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1화. 공간폭풍
공간의 힘 때문인지 공간통로 주변에서는 은은한 은빛 섬광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뒤엉켜 있던 공간의 힘이 한결 안정된 것이 느껴졌다.
“다 수리한 것 같네. 하하. 세 친구 모두 아주 고맙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네.”
공간 통로가 안정된 것을 확인한 노성은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세 사람을 향해 감사를 표했다.
“괜찮아?”
곁에서 가만히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이준이 곧바로 아라에게 달려가 물었다.
“응……. 그런데 힘을 많이 쓰긴 했어. 공간 통로를 고치는데 이렇게 많은 염력이 필요한 줄은 몰랐네.”
아라가 식은땀을 닦아내며 웃음을 짓자, 노성이 옥 상자 하나를 꺼내 이준에게 건넸다.
“여기 약속한 물건이네.”
옥 상자를 열어 본 이준은 그 안에 담긴 자홍색의 동그란 마정석을 확인한 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공간 통로를 사용해도 되는 것 입니까?”
“문제없을 거야. 그래도 하루 정도는 지켜보는 걸 추천하네. 이제 막 고쳐져서 혹시 모르니 말이야.”
이준의 질문에 노성이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급히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오래 머물긴 힘들 것 같아서요.”
하지만 이준은 천아성에서 더 머물지 않고 하루라도 빨리 중주로 가고 싶었다.
이준의 질문에 노성은 다소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인 뒤 저장반지 속에서 손바닥만 한 나무 배 하나를 꺼내 주었다. 나무 배에서는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으며, 미약하게나마 공간의 힘이 느껴졌다.
“이건 공간 통로에서 사용할 수 있는 ‘공간 배’라네. 한 척에 백만 골드를 훌쩍 넘어가지만, 오늘 이 아가씨가 우리 노씨 가문을 크게 도왔으니 이 정도는 우리가 선물하도록 하지.”
노성이 건넨 나무 배를 받아 든 이준은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속내야 어찌됐든, 이 정도로 순순히 보물을 내주고 약속하지도 않았던 백만 골드짜리 공간 배까지 건네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오가면서 종종 인사드리겠습니다.”
간단하게 인사를 마친 이준은 곧바로 보람과 선화에서 손짓을 한 뒤 동시에 공간 통로로 뛰어들었다.
네 사람의 형체가 공간 통로에 들어서자마자 사방으로 은빛이 터져 나오며 주변을 밝게 비췄다.
안으로 들어간 네 사람을 바라보던 노성은 그제야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대체 어느 세력 사람들인지 모르겠군. 살면서 이렇게 젊은 투종이 있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보는데, 중주 일류 세력의 후계자라도 되는 건가?”
* * *
공간 통로로 들어가는 그 순간, 눈앞이 갑자기 캄캄해지며 몸은 두둥실 떠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느낌도 잠깐, 금세 또 다른 공간 통로 하나가 이준 일행의 눈앞에 펼쳐졌다.
통로의 양끝에는 옅은 은색의 벽이 둘러져 있었고, 길의 넓이는 삼 미터 정도였다. 통로의 위아래로는 끝없는 어둠이 펼쳐져 있었으며,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듯 어떠한 잡음도 들리지 않았다.
“선배, 공간 배를 꺼내요. 여기서는 그걸 이용하는 게 가장 빨라요. 얼추 20일 이면 중주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선화의 말에 따라 노씨 가문의 가주가 선물한 공간배를 꺼내자, 조그맣던 나무 배가 순식간에 사람이 탈 수 있을만한 크기로 커졌다. 배의 표면에서는 은은하게 공간의 힘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와아!”
이 신기한 광경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이준이 먼저 배에 오르자, 나머지 셋도 서둘러 배 위에 몸을 실었다.
“이 배 앞부분에 에너지 투입구가 있어요. 거기에 염력을 넣으면 공간배가 우릴 중주로 데려가 줄 거예요. 공간 배도 등급이 있어요. 9레벨이 가장 높고, 1레벨이 가장 낮죠. 내가 봤을 때 이 공간 배는 아마 4레벨 정도는 되는 것 같네요.”
이준은 선화의 설명을 듣고 신기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양쪽 끝의 공간 장벽을 바라봤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이제 그냥 직선으로 쭉 나가면 되요. 별 다른 일이 없으면 염력만 제 때 넣어주면 무사히 중주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선화가 설명을 마치자, 이준은 뱃머리에 앉은 채 에너지 투입구에 염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좋아, 그럼 출발해볼까?”
곧이어 선체가 천천히 떨리더니 선미 부분에서 에너지가 폭발하며 은빛으로 둘러싸인 공간 배가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공간배의 속도는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빨랐다.
은빛 섬광에 둘러싸인 신비한 배는 컴컴한 공간 통로를 가르며 번개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공간 통로는 멀리 떨어진 두 공간을 왜곡해 이어주는 것으로, 본래 천아성에서 중주까지 투황의 비행 속도로도 반년은 걸리는 거리였지만, 이 공간 통로를 이용하면 불과 20일 만에 중주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앞으로 나가도 주위는 온통 시커먼 어둠뿐이었고, 이에 처음에는 공간 통로의 풍경에 호기심을 느꼈던 이준 일행도 금세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보람은 채 몇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선실로 들어가 잠에 빠지고 말았다.
한편 이준은 염력으로 배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해야 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뱃머리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공간 배가 이동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의 양은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었지만, 지금 그의 실력으로는 거의 한 번도 염력을 채우지 않아도 가끔 염력을 회복해주는 연금비약을 먹어주기만 하면 충분했다.
* * *
그렇게 꼬박 이주 가량을 가만히 앉아 있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여전히 시커먼 어둠뿐이었다.
“이제 내가 할게.”
이준이 슬슬 지루함을 느낄 무렵, 아라가 다가와 웃으며 말을 걸었다.
“고마워. 며칠 정도 지났지?”
“13일. 일주일만 더 있으면 목적지에 도착할거야.”
아라는 가볍게 웃음을 지은 뒤 자리에 앉아 공간 배에 염력을 불어 넣기 시작했다.
더 이상 배에 염력을 공급할 필요가 없어진 이준은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한숨을 내쉬었다. 체력이나 염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신적인 피로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위를 올려다보니 주위에는 아직도 암흑만이 가득했다.
잠시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휴식을 취하던 이준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제 재난독체를 제어하는 물건은 모두 준비됐어. 그런데 6레벨 전갈이무기 의 마정석으로는 조금 불안해. 나중에 후유증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최대한 원래 방식에 맞춰서 7레벨 전갈 이무기 마정석을 손 안에 넣고 나서 재난독체를 해결하는 게 어떨까 싶어. 그 6레벨 마정석은 가급적이면 쓰고 싶지 않아. 물론 상황이 급해지면 어쩔 수 없겠지만.”
“응, 네가 알아서 해줘.”
아라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난독체를 가진 사람은 평생을 외로움에 떨다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 곁에는 독안개 속을 뚫고 들어와 자신을 구하려는 친구가 있었다. 이렇게 누군가가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죽음에 맞설 용기가 생겼다. 물론 죽는 것 보다는 사는 것이 좋았지만, 이렇게 애써주는 친구가 있다면 끝내 재난독체를 해결하지 못해 죽음을 맞이한다 해도 조금은 덜 억울할 것 같았다.
“네 목숨이잖아. 그렇게 가볍게 얘기하지 마.”
“가볍게 얘기 하는 거 아니야. 널 믿고 있는 거지.”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아라의 말에 이준은 더욱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말하니까 더 부담스럽네. 절대로 실패하면 안 되겠어.”
“그게 목적이야.”
아라의 가벼운 농담에 이준은 그만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바로 그 때, 갑자기 ‘펑’ 하는 소리가 뱃머리에 울려 퍼졌다. 화들짝 놀란 두 사람이 고개를 들어 앞을 보자 공간의 힘이 응집되어 형성된 공간 통로의 장벽이 희미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왜 그래?”
보람과 선화도 깜짝 놀라 급하게 뛰어나왔다. 양쪽의 벽이 희미해진 것을 발견한 선화가 어두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공간 벽이 아직 완전히 수리되지 못했나봐. 외부에서 온 힘이 통로의 균형을 무너트렸어.”
“별 일 없겠지?”
이준의 질문에 선화의 얼굴이 더욱 어둡게 내려앉았다.
“그건 잘 모르겠어. 공간 벽이 약해지면 공간 폭풍이 일어날지도 몰라. 만에 하나 공간 폭풍에 휘말려 공허로 끌려 들어가면 투존 강자가 아니고서는 살아남기 힘들 거야.”
“그럼 공간 폭풍을 만나지 않기를 빌어야겠네.”
선화가 설명을 마치기 무섭게 이준이 아라를 바라보며 지시를 내렸다.
“우선 속도를 좀 늦추자. 그리고 공간 벽 밖에서 오는 흡입력을 조심해.”
그 후 이틀 동안, 이준 일행은 피가 마르는 듯한 긴장감 속에서 항해를 계속해야 했다.
뒷면의 그 공간 벽이 이미 점점 희미해졌고, 심지어 어떤 곳은 벽이 뚫려 암흑 공간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나오는 흡입력이 너무 강해 만약 아라가 염력으로 배를 지탱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빨려 들어갔을 지도 몰랐다.
다행히 공간 폭풍은 아직 출현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공간 통로에 들어온 지 딱 20일째 되던 날, 공간 벽에서 돌연 굉음이 터져 나오더니 돌풍이 일기 시작했다.
이준 일행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은 은은한 은색 공간의 힘에서 형성된 폭풍이었다. 폭풍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공간 통로를 모조리 막고 있었다. 공간 배는 은색의 폭풍에서 이는 격렬한 바람으로 인해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어떡하지?”
이준과 아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선화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안을 통과해서 나가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그래도 출구까지의 거리가 그렇게 멀지는 않을 거예요. 일단 출구 쪽에 닿기만하면 이 공간 폭풍을 벗어날 수 있을 거예요.”
이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점차 가까워지는 공간 폭풍을 노려보다가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라야, 네가 선체를 감싸. 내가 속도를 조절할게!”
“응.”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라의 몸에서 염력이 솟아나 공간 배 전체를 뒤덮었다.
“가자! 보람이랑 선화는 잘 잡아!”
다음 순간, 공간 배의 속도가 무섭게 치솟더니 그대로 은색 폭풍 안으로 뛰어들었다.
쾅! 쾅!
공간 배가 폭풍 속으로 뛰어들자, 선체가 격렬하게 흔들리며 온 배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폭풍에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공간의 힘에 이준은 온 몸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아라의 실력으로도 이 무지막지한 공간의 힘 앞에서는 그리 오랜 시간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에 이준은 한시라도 빨리 공간 통로를 벗어나기 위해 이를 악물고 공간 배에 염력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아무리 온 힘을 다해 염력을 불어넣어도 공간 폭풍은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결국 배를 뒤덮은 아라의 회색 염력이 더 이상 공간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찢어지기 시작했다.
“보람아, 아라를 도와줘!”
선체가 점점 격렬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낀 이준이 다급히 소리를 지르자, 아라의 작은 몸에서 빠른 속도로 신비한 보라색 섬광이 터져 나왔다.
곧이어 보람의 작은 몸이 순식간에 불어나더니 보라색의 머리칼이 야생의 풀처럼 자라나 한순간에 장발의 여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응결!”
다음 순간, 보람의 염력이 한 곳으로 응집하며 거대한 마수의 혼으로 변화했다. 보랏빛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마수의 자세한 모양새는 볼 수가 없었다.
자색 짐승의 혼이 하늘을 향해서 포효하자, 그 소리가 은은한 보라색 소리 파장이 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