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0화. 비밀창고
마염곡은 이제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망가져 있었다. 운 좋게 달아난 잔당들은 사람을 풀어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흑각성 안에서 사람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준은 다시 한 번 영산을 노려본 다음 날개를 펼쳐 이찬을 비롯한 이씨 가문의 사람들을 향해 날아갔다.
“형, 도망간 놈들은…….”
“걱정할 거 없어. 여기서 빠져나간 녀석들은 어차피 우리 손바닥 안에 있으니까.”
흑각성에서는 친절 따위를 베풀 필요가 없었다. 특히 마염곡은 아카데미와도, 이씨 가문과도 원한이 깊었으니 두 세력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깔끔하게 뿌리를 뽑아야 했다.
이준과 이찬이 이야기 나누는 사이 이찬의 명령에 따라 이씨 가문의 강자들이 소미 등 이준을 돕기 위해 온 사람들을 챙겼다.
그새 마염곡이나 한샘을 돕기 위해 왔던 강자들도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마염곡은 이미 사라졌고, 그들에게는 이준에게 맞설 힘이 없었다.
사람들이 거의 떠나자, 이찬은 부하들을 시켜 마염곡을 수색하게 했다. 마염곡은 오랜 시간 흑각성 최고의 세력으로 꼽히던 곳 중 하나였으니, 모아 놓은 보물도 제법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한참을 찾아도 보물창고는커녕 보물 상자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마염곡에는 아무 물건도 없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 때, 이준의 시선이 곁에 있던 보람을 향했다.
“아, 네가 있다는 걸 깜빡했네. 보물찾기는 네 전문 아니야?”
“흥. 이제서야 내 존재가 생각났다는 거지?”
이준의 말에 보람은 콧방귀를 뀌며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준이 한참동안이나 좋은 말로 구슬린 후에야 기분이 풀린 보람은 눈을 감고 잠시 정신을 집중한 뒤 마염곡의 깊은 곳으로 이동했다.
그녀의 뒤를 따라 산골짜기의 동굴 깊은 곳까지 한참을 걸어가자, 풀줄기로 뒤덮인 석벽 하나가 나타났다. 그곳이 동굴의 끝이었다.
“저기 보람아……. 여기 맞아?”
아라의 질문에 재미있다는 듯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던 보람이 갑자기 주먹을 들어 석벽의 한 곳을 세차게 내리쳤다.
쿠궁!
보람이 몇 번 정도 더 주먹을 내리치자, 수 미터 두께의 석벽(石壁)이 주저앉으며 깊고 어두운 동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 여기야!”
* * *
기다란 통로를 지나자, 마수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문 하나가 나타났다.
이에 서천우가 손짓으로 사람들에게 물러서라는 신호를 보낸 뒤 문을 열었다.
그는 영산 노인과의 싸움에서 큰 힘을 소모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굴 안에 무언가 함정이 있다면 그가 선두에 서는 것이 가장 안전했다.
문 뒤편으로는 기다란 돌계단이 있었다.
돌계단을 따라 십 분 정도를 걷자, 또 다시 굳게 커다란 문 하나가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돌로 만들어진 문은 온통 검은 색에 푸른 넝쿨이 감겨 있었다.
또 다시 석문이 나타나자 보람이 주먹을 만지작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내가 가서…….”
“넌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하지만 이준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니 조금이라도 신중하게 대처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장로님?”
이준이 신호를 보내자, 서천우가 앞으로 나서 주름진 손을 문 위에 얹은 뒤 염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거대한 돌도 가뿐히 부술 듯한 염력이 그의 손에서 쏟아져 나오며 굉음과 함께 석문을 가격했다.
콰광!
곧이어 석문이 쩍 하고 갈라지며 무너져 내려 앉더니 이내 눈을 찌르는 강렬한 불빛이 쏟아져 나왔다.
강한 빛이 터져 나오자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실눈을 떴다.
“대장로님 조심하세요!”
이준이 소리치기 무섭게 역겨운 악취와 함께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서천우를 덮쳤다.
쾅!
그 순간, 서천우의 소매가 휘날리며 그의 손끝에서 염력이 폭발했고, 대장로를 습격했던 정체불명의 괴물은 투종 강자의 일격에 처참한 비명을 내지르며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노인이 다시 팔을 휘두르자 광풍이 일며 허공을 가득 메운 흙먼지가 날아가며 문 뒤에 숨겨진 공간이 드러났다.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드넓은 비밀 창고였다. 창고 안에서는 어두운 동굴 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창고 내부에는 수십 개의 수납장이 있었고, 그 위로는 무투기와 염력 수련법이 적힌 두루마리와 약병에 든 진귀한 약재들이 가득했다.
창고 바닥에는 뱀 모양의 마수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 방금 전 자신들을 습격했던 마수의 정체도 아마도 이 녀석인 것 같았다.
“투왕 계급 마수 주제에 감히 나에게 덤빌 생각을 하다니.”
서천우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손을 휘두르자, 투왕 계급의 뱀 마수들이 황급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오, 등급 별로 정리가 되어 있나 봐.”
이찬이 수납장 한쪽 모퉁이에 적힌 ‘3격 하급’ 글씨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빠르게 창고 안쪽으로 이동했다. 평범한 3격 무투기나 공법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쓰으으…”
이준과 그의 일행들이 제 멋대로 창고 안을 헤집고 다니자, 청색 비늘을 가진 거대한 뱀 마수 하나가 갑자기 이준을 노려보며 혀를 낼름거렸다.
그러나 마수가 막 몸을 날리려는 순간, 작은 손 하나가 불쑥 놈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그 작은 손의 주인은 마수를 보며 가볍게 입맛을 다신 뒤 놈을 끌고 창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어휴……. 저 무식한 힘 좀 봐.”
이준은 거대한 뱀을 질질 끌고 밖으로 걸어 나가는 보람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람은 신이 나서 제 몸뚱아리보다 몇 배는 큰 뱀 마수를 한 손에 들고 이곳저곳을 쏘다니고 있었다.
“그러게 말이다. 본 모습도 분명 평범하지 않겠지. 중주대륙 남쪽으로 가면 여러 특이한 마수 가문이 많다고 하니 그 쪽에서 저 아이의 본모습과 관련된 정보를 찾을 수 있지도 모르겠구나.”
“마수 가문이요?”
생소한 단어에 이준은 눈을 꿈뻑이며 서천우를 바라봤다.
“그 곳의 마수들은 대부분 무리를 이뤄 생활하고 있단다. 그 곳에 있는 최상급의 마수들은 실력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인간 못지않은 지능을 갖게 되고, 외모도 사람의 형태를 띄게 된단다. 게다가 수명도 길고 실력도 강해 평범한 인간들은 감히 덤빌 생각도 하지 못하지. 물론, 역사가 아주 오래된 강력한 가문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말이다.”
서천우의 설명에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 ‘아주 오래된 강력한 가문’ 중에는 이은의 가문도 끼어 있으리라.
“중주는 투기대륙에서 가장 화려한 곳이다. 땅도 넓고 강자들도 많아. 중주에서 인정받는 강자라면, 투기 대륙 전체에서 손꼽히는 강자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지.”
서천우는 웃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 곳에 가게 되면 네 여자 친구의 배경에 대해서도 조금씩 알게 될 거다. 하지만 그곳에 가면 더욱 강한 힘이 필요하겠지. 중주에서 투황은 강자 축에도 들지 못하니 말이다.”
이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에 정렬된 두루마리를 만지작거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맑고 깨끗한 소녀의 얼굴이 떠올라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은아…….’
이준은 주먹을 불끈 쥔 채 그녀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보았다. 투종이 되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투종이라……. 기다려줘. 네 가문 사람들이 날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 거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투종은 꿈도 꾸지 못 했지만, 이제는 이야기가 달랐다.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투종, 아니 투존도 꿈이 아니었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걸음을 옮기다보니 어느새 창고의 가장자리에 도착해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다른 곳과 달리 오직 네 개의 소박한 나무 상자만이 놓여 있었다.
상자 주위로는 작은 빛의 장막으로 결계가 쳐져 있었고, 그 장막에서는 짙은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는 강제로 장막을 깨뜨리지 않고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네 개의 상자 곁에는 조그마한 글씨로 ‘2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2격’이라는 표시를 보자마자 이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역시나 헛걸음을 한 것이 아니었다.
“어라?”
신중하게 빛의 장막을 살펴보던 이준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빛의 장막 주위에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미세하게 공간의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마로가 만들어 놓은 결계인 것 같았다. 섣불리 손을 댔다가는 안에 있는 물건이 망가질 것이 틀림없었다.
청록색의 화염을 손 위에 두른 뒤 조심스럽게 장막 위에 손을 가져다 대보자, 장막이 가볍게 흔들리며 동그란 파문이 일어나더니 장막 바깥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에 이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손가락의 불꽃을 꺼뜨릴 수밖에 없었다. 빛의 장막이 강한 건 아니었지만 억지로 훼손시키려 든다면 그 속의 에너지가 갑자기 폭발을 일으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천우의 도움을 청해보았지만, 그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괜히 7성 투종이 아니구나. 봉인해 놓은 작은 에너지가 이렇게나 강력하다니…….”
그 때, 이준의 머릿속에 퍼뜩 좋은 생각 하나가 스쳤다.
“보람아!”
창고 한편에서는 보람이 뱀 마수의 배 위에서 폴짝 폴짝 뛰며 난리를 피워대고 있었다.
“흥. 또 뭘 하려고?”
이준이 짐짓 친절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에게 다가오자, 보람이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여기 안에 있는 물건 좀 꺼내줘. 그럼 지난번에 나한테 맡겨 둔 약재 전부 돌려줄게. 그것도 전부 네가 원하는 맛으로 요리까지 해서.”
보람은 이런 종류의 봉인을 통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에 메두사가 만든 봉인도 뚫었고, 가람학원의 약재 창고도 제 집 드나들 듯 드나들며 온갖 약재를 훔쳐 먹던 그녀였다. 그러니 어쩌면 마로의 봉인도 뚫을 수 있을지 몰랐다.
“정말이야?”
“그럼!”
순간 보람의 보석 같은 눈동자가 반짝 반짝 빛을 발했다.
보람은 곧바로 2격 무투기가 담긴 상자 쪽으로 달려간 뒤 빛의 장막을 한번 훑어보고는 다시 이준을 바라봤다.
“나중에 딴 말 하기 없다?”
이준이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자, 보람의 손이 거침없이 빛의 장막을 뚫고 들어갔다.
‘역시……!’
이준이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는 사이 보람이 네 개의 상자를 모두 봉인 밖으로 꺼내 놓았다. 어찌나 쉽게 상자를 꺼내는지, 마치 처음부터 봉인이 없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허! 선천적으로 희귀한 약재를 감지하는 능력도 있는 데에다가 봉인에 대한 면역도 갖고 있다니.”
자신도 어쩌지 못한 봉인을 보람이 너무나도 손쉽게 통과해버리자, 서천우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첫 번째 나무 상자 속에는 은색 두루마리 두 개가 들어 있었다. 두루마리를 이룬 재질은 굉장히 독특했다. 족자의 표면은 수정체처럼 매끈했고, 전광이 살아있는 뱀마냥 꼬불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번개의 서. 2격 중급. 번개속성 무투기…….”
족자 속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이준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번개 속성 무투기 자체가 보기 드문데, 2격 중급의 번개 무투기라니, 당장 일어나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이었다.
“둘째 형, 이거 진짜 좋은 거야.”
그는 곧바로 족자를 돌돌 말아 이찬에게 넘겨주었다.
족자를 건네받은 이찬의 얼굴에도 곧바로 웃음꽃이 피었다.
“와, 2격 중급 번개 속성 무투기라니! 하하하! 여기까지 오길 잘했네.”
그는 번개 속성의 염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번개의 서’를 잘 수련한다면 투황으로 승급하는 것도 더 이상 꿈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