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2화. 한총
보람의 도움 덕에 아라의 부담이 잠시나마 줄어들었지만, 너무 큰 힘을 사용한 나머지 그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게다가 각성한 보람의 힘으로도 공간 폭풍을 완전히 저지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두 사람의 힘으로 인해 선체가 조금 안정되기는 했지만, 이준은 조금도 마음을 놓지 못 했다.
공간 폭풍의 힘은 점점 더 무서워질 것이며, 지금은 시작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선체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난폭한 힘으로 인해 선체를 감싸고 있던 아라의 염력은 점점 더 옅어지고 있었고, 이곳 저곳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결국 견디다 못한 아라가 피를 토하자, 보람의 몸에서 더욱 강렬한 보라색 에너지가 터져 나와 선체 전체를 감쌌다.
하지만 보람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각성만으로도 큰 힘을 소모하는데 그 상태로 에너지를 끌어 올렸으니 부담 역시 그만큼 컸던 것이다.
“선배! 출구가 보여요!”
모두가 절망에 휩싸이려는 찰나, 선화가 앞쪽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니 시커먼 공간 가운데에 밝은 은색 원 하나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쾅!
그 순간, 거대한 공간의 힘이 또 다시 선체를 뒤흔들었다. 아라가 이를 악물고 염력 보호막을 유지하지 않았더라면 단번에 배가 박살나고 말았을 정도의 강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위기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폭풍이 미친 듯이 몰아치며 강력한 힘으로 배를 빨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으아아!”
이준은 미친 사람마냥 소리를 지르며 혼신의 힘을 다해 공간 배에 청록색의 염력을 불어넣었다.
배의 속도가 빨라지자, 이에 맞춰 폭풍에서 뿜어져 나오는 흡입력 또한 급격하게 증가하며 배가 우뚝 멈춰섰다.
“젠장, 이러다가는 다시 끌려 들어가고 말 거야!”
이준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보람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보람아! 도와줘!”
화들짝 놀란 보람은 곧바로 달려와 이준과 함께 공간 배에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보람과 역할을 교대한 이준은 곧바로 거대한 뼈날개를 펼쳐 배의 뒤쪽으로 날아간 뒤 직접 배를 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하지만 공간 폭풍의 흡입력이 점점 더 강해지며 이준을 빨아들이자,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가기 시작하던 배가 또 다시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젠장!”
그 순간, 거친 욕설과 함께 이준의 발밑에서 거대한 은빛 섬광이 터져 나오며 또 다시 배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이제 조금만 더 밀면 공간 통로의 끝이었다. 아라는 아라대로, 이준은 이준대로, 또 보람은 보람대로 배를 한치라도 더 앞으로 나가게 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하고 있었다.
쾅!
마침내 이준의 몸이 은빛 원에 닿는 순간, 거대한 굉음과 함께 공간 폭풍이 더욱 세차기 휘몰아치며 공간 통로가 무너져 내렸다.
* * *
공간 통로의 바깥 편은 울창하고 넓은 평원이었다. 평원의 중심에는 자갈이 잔뜩 깔린 광장이 있었고, 광장의 중심에는 기이한 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그 문양에서는 은은한 은색 빛이 뿜어져 나오며 공간의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고요하던 광장의 중앙에 돌연 폭풍이 일며 은색 구멍이 나타나더니 거대한 배 하나가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손바닥 크기로 줄어들었고, 곧이어 세 사람의 그림자가 바닥 위로 떨어졌다.
세 사람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은빛 구멍이 서서히 사라졌다
"이준은? 왜 나오지 않은 거지?"
이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아라는 새파랗게 질린 채 주위를 둘러보며 이준을 찾았다.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보람은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라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선화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바닥에서 깜빡이는 은빛 문양을 보고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 마세요. 일단은 선배도 공간 통로 밖에 있어요…….”
“그럼 어디 있는 건데?”
선화가 애매하게 말끝을 흐리자, 아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나오긴 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공간 통로의 위치가 바뀌는 바람에……. 중주 어딘가에 무작위로 떨어졌을 거예요.”
이준이 눈을 뜬 곳은 온통 붉은빛이 감도는 삭막한 사막의 한가운데였다.
주위에는 바람 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영혼 탐지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보아도 사람의 기운 따위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이준의 모습은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따로 없었다. 코끝으로 새어 나오는 호흡은 가늘다 못해 거의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조금이나마 가슴이 움직이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사막에 던져진 시체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준은 한참동안이나 자리에 누워 있다가 온 몸을 바들바들 떨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지금 몸 상태로는 일어나기는커녕 눈을 뜨는 것이 고작이었다.
‘빌어먹을 여긴 대체 어디야…….’
그가 빛의 구멍에 닿는 순간, 공간 통로가 무너졌다. 배에 타고 있던 세 사람은 무사히 바닥을 밟을 수 있었지만, 뒤에서 배를 밀고 있던 그는 순간적으로 다른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이곳으로 던져진 것이다.
공간 통로를 빠져나오는 찰나 공간의 힘이 그의 몸을 덮친 탓에 지금 이준은 문자 그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었다.
그렇게 이준은 그 곳에서 송장처럼 누운 채 하루내내 천천히 천지의 에너지를 흡수한 뒤에야 간신히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마침내 몸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이준은 곧바로 저장 반지에서 연금비약 한 알을 꺼냈다. 떨리는 손으로 연금비약을 집어 들어 입안에 넣자, 마치 격렬한 전투를 치르기라도 한 것처럼 온 몸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공간의 힘이 이렇게 엄청날 줄이야…….’
연금비약을 입에 넣는 간단한 동작을 했을 뿐 인데 온 몸에서 식은 땀이 흘려내렸다. 만일 천지의 불꽃이 몸 속을 보호해주지 않았다면 공간의 힘에 의해 오장육부가 터지고 사지가 찢겼을 것이 분명했다.
‘염력만 회복하면 좀 더 빨리 상처를 회복할 수 있을거야. 일단 몸이 회복되면 연금비약을 만들어 몸을 회복해야지……. 제기랄, 그 전에 돌아다니는 마수 같은 걸 만나면 끝장인데…….’
몸 안에서 따뜻한 약 기운이 퍼지는 걸 느낀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막 눈꺼풀이 감기는 순간, 누군가의 외침이 희미하게 그의 귓등을 때렸다.
* * *
의식을 되찾았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커다란 천장이었다.
손으로 몸 아래쪽을 더듬거린 이준은 주변을 살피고 나서야 자신이 마차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마 지나가는 행인이 수풀 속에서 그를 발견한 모양이다.
몸에 묻어 있던 피는 이미 깨끗하게 닦여 있었고, 너덜거리던 망토도 삼베 옷으로 바뀌어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이준은 한참이나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황급히 손을 들어 자신의 손가락을 확인했다. 다행히 저장 반지는 모두 제 자리에 붙어있었다.
그 때, 마차의 창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천천히 열리며 눈부신 햇살이 안으로 들어왔다. 밖에서는 체격이 큰 중년의 사내 하나가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젊은이, 일어났군?”
이준은 영혼의 힘을 활용해 곧바로 사내의 힘을 파악해 보았다. 몸 상태가 엉망이라 염력은 사용할 수 없었지만, 영혼이 다치지는 않은 덕인지 영혼 탐지 능력을 사용하는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사내의 실력은 투령 최고 계급정도로, 투왕이 되기 직전이었다.
"하하, 우리 부대가 북쪽 사막 한가운데서 자넬 발견했어. 상처가 너무 심해 깨어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중년의 사내는 온화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내 이름은 한총일세. 천북성(天北城) 한씨(韓氏) 가문의 집사지. 이번에 임무때문에 사막을 지나쳐 가다 자네를 발견했네. 아주 운이 좋았던 셈이지. 사막에는 종종 늑대가 나타나거든. 그 놈들이 먼저 자네를 발견했다면 백골만 남아 있었을걸세.”
“한총 형님,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이준이라고 합니다.”
물론 하루 이틀만 있으면 염력을 회복할 수 있었고, 염력만 회복한다면 요괴를 불러 몸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하루 이틀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 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니, 한총이 그의 생명을 구해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껄껄, 됐네.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면 나도 꿈자리가 사나웠을거야.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상처는 내가 어떻게 해줄 수가 없었네. 일단 천북성에 가면 약방이 있으니, 연금술사에게 치료를 부탁하게. 물론 돈이야 좀 들겠지만……. 마음 같아서는 상처도 치료해주고 싶지만 나도 연금술사 선생들을 부를만한 돈이 없거든. 우리 가주님도 연금술사 선생들한테는 쩔쩔 매니까 말이야.”
이준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처가 심한 것은 사실이지만, 시간만 조금 있다면 그에게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앗 참, 한총 형님. 혹시 여기가 중주인가요?”
이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신이 깨어난 곳이 중주인지를 확인해 보았다. 혹시나 공간의 힘이 그를 다른 곳으로 이동 시켰을까봐 걱정이 됐던 것이다.
“맞아. 여긴 중주 북쪽 지역이지. 젊은이는 중주 사람이 아닌 모양이지?”
한총의 질문에 이준은 간단하게 공간 통로에서 자신이 겪은 일들에 대해 설명했다.
“아아, 공간 폭풍 때문에 이렇게 다친거군. 이거 운이 보통 좋은 친구가 아닌데? 공간 폭풍을 만나고도 목숨을 부지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거든. 예전에 우리 한씨 가문의 한 호위대도 공간 폭풍에 의해 몽땅 목숨을 잃었지.”
이준이 설명을 마치자, 한총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중주 북부라……. 그럼 연금탑은 어느 지역에 있나요?”
“연금탑은 중주의 중심 지역에 있네. 중주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 북부랑은 조금 거리가 있네. 공간 통로를 이용해도 며칠은 걸릴거야. 일단 이제 막 일어났으니 마차 안에서 좀 쉬게. 천북성까지 아직은 꽤 가야 하니까 말이야. 필요한 게 있으면 날 부르고.”
“감사합니다, 형님.”
한총은 그 말을 끝으로 이준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커튼을 닫았다.
다시 어둠이 내려앉자, 이준은 가만히 마차의 벽에 기대 생각을 정리했다. 다른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공간 통로를 무사히 빠져나간 것 같으니 연금술 경연 대회 날짜에 맞춰 연금탑에 가면 일행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연금술 대회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으니까. 상처가 치유되면 중주 지역을 좀 돌아다녀볼까……. 영혼의 궁전에 대한 정보를 찾으면 스승님의 친구였다던 풍존 선생님도 찾아봐야지. 시간이 있으면 불의 협곡에도 가봐야겠어. 어쩌면 천계의 불꽃 2장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생각을 마친 이준은 곧바로 눈을 감고 수련 자세를 취한 뒤 두 손으로 인을 맺었다. 지금은 실력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눈을 감은 채 한참동안 정신을 집중하자, 마침내 텅텅 비어 있던 몸에 염력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제 상태를 찾으려면 아직도 한참 부족했지만, 적어도 저장반지 속의 것들을 꺼낼 수 있을 정도까지는 회복되었으니 여차하면 하늘 요괴를 부르면 될 것이다. 게다가 그 동안 가만히 누워 휴식을 취한 덕에 더 이상 시체처럼 마차에 누워있지는 않아도 될 정도까지는 몸이 회복된 것 같았다.
몸을 일으키자, 온 몸 곳곳에서 은은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간 숱한 부상을 입어왔지만, 이 정도로 몸 상태가 심각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중주에 오기 전에 하늘 요괴를 만들어 둔 것이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