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5화. 공간의 힘
하온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또다시 영혼의 에너지가 번개처럼 하온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들었고, 결국 하온은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수풀 속으로 부리나케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하온이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는 모습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폭소를 터뜨렸다.
“참나! 하루 이틀 도망친 게 아닌가 보네. 여태껏 살아 있는 이유가 있었군.”
잠시 후, 정적을 깨고 또 다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씨 가문의 한설입니다. 이번에 저희를 도와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모습을 보여주실 수 있나요? 제가 평생 기억하겠습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강자덕에 목숨을 건진 한설은 곧바로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며 감사를 표했다.
“그냥 가는 길에 겸사 겸사 도왔을 뿐이네. 신경 쓰지 말고 가는 게 좋을 거야.”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난 것 같이 더 이상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한설은 실망한 듯 한숨을 푹 내쉰 뒤 가문의 호위무사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휴……. 가자.”
그녀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호위무사들은 잽싸게 마차를 끌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가 자리를 떠난 이상 이곳에 남아 있어봐야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호위무사들이 모두 자리로 돌아가자, 한설은 이준이 있는 마차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은 뒤 자신의 마차로 돌아갔다.
한편, 마차 안에 있던 이준은 가슴을 움켜쥔 채 격렬한 기침을 쏟아내고 있었다. 몸을 완전히 회복 하기도 전에 영혼의 힘을 이용해 다른 사람과 싸우는 건 역시 조금 벅찬 듯했다.
* * *
무사히 뱀의 협곡을 빠져나온 한씨 가문의 무사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던 분위기도 완전히 풀려 너나 할 거 없이 앞 다투어 아까 벌어진 일들을 떠들어대고 있었다.
“하하. 아까 하온이 꽁무니 빼는 모습은 정말 볼만 했는데! 아주 꼴 사납더라고!”
“다 그분이 강하셔서 그런 거지! 최소 6레벨 연금술사일 거야. 아니면 영혼의 힘만 갖고 하온을 쫓아내긴 힘들 테니까.”
“쩝……. 6레벨 연금술사라니. 우리 한씨에서 제일 잘 나가는 연금술사가 5레벨 아니었어?”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도 진짜 운이 좋았던 거지. 그래도 그 분 얼굴 한 번 못 본 건 너무 아쉽다. 6레벨 연금술사면 천북성 전체에도 손에 꼽을 정도일 텐데!”
“이봐, 꿈 깨. 그 정도 되는 강자가 우릴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마차 안에서 사람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준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커튼이 갑자기 열리더니 한총이 물이 가득 담긴 수통 하나를 이준에게 내밀었다.
“많이 놀랐지?”
“괜찮아요.”
보아하니 한총 역시 조금 전의 일 때문에 적잖이 놀란 듯했다.
그가 연신 함박웃음을 지으며 조금 전 그 정체불명의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자, 이준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총은 거의 십분 가까이 그 ‘선생님’에 대한 칭찬을 해댔다.
“뱀의 협곡을 지났으니 이제 위험한 일은 없을걸세. 산적들이 좀 있기는 하지만, 실력이 변변찮은 놈들이라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본래 뱀의 협곡을 돌아가려 했지만 사막에 폭풍이 부는 통에 어쩔 수 없었네. 그래도 협곡을 통과한 덕에 며칠은 시간을 아끼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아주 잘 됐어.”
“형님, 천북성까지는 얼마나 더 걸릴까요?”
“순조롭게 갈 수만 있다면 6일 정도 걸릴 것 같아.”
“6일이라…….”
6일이라면 상처를 완쾌하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그러나 도시에 들어가면 강자가 널려 있을 게 분명했기에 서둘러 염력을 회복해야만 했다.
이준은 천북성에 도착하면 영혼의 궁전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고, 가능하다면 불의 협곡도 한 번 들러 보고 싶었다. 천계의 불꽃의 남은 두 장을 손에 넣을수만 있다면, 화련을 사용하지 않고도 투종 강자에게 맞설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한총은 그저 몸 관리 잘 하라는 당부를 남긴 뒤 마차에 올랐다.
다행히 한총이 나간 뒤로 누군가가 또 찾아와 그를 방해하는 일은 없었다. 모두 이준이 부상을 입었다는 알고 있기에 그를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써주는 것 같았다.
몇 시간 정도 가만히 염력을 회복하며 시간을 보내자, 또 다시 마차가 멈춰서는 것이 느껴졌다.
커튼을 걷고 하늘을 확인해보니 어느새 밤 이었고, 한씨 가문의 사람들은 또 다시 능숙하게 천막을 펼치고 있었다. 사막 지대에서 한밤중에 이동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 이었다. 이동거리도 얼마 되지 않는데다가, 위험한 일도 많았기 때문이다.
반나절을 요양한 덕인지 몸에서 느껴지던 통증도 상당히 줄어들어 있었다.
이제 혈관 속에 염력이 흐르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원래 실력을 회복하려면 한참 부족했지만, 어찌됐든 문제없이 상처가 회복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차의 움직임이 멈추자 이준도 커튼을 열고 차에서 내려 천막을 칠 뼈대를 들고 한총을 향해 다가갔다.
걸음을 옮기다보니 돌덩이 위에 서 있는 한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나요?”
이준의 질문에 한설은 말없이 손목을 잡더니 돌연 상대의 몸에 자신의 염력을 흘려 보냈다. 염력은 이준의 몸 속에서 한 바퀴 돌고 난 뒤 다시 그녀의 몸 안으로 흡수됐다.
염력을 통해 상대의 몸 상태를 확인해 본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준의 몸을 몇 번이나 위 아래로 훑어봤다.
“아니……. 딱히. 몸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일 안 해도 괜찮으니 가서 쉬고 있어. 이건 다른 사람 시키고.”
“하하. 괜찮아요. 다치긴 했어도 몸을 못 쓸 정도는 아니니까요.”
이준은 명랑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은 뒤 짐을 짊어진 채 한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상하네.”
한설은 자신의 짐작이 틀렸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는지 그 후로도 한참동안이나 이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 * *
사막의 밤은 여전히 차갑고 황량했고, 야영지 인근에는 모닥불이 타닥거리며 타는 소리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야영지 한쪽에 위치한 단촐한 모양의 천막 안에서는 온 몸에 연금비약을 덕지덕지 바른 이준이 눈을 감고 염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수련을 마치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뜨거운 사막의 태양이 다시 대지를 비추고 있었다. 이제 혈관에 어느 정도 염력이 도는 것이 느껴졌지만, 만족할만한 수준이라고 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자리를 정리하고 막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몸 안에서 그 동안 느껴보지 못한 기묘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이에 이준은 천천히 손바닥을 펼친 뒤 그 위에 피어오른 청록색의 염력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무언가 이상했다.
“공간의 힘?”
있을 수 없는 일 이었다. 공간의 힘은 반드시 투종 계급이 되어야 겨우 다룰 수 있는 힘이었다. 그 이전이라면 투황 최고 계급 강자라해도 그 신비의 에너지를 조작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 앞에 나타난 건 의심의 여지 없이 공간의 힘이었다.
“설마…… 공간 통로에서 벌어진 폭발 때문에 내 몸에 공간의 힘이 흘러 들어간건가?”
천천히 손바닥을 쥐어보자, 손을 쥔 곳의 공간에 미세한 굴곡이 생겼다.
한총이 말한 것처럼 그 뒤의 여정은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간혹 가다 사막에 사는 마수를 만나기는 했지만, 모두 저급 마수들이라 가벼운 부상을 입는 사람조차 나오지 않았다.
며칠간의 수양을 통해 이준의 실력은 점차 예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회복되어 있었고, 염력 역시 생각보다 빠르게 제 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이준은 실력이 회복된 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한씨 가문의 사람들이 퍽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굳이 실력을 밝혀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준 정도 실력이면 자신의 기운을 숨기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리에서 가장 강한 한설조차도 이준의 발끝도 못 따라올 정도였으니, 아무도 그가 실력을 감추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한설의 태도를 보니 아마도 뱀의 협곡에서 그녀를 도와준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뱀의 협곡을 빠져나온 이래로 그녀는 이준에게 궂은 일을 시키지 않았고, 대화를 나누다가 은근슬쩍 이준의 내력에 대해 묻기도 했다. 물론 이준은 그 때 마다 적당히 둘러대며 자신에 대해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는 길 내내 한설은 이준의 정체를 캐내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뱀의 협곡을 지난지 닷새째 되던 날, 천북성 방향으로부터 한씨 가문의 휘장이 그려져 있는 새가 편지를 물고 날아왔다.
“아가씨, 무슨 일이시죠?”
편지를 읽던 한설의 표정이 어둡게 내려 앉자, 한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우리 가문에서 온 편지야. 홍씨 가문이 또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조심하라고 하네.”
“대체 또 무슨 꿍꿍이 일까요?”
“홍씨 가문의 노인네가 나랑 언니가 같이 홍신에게 시집가길 원한대. 물론 최종 목표는 우리 한씨 가문을 빼앗아 천북성의 패권자가 되는 거겠지.”
“이놈들이 감히! 저희 가문을 뭘로 보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총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정작 한설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괜찮아. 내일 천북성 지역에 들어갈 거니까 다들 조심해.”
“네!”
한설이 사라지자, 야영장이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보아하니 홍씨 가문이라는 세력은 요괴 뱀 하온보다 더 강하고 두려운 존재인 모양이었다.
“한총 형님, 홍씨 가문이 그렇게 강한가요?”
“굳이 말하자면 홍씨 가문이야 말로 천북성에서 가장 강한 가문이라 할 수 있지. 우리 한씨 가문도 그 쪽 앞에선 피라미일 뿐이고. 가장 중요한 건 홍씨 가문의 홍신이라는 자가 풍뢰각 사람이라는 점이지.”
이준의 질문에 한총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홍씨 가문도 그거 하나 가지고 몇 년 사이에 폭발적으로 성장한 거야. 풍뢰각은 중주 북부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하는 엄청난 세력이니까.”
“풍뢰각이면 다야? 홍씨 가문에서 정말로 아가씨를 데려간다면 내가 목숨을 걸고 그 놈들을 길동무로 삼겠어!”
모닥불 근처에 앉아 있던 젊은 호위가 씩씩대며 말했다.
하지만 한총은 술을 한잔 들이킨 뒤 이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짐짓 별 일 아니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준 동생. 보아하니 우리 한씨 가문도 안전하지 않은 것 같아. 천북성에 도착하면 아가씨에게 여비 조금만 챙겨 달라고 부탁할 테니 괜히 우리 일에 휘말리지 말고 떠나게. 그게 자네에게 좋을 것 같아.”
한총의 제안에 이준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가만히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자자, 시간도 늦었는데 다들 일찍 들어가서 쉬어야지. 야간 보초 인원을 더 늘려. 가문까지만 무사히 갈 수 있어도 안전해질 거야.”
한총은 또 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안으로 돌아갔다.
유난히 피곤해 보이는 뒷모습을 보며 이준은 손에 들고 있던 나무 조각을 모닥불 속으로 던져 넣었다.
그는 그렇게 한참을 모닥불 앞에 앉아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다가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천막 안으로 돌아갔다.
“휴……. 정이라는 게 참 무섭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