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3화. 하늘요괴
“대장로님, 그럼 이 장막을 제거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좋다. 네 둘째 형도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거다.”
이준의 말에 따라 서천우가 에너지 장막을 거두자, 사람들이 황급히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장막 안으로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은 이찬과 보람이었다. 그 뒤로 달려 온 인물은 상당히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이봐요. 걱정했잖아요. 설마 나와의 약속을 잊은 건 아니겠죠?”
보람과 이찬의 뒤를 이어 장막 안으로 뛰어 들어온 것은 이준과 함께 중주로 가기로 한 선화였다.
“걱정 마. 약속한 건 지키니까. 그보다, 언제 중주로 출발할 생각이지?”
“두 달 뒤에요. 연금비약을 만드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해서요.”
“두 달이라…….”
이준은 아래턱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동안 천화존자는 악령을 흡수하고, 본인은 ‘하늘요괴’를 만들어보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떠나기 전에 메두사에게 약속했던 연금비약도 만들어 내야했다. 이번에 또 떠나면 얼마나 오래 있어야 할지 확실하지 않았으니, 더 이상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어쨌든 무사한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그럼 나는 다시 연금비약을 만들러 갈게요. 그쪽도 할 일이 있다면 마무리 해둬요. 두 달 뒤에 다시 연락을 드릴게요.”
사라져가는 선화의 뒷모습을 보며 이준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달 동안 해야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었다.
* * *
아라의 일을 해결한 다음날, 이준은 곧바로 천계의 탑 아래에 위치한 용암 세계 속으로 돌아갔다. 그 곳에서 천화존자가 악령을 흡수할 수 있게 돕고, ‘하늘요괴’를 만들 수 있을지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용암세계는 변함없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이준은 용암 세계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이 만들어 놓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아무도 없는 용암 세계에 도착하자, 반지 속에 숨어있던 천화존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악령을 제압하느라 쓴 힘이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는지 그의 영혼체는 이전보다 눈에 띄게 흐릿해진 상태였다. 영혼의 샘을 통해 영혼 에너지를 보충해 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란 모양이었다.
“이준, 지금 내 상태로는 악령을 완전히 붙잡지 못하네. 나를 좀 도와줄 수 있겠나?”
천화존자의 요청에 이준은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자네 구름불꽃을 잠시만 빌려주게! 그 에너지를 빌려야 영혼을 길들일 수 있을 것 같네.”
“네 알겠습니다.”
구름 불꽃을 빌려달라는 말에도 이준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천화존자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자네, 정말 갈수록 마음에 드는군. 내 힘을 회복하면 절대로 자네의 은혜를 잊지 않겠네.”
천화존자의 한마디에 이준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 역시 갈수록 천화존자가 좋아지고 있었다.
“그럼 시작하시죠!”
천화존자가 진지한 표정으로 손을 뻗자, 구름 불꽃이 요동치며 하얀 저장반지에서 신비한 기운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 * *
잠시 후, 소천화의 영혼이 들어있던 저장반지 속에서 새빨간 악령이 빠져나왔다.
그 형체는 나타나자마자 날카로운 괴성을 질러대며 곧바로 동굴 밖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지난 번 천화존자의 의해 저항다운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반지 속에 갇히고 말았으니, 이번에는 싸울 생각조차 하지 않고 도망부터 치는 모양이었다.
“흥. 도망가겠다는 건가?”
하지만 천화존자가 콧방귀를 뀌며 손을 움켜쥐자, 무형의 불꽃으로 만들어진 그물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악령에게는 인간 같은 지혜가 없었지만, 지능이 낮은 생물이라도 제 눈앞에 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물건인지 정도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천화존자가 다시 한 번 팔을 휘두르자, 불꽃 그물이 오므라들며 악령을 옥죄기 시작했다.
치익! 치익!
불꽃 그물이 악령의 몸에 맞닿기 무섭게 새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악령은 그물에 갇힌 맹수마냥 미친 듯이 발버둥 치며 구름불꽃으로 만들어진 그물에서 벗어나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무형의 그물은 더욱 더 세차게 그를 옭아맬 뿐이었다.
천화존자가 인을 맺자, 불꽃 그물이 점점 더 작아지며 그 안에 갇힌 놈을 점점 더 강하게 조이기 시작했다.
“이준, 구름불꽃의 강도를 높여주게!”
천화존자의 신호에 따라 이준이 손가락을 굽히자, 무형 불꽃이 더욱 거세게 타오르며 그 안에 갇힌 불쌍한 악령을 불살랐다.
“계속해서 강도를 올려 주게!”
이준은 천화존자의 신호에 맞춰 계속해서 악령을 옭아매고 있는 구름 불꽃에 염력을 불어넣었다. 마침내 구름 불꽃의 온도가 정점에 달하자, 견디다 못한 악령의 몸이 폭발을 일으키고 말았다.
이에 천화존자는 곧바로 커다란 불꽃 솥을 만들어낸 뒤 그 안으로 악령의 시신이 담긴 그물을 던져 넣었다.
천화존자가 만들어낸 커다란 솥을 바라보던 이준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불을 다루는 실력만 놓고 보자면 그는 천화존자의 발끝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과연 투존은 투존이군. 정말 대단해. 보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되는걸.’
붉은 솥에 담긴 악령의 시신에서는 끊임없이 붉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놈의 시신에서 사악한 기운을 뽑아내고 순수한 영혼 에너지만을 남기려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미 쇠약해진 그의 힘으로는 속도가 너무 느려 도저히 악령의 시신을 제련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준, 미안한데 부탁 하나 더 해도 되겠나?”
“걱정 마세요 선생님. 놈의 영혼을 정화하는 건 제가 맡겠습니다.”
이에 이준은 천화존자의 말이 끝내기도 전에 몸을 일으켜 영혼 제련 작업에 나섰다.
그래도 불꽃을 다루는 것은 천화존자의 역할이었고, 이준의 역할을 염력을 불어넣어 불꽃을 유지하는 것 뿐 이었다.
이준의 대답에 천화존자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영혼의 힘을 움직여 약솥을 달구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자, 조금 지루함을 느낀 이준은 계속해서 천화존자에게 구름 불꽃을 공급해주는 동시에 마염곡에서 손에 넣은 회갈색 죽간을 살펴보기로 했다.
‘하늘요괴…….’
천천히 족자를 펼치자 죽간에 적힌 글자가 하나 둘씩 다시 이준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하늘요괴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주 재료가 필요했다. 강자의 육체, 마정석, 영혼. 그 외에도 몇 가지 특수한 금속으로 요괴의 몸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야 했다.
이준은 죽간을 톡톡 치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세 준비물들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강자의 육체라면 운산과 마로의 몸이 있었고, 마정석은 7레벨 불 속성 마정석을 가지고 있었다. 영혼은 구름제국에서 잡은 도영호의 영혼이 있었다. 다양한 금속들도 저장 반지 안에 모두 준비되어 있으니, 재료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영혼에 대해 생각하던 이준은 번뜩 무언가가 떠오른 듯 손을 휘둘러 옥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한샘. 선생님과 영혼의 궁전의 행방을 알고 있지?”
“그 노인네를 구하려고? 헛고생 하지 마라. 네 실력으로는 영혼의 궁전의 강자를 만나는 순간 개미처럼 짓밟히고 말거다. 그래도 영혼의 궁전에 대해 알고 싶다면 어서 날 꺼내줘. 그럼 알려주지.”
“하하, 우리 사형께서 아직 정신을 못 차리셨구나.”
한샘의 대답에 이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옥병안으로 청록색의 불꽃 하나를 던져 넣었다. 그러자 곧바로 병 안에서 고통에 찬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악! 그만! 제발 그만 해! 뭐가 알고 싶은 거지? 천천히 말로 하자고!”
하지만 이준은 한샘을 조금 더 괴롭혀줄 생각으로 얇은 불꽃을 씌워 약병의 입구를 봉인한 뒤 그것을 다시 저장 반지 안에 집어넣었다.
“흠……. 비명 소리가 안 들리니 조용하고 좋군.”
그 사이 천화존자의 불꽃 솥에서 뿜어져 나오던 붉은 연기는 눈에 띄게 옅어져 있었다.
이준은 손에 든 죽간을 만지작거리다가 아쉬운 표정으로 그것을 다시 저장 반지 안에 넣었다. 아직은 솥에 염력을 불어넣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 * *
그렇게 3일 정도가 지나자, 어느새 솥 안에는 짙은 붉은 연기 대신 맑은 백색의 연기가 들어차 있었다.
“드디어 성공이야.”
천화존자는 막 내린 눈처럼 깨끗한 기체를 보며 감격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가 가볍게 손바닥을 움직이자, 구름 불꽃이 다시 이준의 몸으로 돌아갔다.
솥안에 들어있던 백색 안개를 모두 흡수한 천화존자는 곧바로 다시 이준의 저장반지 안으로 들어갔다.
“하하, 이준. 고맙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네. 이번에 진 빚은 영혼의 힘을 완전히 회복하고 나면 다시 갚도록 하지. 그리고 내가 꽤 오랜 시간 자네 에너지를 썼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천화존자가 사라지자, 이준은 기다렸다는 듯 회색 죽간을 꺼내들었다. 드디어 하늘요괴를 만들 시간이 온 것이다.
잠시 발 아래로 펼쳐진 용암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이준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저장 반지 안에서 두 구의 시신을 꺼냈다.
‘둘 중에 뭘 써야 하지…….’
운산의 죽기 전 실력은 대략 2, 3성 투종 쯤이었고 마로는 7성 투종의 실력을 갖고 있었으니, 마로의 몸을 이용하는 편이 좋았다. 게다가 완성된 요괴가 운산의 외모를 가지고 있다면 만들고 나서도 후회를 할 것 같았다.
운산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자니 이준의 머릿속에 갑자기 언제나 도도하던 여인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진율희…….”
자신과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 그녀의 표정을 떠올리자, 그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번져나갔다.
아쉬움, 무기력함, 원망……. 아직도 그녀의 마지막 표정이 눈에 잡힐 듯 선명했다.
운산만 아니었다면, 영혼의 궁전만 아니었다면 그녀와 아직도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한숨이 나왔다.
한참동안 상념에 잠겨 있는 그는 손을 휘둘러 운산의 시체를 다시 저장반지 속에 넣어 두었다. 혹여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그녀가 운산의 얼굴을 한 요괴를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생각하니 도저히 운산의 시체를 써서 하늘요괴를 만들 수는 없었던 것이다.
생각을 마친 그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청록색의 불꽃이 마로의 시체를 감쌌다.
뜨거운 고온으로 인해 그를 보호하고 있던 얼음이 빠르게 녹아내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시체가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조금 더 온도를 높여보자, 검은 연기가 새어 나오다가 청록색 불꽃과 맞닿아 사라졌다.
검은색 연기는 시체에 남은 주인의 마지막 에너지였다. 마지막 남은 주인의 의식을 완전히 태워 없애야 그 육체에 새로운 영혼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하늘요괴를 만들기 위해서는 신체, 마정석, 영혼이 완전히 융합해야 했으니 한줌의 잡스런 에너지도 남겨놓아서는 안 됐다.
이렇게 시체에 남아 있는 마로의 에너지를 빼내는 과정만 해도 족히 세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더 이상 시체에서 검은 연기가 나오지 않게 되자, 이준은 곧바로 염력을 발사해 시체의 가슴과 이마에 주먹만 한 구멍을 만들어 냈다.
구멍에서는 피가 흐르지 않았다. 남은 피도 정련 과정에서 모두 증발했기 때문이다. 이 또한 하늘요괴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다. 마로의 시체는 여러 과정을 거쳐 점점 더 작아졌고, 피부 색깔은 갈수록 창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