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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만이살길-453화 (453/818)

제453화. 한설

커튼을 열어 젖히자, 천으로 덮인 마차 두 대가 보였다. 두 대의 차량 앞에서는 머리 위에 날카로운 뿔을 갖고 있는 들소처럼 생긴 마수 하나가 마차를 끌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차량의 양쪽에는 많은 사람들이 말을 타고 있었다. 말을 탄 사람들은 팔을 드러낸 채 거친 가죽으로 된 옷만을 걸치고 있었으며, 그들의 등 뒤에 걸린 무기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 반짝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오오, 저 친구 살아남았네? 하하! 정우, 이번엔 네가 졌지?”

커튼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이준을 발견한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사내의 몸집은 튼튼하고 우람했으며, 팔 위에는 흉터가 가득했다.

“그렇게 큰 상처를 입고 어떻게 살아나지? 정말 대단한 친군데 그래…….”

덩치 큰 남자가 한 마디하자, 옆에 있던 마른 사내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쳇. 우쭐거리긴.”

“푸하하! 시끄러워, 돈이나 내놔.”

덩치 큰 사내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린 뒤 말을 끌고 이준이 있는 마차 곁으로 다가왔다.

“어이 친구. 나는 기두영이라고 하네. 다른 사람들은 나를 ‘기씨’라고 부르지. 저기 북방 사막에서 자넬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나야.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덕분에 아까 내기에 이겨서 돈을 받았으니까, 그걸로 대신하지!”

“감사합니다 형님. 저는 이준이라고 합니다.”

사내의 소탈한 태도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그들의 투박한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예전에 타르 사막에서 형들이 관리했던 용병단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무투사에서 투령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금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기두영’이라는 사내의 실력은 2성 투령 정도였다.

“하하, 오랜만에 형님 소리 들으니 참 좋구만! 앞으로 내가 널 지켜주지.”

‘형님’이라는 칭호가 마음에 들었는지, 기두영은 또 다시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때, 한총이 다가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감탄하듯 말했다.

“대단한데. 이준 동생, 상처가 그렇게 심했는데……. 대체 어떻게 하면 이틀만에 회복해서 걸어 다닐 수 있는거지?”

“제 명줄이 질긴가 봐요.”

“허허허, 그러게 말이야.”

한총은 신기하다는 듯 이준의 몸을 위 아래로 한 두 번 정도 훑어본 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봤다. 어느새 하늘이 반쯤 어두워져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군. 기씨, 자네가 사람들 좀 데리고 근처에 머물만한 장소가 있는지 좀 알아봐 줘. 랑아, 너는 주변에 보초를 좀 세우고, 철비야 넌…….”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으로 보아 한총은 이 무리에서 꽤나 지위가 있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명령을 마친 한총은 다시 이준을 보며 가볍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걸을 수 있겠어?”

이준은 멀쩡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차가 흔들거리기 무섭게 그의 몸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아무래도 조금 더 쉬어야겠네. 중상을 입었으니 치유 되는 데에 시간도 걸릴 거고 후유증도 있을 거야.”

한총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이준은 웃으며 걱정할 필요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준의 활달한 모습에 한총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다시 등을 돌려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마차 부대는 단 30분 만에 작은 산에 몇 개의 하얀 천막을 쳤고, 천막 밖에 울타리를 친 뒤 그 주변에 해충 쫓는 약을 살포했다. 마치 매일 같이 야영을 하는 듯 능숙한 모습이었다.

이준은 몸 상태가 안 좋아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진영 아무데나 자리를 잡고 앉아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자리에 있던 마차 중 하나는 다른 것들에 비해 유난히 화려했다. 은은한 향기가 나는 걸 보니 분명 여자가 타고 있는 듯했다. 그 속에서 3성 투왕 계급의 기운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 그녀가 이 부대에서 가장 강한 사람인 듯했다.

철컥.

이준이 그 화려한 마차를 바라보고 있을 때, 굳게 닫혀있던 마차의 문이 열리며 가느다란 다리 하나가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는 하얀 피부에 큰 키를 가졌고, 보라색 옷을 입고 있었으며 나이는 이준과 얼추 비슷해 보였다.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이준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에선가 한번 마주친 적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자 호위대 전원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예를 갖췄다. 형식적인 예의가 아니라 진심으로 상대를 존경하는 듯한 태도였다.

여자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진영을 쭉 살폈고, 이에 사람들은 괜히 더 열심히 일하는 척 수선을 피워댔다.

진영을 살피던 젊은 여인은 이준을 발견하고는 천천히 걸어와 질문을 던졌다.

“네가 한 집사가 길에서 구했다는 사람이야?”

“네.”

이준은 일어나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 탓에 휘청거리다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이준의 모습에 젊은 여인은 못 마땅하다는 듯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 부대에 들어온 이상 남들은 다 일하는데 이렇게 여유롭게 쉬고 있으면 안돼. 지금 몸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으니 더 이상은 말하지 않을게. 그렇지만 다음에는 같이 울타리라도 쳐줘.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여자의 표정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말투도 얼음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오만하거나 상대를 무시해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아마도 원래 이렇게 무뚝뚝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의 표정이 조금은 부드럽게 풀렸다.

“내 이름은 한설이야. 이 부대의 관리인이지. 나중에 무슨 일이 있으면 나를 찾아 와. 네가 열심히 하면 네가 한씨 가문 무리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 줄게. 아주 부유한 건 아니어도,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될거야. 그리고 이걸 먹어. 상처를 치료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될거야. 그리고 내일은 요괴뱀 하온의 영토를 지날거야. 위함한 곳이니 웬만하면 마차 밖으로 나오지 마.”

말을 마친 한설은 연금비약 하나를 이준에게 건넨 뒤 곧바로 자신의 천막 안으로 걸어갔다.

한설로부터 비취색 약병을 받은 이준은 웃으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말투는 차가웠지만,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저 나이에 3성 투왕이면 실력도 뛰어난 편이니 사람들이 그녀를 존경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본 것은 그녀의 실력이나 품성에 감동해서가 아니라, 그녀에게서 계속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그녀를 어디서 봤던 걸까. 아무리 되짚어봐도 떠오르질 않았다.

* * *

밤이 깊어지고, 아득한 하늘 위에 떠있는 은색 달이 희미하게 사막을 밝혀주었다.

황량한 벌판의 작은 산등성이 위에서는 몇 개의 모닥불이 타오르며 진영 전체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모닥불 주위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이준 역시 모닥불 주위에 앉아 미소를 띤 채 얼굴이 벌개진 사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준 동생, 사막의 밤은 추우니 몇 잔 하고 몸 좀 덥혀!”

이준이 멍한 표정으로 그 여인을 어디서 보았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 기씨가 다가와 술잔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이준은 한총이 건네준 술을 받아 든 뒤 가볍게 한모금을 들이켰다. 뜨끈한 술이 뱃속에 들어가자, 온 몸이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허허, 저 친구 대단하네. 남자다운 면이 있어.”

이준이 한 입에 독한 술을 들이킨 것을 본 한씨 가문의 호위병들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그 때, 주둔지 중심부의 천막이 젖혀지며 한설이 걸어 나왔다.

텐트 밖으로 나온 한설은 주위를 한 바퀴 휘둘러보더니 이준과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모닥불 위에 올려진 구운 고기를 한 점 뜯어내 입으로 가져갔다.

한설이 나타나자 한총을 비롯한 사람들의 말소리가 적어지고 걸쭉한 농담들이 잦아들었다.

이준은 고개를 들어 무표정한 얼굴로 고기를 씹고 있는 한설을 바라보며 그녀를 어디에서 보았는지 떠올리려 애썼다.

“하하, 왜 그래? 아가씨에게 반한 거야?”

그 때, 한설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이준의 모습을 발견한 한총이 피식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호위병들 중 서른 이하인 호위병들은 모두 아가씨에게 마음이 있을 정도니까.”

한총의 장난스런 말에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마음은 따뜻한 분이야. 저번에 호위병 중 하나가 임무 중 중상을 입었을 때, 아가씨께서 가문으로부터 돈을 받아 그 호위병의 가족에게 건네 주셨지. 다른 곳에서는 사람이 쓸모가 없어지면 바로 버려지지만, 이곳은 달라. 모두 아가씨 덕분이지. 게다가 실력도 뛰어나고 얼굴도 아리따우시니 젊은 사내놈들이라면 아가씨에게 반하지 않는게 이상할 정도지.”

한총이 자신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는 사이 식사를 마친 한설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진지를 둘러보더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야간 보초를 서는 호위병들은 술을 주지 말고, 나머지 호위병들에게도 술을 많이 주지 마. 그리고 내일이면 하온의 영지를 지나야 하니 모두 각별히 유념하라 전하고.”

말을 마친 그녀는 가벼운 걸음걸이로 다시 천막으로 돌아갔다.

한설이 텐트 속으로 들어가자, 주둔지의 분위기가 조금 무겁게 내려 앉았다.

어떤 이는 인상을 찌푸리고 낮은 목소리로 욕을 하기도 했는데, 거리가 멀어 명확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하온이라는 말이 들렸던 것을 보면 한설이 얘기했던 그 ‘하온의 영지’라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어휴, 아무리 술이 좋아도 그렇지 완전 잊고 있었네. 그래 좋아, 다들 그만 마셔! 야간 보초 서는 애들도 두 배로 늘려서 사고 나지 않게 하고.”

한총은 술 주머니를 받쳐들고 게걸스럽게 술을 들이부은 뒤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한총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른 젊은이들도 하나 둘 몸을 일으켜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한총 형님, 그 하온이라는 건 뭐죠?”

이준의 질문에 한총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내일 우리는 ‘뱀들의 협곡’이라고 불리는 곳을 지날걸세. 그 곳은 요괴뱀의 영역이야. 그 곳의 지배자가 바로 하온이지. 이 놈이 최상위 포식자 자리에 오른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엄청나게 강한 상대라 엮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요괴 뱀은 뱀들의 협곡의 모든 4레벨 이하의 독사들을 통제할 수 있네. 그래서 이렇게 오랫동안 거기에 터전을 마련한거고. 상인 무리들도 지나갈 때마다 통행료로 적지 않은 금액을 내야 지나갈 수 있어. 따르지 않는다면……. 살아서 통과하기는 힘든 곳이지.”

“요괴 뱀이라고는 해도 마수일텐데, 마수가 그런 짓을 하나요?”

“6레벨 마수는 대부분 영리하고 강해. 그리고 하온은 요괴의 구슬을 먹은 적도 있어서 다른 6레벨 맹수들보다 지능이 높아.”

”요괴의 구슬이요? 그 약이 맹수의 모습도 바꿔준다는 말입니까? 제가 기억하기로는 마수의 구슬만이 그런 효과를 가지고 있는데……. 심지어 7레벨 연금비약이고요. ”

이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한총이 다시 설명을 늘어 놓았다.

“요괴의 구슬은 6레벨 연금비약이지만 효과는 마수의 구슬이랑 비슷하네. 요괴의 구슬은 일부분의 형상만 바꿀 수 있지만, 마수의 구슬보다 효과가 훨씬 강해서 마수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

한총의 설명에 이준은 곧바로 한설이 그렇게까지 걱정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6레벨 마수라면 부대에서 가장 강한 한설도 감히 상대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일은 그 놈들이 곱게 넘어가줬으면 좋겠군. 동생, 자네는 들어가서 먼저 쉬고 있게. 나는 일이 좀 있어서 말이야.”

한총은 한숨을 쉬며 이준의 어깨를 두드리고 곧 주둔지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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