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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만이살길-454화 (454/818)

제454화. 뱀의 협곡

이준은 조용해진 천막을 보며 고개를 젓다가 이내 자신의 천막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천막에 돌아온 이준은 잠에 들지 못하고 저장 반지로부터 연금비약 한 병을 꺼내 몸에 발랐다. 그러자 차갑고 시원한 느낌이 들며 부드러운 에너지가 피부를 따라 몸속으로 녹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몸의 변화를 느낀 이준의 다시 옷을 걸친 뒤 자세를 바로잡고 수련 상태에 들어갔다. 이제 며칠만 더 있으면 몸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

* * *

다음 날, 주둔지에서 울려 퍼지는 요란한 소리가 이준을 잠에서 깨웠다. 주먹을 살짝 쥐어보니 통증이 많이 줄어들었음이 느껴졌다.

‘이상하네……. 생각보다 회복이 너무 빠른데?’

옷을 갈아입은 이준은 곧바로 텐트 밖으로 나가 일을 거들었다.

이준이 사람들을 도와 손 안에 있던 천막을 마차 안으로 던져 넣고 있을 때, 한설이 다가와 짤막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너는 오늘 그 마차 안에서 나오지 말거라.”

말을 마친 한설은 이준에게 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바로 마차에 올라타 명령을 내렸다.

“출발!”

이준은 마차 바퀴가 덜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처음 보는 사람의 안위를 이렇게까지 걱정해 주다니, 이렇게 괜찮은 사람들을 만나본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 * *

황량한 사막의 길 위에는 모래바람이 끊이지 않고 윙윙대며 하늘을 맴돌고 있었다.

이준은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창문에 기댄채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사막의 따가운 햇빛이 한씨 가문의 호위병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오늘 그들의 얼굴은 완전히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밝고 소탈한 모습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보아하니 요괴 뱀이라는 게 엄청 무서운가 보네.’

이준은 커튼을 내리고 다시 정신을 집중한 뒤 수련에 들어갔다.

대략 2시간이 정도가 지나자, 드디어 마차가 멈추었다. 커튼을 걷고 바깥 쪽을 내다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음험한 기운이 가득한 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람들의 표정은 두 시간 전보다도 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눈앞에 있는 산이 뱀의 협곡인 모양이었다.

“모두들 조심하라, 뱀의 협곡으로 들어왔다. 기씨, 너는 사람들을 데리고 길을 따라 뱀을 쫓는 가루를 뿌려. 이곳의 뱀들은 전부 하온을 따르니 그들을 건드리지만 않으면 아마 순조롭게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혹시나 발각 되더라도 명령이 없으면 함부로 움직이지 마. 명령을 어긴 자는 가만두지 않겠다.”

“예!”

“가자!”

한총의 분부 아래 마차군단들은 다시 움직여 빠르게 협곡 아래로 진입했다.

“이준 동생, 만약 진짜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우리 아가씨를 데리고 도망가줘.”

잠시 후, 한총이 마차로 다가와 커튼을 걷으며 말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통행료를 요구하면 그냥 주면 되지 않을까요?”

“그 털복숭이 뱀은 돈 욕심만 많은 게 아니라 아름다운 여인만 보면 발정난 짐승같이 변하거든. 그러니 조금 걱정이 돼서 말이야. 이 곳은 천북성에서 아직 멀리 떨어진 곳이라 한씨 가문의 힘도 미치지 않으니까.”

이준은 그제서야 그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를 알았다.

“형님, 걱정 마세요. 아무일 없을 거예요.”

이준의 위로에 한충은 자조 섞인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이준이 얼마나 큰 부상을 입었는지 잘 알면서도 그에게 아가씨를 데리고 가달라고 부탁을 하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우습기 짝이 없는 일 이었다.

어느새 마차는 점점 협곡 안쪽으로 들어서 있었다. 마차 군단은 하온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바퀴를 헝겊으로 감싸고 짐을 실은 마차에도 검은 천을 덮어둔 상태였다.

마치의 양쪽에서는 무기를 손에 든 한씨 가문의 호위무사들이 백색 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조심스럽게 나아가자, 마침내 협곡의 출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모든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들의 입가에 막 웃음이 번지려던 찰나, 온 협곡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제길, 발각됐어! 빨리! 가자!”

한총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협곡 양쪽의 나무가 쓰러지며 거대한 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씨 가문의 호위무사들은 수레를 끄는 검은 소를 재촉해 속도를 높였다. 이제부터는 뱀들에게 발각되지 않게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일초라도 빨리 협곡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쿵!

하지만 그들이 협곡의 출구와 100미터 도 채 남지 않았을 때, 갑자기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나 출구를 가로막았다.

“제기랄…….”

떡하니 길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뱀의 모습에 한총은 온 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곧이어 주변의 숲에서 형형색색의 독사들이 기어나와 마차를 완전히 포위해 버렸다.

“큭큭. 멍청하긴. 무사히 지나가게 둘 줄 알고?”

그 때, 하늘 위에서 괴상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괴이한 형상을 한 괴물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차군단의 상공에 출현한 괴물은 사람의 몸과 사지를 가졌지만 피부에는 촘촘하게 진녹색 비늘이 박혀 있었고, 뱀처럼 길고 빨간 혀를 가지고 있었다.

반인반수의 모습을 한 그의 등 뒤에서는 녹색 염력 날개가 퍼덕이며 광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온이 높은 곳에서 마차군단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리들의 규칙을 알고 있겠지?”

이에 한총은 침착하게 마차 쪽으로 걸어가 수정 카드 하나를 꺼낸 뒤 그것을 공손하게 하온에게 건넸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하온 총령님, 저희는 천북 지역 한씨 가문의 부대입니다. 여기 약소한 선물을 준비했으니 거두어 주시지요.”

하온은 손을 뻗어 한총이 건넨 수정 카드를 뺏더니 곧바로 한설이 타고 있던 마차를 가리켰다.

“이걸로는 부족하지. 그 년은 두고 가거라!”

그 순간 수레군단의 모든 사람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하지만 한총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척 시치미를 뚝 떼고 하온에게 질문을 던졌다.

“총령님, 그 말씀이 무슨 뜻이신지요?”

“나를 속이려 들지마라. 여인의 몸에서 나는 그 향기는 감출래야 감출 수 없지.”

철컥.

독사들이 마차의 문을 열자, 안에 타고 있던 한설의 얼굴이 하온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주 훌륭해. 정말 오랜만에 보는 미인이군.”

마차에서 내린 한설은 곧바로 염력을 끌어올리며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의 실력으로는 결코 하온을 이길 수 없었다. 이에 한총이 다시 한번 하온의 앞을 막아서며 입을 열었다.

“하 총령님, 우리는 천북성 한씨 가문의 사람들 입니다. 당신이 만약 우리를 건드린다면, 한씨 가문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입니다.”

“큭큭. 한씨 가문? 제 아무리 강한 녀석이 있다 하더라도 날 이길 수 있겠느냐? 게다가 너희를 모두 죽여버리면 한씨 가문이 무슨 수로 내 짓인줄 알고 이곳에 찾아오겠느냐?”

말을 마친 하온이 입으로 이상한 소리를 내자, 협곡 양측에서 더욱 많은 독사들이 쏟아져 나와 길을 가득 메웠다.

수 만 마리의 독사들에 둘러싸인 한씨 가문의 호위 무사들은 저마다 무기를 꼭 쥔 채 죽기 살기로 뱀들에게 저항했다. 하지만 그들의 실력으로는 하온은 커녕 독사들조차 어찌할 수 없었으니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렇게 모두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돌연 허공 위에 거대한 화염구 하나가 나타나더니 단번에 수천 마리의 독사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거대한 화염구의 모습에 한씨 가문 사람들은 물론이고 하온 마저 깜짝 놀라 그대로 얼어버리고 말았다.

“뭐… 뭐지?”

거대한 화염구가 지나는 곳마다 모든 것을 불살랐고, 수 만 마리의 독사가 순식간에 형체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너무나 갑작스런 상황에 협곡 안에는 순간 적막이 내려 앉았다.

잠시 넋이 나가있던 한총과 한씨 가문의 호위 무사들은 황급히 무기를 손에 든 채 한설에게로 달려가 그녀를 둘러쌌다.

정신을 차린 하온이 기묘한 소리를 내며 울부짖자, 협곡을 가득 메우고 있던 독사들이 다시 인간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독사들이 한씨 가문의 호위 무사들에게 닿기도 전에 또 다시 사방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하늘에서 불비가 내렸고, 삽시간에 수 만 마리의 독사들이 새까만 재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한설과 한총은 화들짝 놀라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온 천지를 둘러보아도 독사들을 불태운 장본인을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때, 정신없이 주위를 살피던 한설의 눈이 한 마차 위에서 멈췄다. 그녀의 눈길이 멈춘 곳은 바로 이준이 타고 있던 마차였다.

‘설마…….’

하지만 그녀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돌연 하온이 입을 열었다.

“저는 하온입니다. 제가 무슨 잘못한 것이 있으면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오늘의 일은 저와 이 가문의 사사로운 일이니 그만 돌아가 주셨으면 합니다.”

하온이 말을 마치자, 나지막한 목소리 하나가 협곡에 울려퍼졌다.

“꺼져.”

그 정체불명의 목소리는 하온의 목소리보다도 더욱 힘있게 온 협곡에 메아리 쳤고, 이에 한씨 가문 사람들의 얼굴에는 대번에 화색이 돌았다.

“설마 이 보잘 것 없는 것들을 감싸고도시는 것 입니까?”

하온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지만, 상대의 실력이 자신보다 강하다고 생각했는지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고 있었다.

“열 셀 동안 꺼지지 않으면 죽이겠다.”

또 다시 계곡 안에 살벌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하온의 눈이 더욱 더 살기로 불타올랐다.

그는 이곳에서 몇 년 동안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협해 왔지만, 사실 그의 실력은 중주에서 그리 대단한 축에 속하지 못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동안 뱀의 협곡에서 왕처럼 군림해 온 것은 그저 산맥이 너무 크고 뱀 동굴이 너무 많아 강자들이 애써 그를 찾아 죽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온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정 이들을 돕고 싶으시다면 저 하온은 오늘 물러가겠습니다.”

상대의 실력이 자신보다 위라는 것을 확신한 하온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도 날개를 펼쳐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몸이 향한 곳은 협곡 안쪽이 아니라 한설의 곁이었다.

“아가씨, 나랑 함께 가지!”

“죽여 달라는 소리군!”

그러나 하온이 손을 올리기 무섭게 노성이 메아리치더니 돌연 무형의 에너지가 그의 가슴팍을 호되게 후려쳤다.

퍼—엉!

“아악!”

그 순간, 하온의 가슴팍에서 나지막한 폭발음이 울려 퍼지며 피가 터져 나왔다.

“아가씨를 지켜!”

하온의 가슴에 달려있던 비늘이 산산이 부서지며 그가 뒤로 밀려나자, 한총을 비롯한 한씨 가문의 무사들이 다시 한설을 둘러쌌다.

일격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하온의 모습을 보며 한설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하온은 실력도 강한데다 마수의 몸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방어 능력은 비슷한 수준의 강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그런 하온이 상대가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피투성이가 되어버렸으니,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소리란 말인가. 한씨 가문을 통틀어도 이 정도 수준의 강자는 찾아보기 힘들 것 같았다.

“영혼의 힘? 연금술사로군!”

무형의 힘과 접촉하고 나서야 하온은 그 공격이 연금술사가 가장 잘 다루는 영혼의 힘을 사용한 공격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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