 든 어르신이 어린 친구나 괴롭히고. 헛사셨네요. 정말……”
“이봐 친구. 홍씨 가문과 한씨 가문의 일이니 끼어들지 말게나.”
“이준?”
허름한 검은 옷을 걸친 채 두 노인을 향해 걸어오는 이준을 발견한 한씨 가문의 사람들의 머릿속에 문득 뱀의 협곡에서 자신들을 도와준 강자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설마 동생이……!”
한총이 입을 열자, 이준은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괜찮죠?”
“역시 너였어.”
한설이 이준을 보며 말했다.
“이…… 이준 동생…… 너, 네가 그 신비의 강자였어?”
한총을 비롯한 사람들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는 바보마냥 말을 더듬어 댔다. 그들은 단 한 번도 자신들이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던 그 강자의 정체가 이준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단 저 귀찮은 것부터 해결하고 얘기하죠.”
이준이 뱀의 협곡에서 자신들을 도와주었던 그 강자라는 것을 깨닫자, 한씨 가문 무사들의 얼굴에 대번에 화색이 돌았다.
“자네는 누구지? 처음보는 사람 같은데. 천북성에 처음 온 모양이군?”
홍목이 험악한 살기를 뿜어내는 홍열을 말리며 말했다.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가시죠.”
“우리 홍씨 가문의 노여움을 사도 괜찮다는 소린가?”
이준의 당당한 한마디에 홍열의 얼굴이 더욱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당신들이야말로 내 노여움을 사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이이……. 새파란 애송이가. 기습에 한 번 성공했다고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하지만 이준은 두 강자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듯 한씨 가문의 호위 무사들에게로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따라 오시죠.”
이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의 말을 따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이에 한설은 곧바로 한씨 가문의 무사들을 바라보며 그의 뒤를 따르라고 명령을 내렸다.
“다들 따라가!”
한씨 가문 사람들은 움찔거리면서도 한설의 명에 따라 이준의 뒤를 따라갔다. 지금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바로 그들의 앞에 서 있는 검은 옷의 사내였다.
홍목은 어둡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이준을 비롯한 한씨 가문의 무사들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준의 실력을 확실히 알 수는 없었지만 조금 전 홍열을 공격했을 때를 생각해보면 투황 강자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였다.
홍목보다 더 거칠고 난폭한 성격을 가진 홍열의 표정은 곁에 있는 홍목과는 비교도 안 될만큼 일그러져 있었다. 지금 이준의 행동은 그들을 대놓고 무시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렇게 미쳐 날뛰는 어린놈은 생전 처음이었다.
“죽여라!”
결국 참다못한 홍열이 염력을 폭발시키며 소리를 지르자, 그들 주변에 있던 검은 무리들이 일제히 고함을 내지르며 마차 앞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에 한씨 가문의 투사들 역시 분분히 무기를 뽑아들며 적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선두에 있던 이준이 걸음을 멈추더니 손을 앞으로 내밀며 가볍게 주먹을 움켜쥐자, 형태 없는 파동이 빠르게 확산 되며 살기를 품고 달려드는 검은 무리들의 몸이 불덩이에 휩싸여 재로 변하고 말았다.
삽시간에 펼쳐진 참극에 홍씨 가문의 두 노인은 물론이고 한씨 가문의 투사들마저 완전히 얼이 빠지고 말았다. 오늘 이준의 불꽃은 뱀의 협곡에서 보았던 그것보다 더욱 뜨겁고 강렬했기 때문이다.
“가자!”
홍씨 가문의 투사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자, 홍열과 달리 신중한 성격을 가지고 있던 홍목마저도 염력을 폭발시키며 이준을 향해 몸을 날렸다.
두 투황의 기세에 한설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숨이 멎을 것만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준은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고 가볍게 손을 휘두를 뿐이었다.
“불의 움직임!”
“나무의 생명!”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소리를 지르며 염력을 내뿜자, 붉은 색의 염력과 녹색의 염력이 양쪽에서 이준을 향해 날아들었다.
“염력 융합 공격이 꽤 훌륭하군. 하지만 상대를 잘못 만났어.”
하지만 날아오는 불꽃을 보던 이준이 걸음을 멈춰 손바닥을 펼치는 순간, 청록색의 화염이 폭발하며 두 개의 염력을 집어삼켰다.
이준이 다시 한번 가볍게 소매를 휘두르자, 청록색 불꽃이 그대로 번개처럼 날아가 두 사람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쾅! 쾅!
곧이어 두 번의 가벼운 폭음이 울리며 두 노인의 몸이 저 멀리 밀려났다.
투황 둘을 가볍게 날려버리는 이준의 실력에 한총은 물론이고 한설마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씨 가문에서도 이준같은 실력자는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홍열과 홍목은 모두 천북성에서 나름대로 이름을 날린 강자였다.
헌데 눈앞의 사내는 일격에 두 강자를 날려 보냈으니,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돼, 너무 강해. 후퇴다!”
간신히 제자리에 멈춘 홍씨 가문 두 사람은 이준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후퇴를 명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두 사람의 힘으로는 눈앞의 애송이를 어찌할 수 없었다.
홍목이 소리치자, 홍열은 이를 갈면서도 염력 날개를 펼쳤다.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그 역시 눈앞의 젊은 사내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먼저 시작했으면 끝은 보고 가야지.”
하지만 이준은 두 사람을 보낼 마음이 없었다.
그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무형의 불꽃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두 사람의 등에 적중했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두 노인이 바닥에 추락하고 있었다.
마차 안은 은은한 향기로 가득했고, 주위에는 온통 분홍색 장식품이 달려 있었다. 임시로 꾸며진 아늑한 공간은 냉랭해 보이는 한설의 공간이라고 상상하기 어려웠다. 냉담하기 짝이 없는 태도와는 달리 꽤나 소녀 같은 취향을 가진 모양이었다.
한편, 이준은 불편해 보이는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한설이 직접 차를 따라 주자, 이준의 입가에 더욱 어색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한눈에 보기에도 한씨 가문의 아가씨는 이런 일들을 거의 해본 적이 없어 보였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편히 하세요.”
“그냥 한설이라고 불러줘. 그 쪽한테 아가씨라 불리는 것도 어색하니까. 어차피 나이도 비슷한 것 같고. 사막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생각 없이 데려왔는데 설마 이런 강자일 줄은 몰랐어. 뭐가 어떻게 됐든, 우릴 두 번이나 구해줬으니 감사 인사를 해야겠지. 정말 고마워.”
“아니야. 너희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진작 늑대 먹이가 됐을테니까. 그러니까 너무 마음에 두지 마. 무슨 보답 바라고 한 일도 아니니까. 그냥 목숨 값이라고 생각해줘.”
이준의 겸손한 답변에 한설은 웃는 듯 마는 듯 애매한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천북성에 도착하면 떠날 셈이야?”
“아마 그렇게 되겠지.”
“그럼 혹시 우리를 좀 도와줄 수 있을까?”
“한씨 가문이랑 홍씨 가문 일 때문에 그래?”
이준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날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은……. 홍씨 가문은 천북성에서 오래 자리 잡아온 세력이라며, 나 하나로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어?”
솔직히 말해 중주까지 와서 누군가의 노여움을 사고 싶지 않았다. 특히 홍씨 가문은 풍뢰각과도 이어져 있었다. 풍뢰각이라면 선화가 말한 중주의 유력 세력 중 하나였으니, 중주에 오자마자 그들과 각을 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 연금술사이기도 하잖아? 게다가 레벨도 낮지 않은 것 같고. 상급 연금술사라면 홍씨 가문에서도 감히 건드리려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너무나 간곡한 태도로 부탁을 하는 한설을 보니 냉정하게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생명을 구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도 있지만, 여태까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을 지켜준 한씨 가문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니 더욱더 난처한 기분이 들었다.
“이준, 우리 한씨 가문에게 이번 일만 무사히 넘기게 해준다면 아주 만족스러운 보상을 줄게. 제발 한 번만 도와줘.”
“켁……!”
이준은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입 안에 머금고 있던 찻물을 뿜어버릴 뻔했다. 한설이 갑자기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물론 무릎을 꿇은 와중에도 표정 변화가 거의 없어 이게 정말 부탁하는 사람의 태도인가 싶기는 했지만, 여간 당혹스러운게 아니었다.
“이, 이러지 말고 일어나서 얘기……. 아니다, 이 일은 내가 따로 고민해볼 테니 우선 여기까지 하자. 그럼 이만.”
당황한 이준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마차 밖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생명의 은인이 무릎을 꿇고 부탁을 하니 당혹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중주에 오자마자 풍뢰각과 맞붙고 싶지는 않았다.
서둘러 자리를 떠난 이준을 보며 한설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휴……. 역시 너무 무리한 부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