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9화. 최후의 승자
이준의 손에서 무서운 에너지 파동이 일어나는 걸 느낀 한샘은 잽싸게 몸을 날려 그를 막으려 했지만, 이번에도 아라가 기다란 독손톱을 휘두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
한샘은 굳이 아라를 상대하지 않고 방향을 틀어 그녀의 공격을 피한 뒤 다시 이준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아라가 또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났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자 한샘의 얼굴이 점점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이 버러지 같은 계집이!”
조급해진 한샘은 전력으로 염력을 폭발시키며 아라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아라의 몸에서 더욱 짙은 독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재난독체의 봉인을 완전히 푼 것이 틀림없었다.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맞붙자, 평범한 강자들은 그들의 싸움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었다. 기껏해야 서천우와 영산, 모천행 정도의 강자만이 공간의 파동을 통해 두 사람의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아라와 한샘이 격전을 펼치던 곳과 멀지 않은 장소에서는 서천우와 영산이 가볍게 공격을 주고받고 있었다.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진심으로 상대를 죽이려 하고 있지 않았다.
영산 장로는 이미 한샘과 이준의 싸움에서 벗어날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했다. 애초에 그의 목적은 보리수의 점액이었지 이런 목숨을 건 싸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양측에서 데려온 강자들은 굳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한샘과 아라의 대결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역시 이씨 가문과 마염곡, 이준과 한샘 사이의 원한 관계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괜히 줄을 잘못 섰다가는 무슨 화를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쾅!
그 때 격렬한 폭음과 함께 허공 위로 거대한 파문이 퍼져나가며 두 개의 그림자가 반대 방향으로 튕겨나가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한참을 뒤로 날아가고 나서야 균형을 잡고 멈춰 섰다. 아라의 입에서는 새빨간 피가 흐르고 있었고, 한샘의 옷은 마치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하지만 더 큰 타격을 입었음에도 웃음을 짓고 있는 쪽은 한샘이 아니라 아라였다. 등 뒤에서 폭발적인 에너지가 치솟고 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젠장!’
이준이 불꽃의 분노를 완성하자 한샘은 사색이 되어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그는 세 가지 불꽃으로 만들어진 화련이 얼마나 큰 위력을 가졌는지 직접 겪어봤으니, 누구보다도 그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순간, 세 가지 불꽃이 융합된 화련이 이준의 손을 떠나 까만 안개 속으로 빠르게 날아갔고, 한샘은 곧바로 검은 안개를 폭발시켜 자신의 몸을 겹겹이 둘러쌌다.
아라는 날아가는 화련을 향해 피를 뱉은 뒤 독성을 머금은 자신의 피가 화련에 흡수되기 무섭게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어서 도망쳐!”
지상에 있던 이찬은 이준이 화련을 날리기 무섭게 주변에 있던 보람과 다른 이들을 데리고 빠르게 대피했다.
이찬이 소리를 지르자, 소미와 다른 사람들도 멍하니 있다가 곧바로 산골짜기 밖으로 도망쳤다. 광장 위에 있던 강자들과 수장들 역시 그들의 뒤를 따라서 도망치기 바빴다.
콰—앙!
화련이 검은 연기로 뒤덮인 구역에 들어가기 무섭게 산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지며 온 하늘이 불꽃으로 뒤덮였다.
거대한 화염 파도가 까만 안개 속에서 터져 나와 온 하늘을 뒤덮었다.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염곡을 중심으로 반경 천 미터 범위 내의 숲이 모두 불타 사라지고 그 밖에 있던 수풀 역시 죄다 노랗게 메말라 있었다. 화염 파도가 내뿜는 열기에 공기 중에 남아있던 미미한 습기까지 모두 사라져 숨을 들이킬 때마다 목이 따끔거릴 정도로 건조한 공기가 목구멍을 들락거렸다.
이준이 만들어 낸 화련으로 인해 마염곡에는 완전히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위에 의해 마염곡의 잔당들이 수도 없이 죽어나갔고, 산골짜기 밖으로 도망치려던 투왕급 강자들도 하늘에 남아 있는 불꽃에 의해 길이 막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고 있었다.
무사히 탈출에 성공한 이씨 가문 사람들 역시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소미, 광철, 은평강 등 이찬이 불러온 강자들도 완전히 넋이 나가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은 운남종에서도 화련을 본 적이 있었지만, 오늘 이준의 무투기는 운남종에서 만들어냈던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6성 투황인데도 이렇게 무서운 실력을 가졌다니……. 만일 투종 강자가 된다면 투종 중에서는 감히 대적할 자가 없겠어. 저 친구와는 절대로 등을 돌려서는 안 되겠군.’
그 순간 소미를 비롯한 모든 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흑각성을 호령하는 강자들의 얼굴이 공포로 물든 것을 발견한 이찬의 입가에는 흡족한 미소가 번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준이 소년일 때, 그는 주위의 손가락질과 비웃음을 견디며 홀로 제국을 전전하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소년은 가한제국을 좌지우지하는 운남종에 맞섰다.
그 당시만 해도 많은 이들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며 비웃었지만 이준은 당당히 운남종을 꺾고 만천하에 이씨 가문의 이름을 알렸다.
“역시 아버지의 안목은 무시 못 한다니까. 우리 셋째는 분명히 이씨 가문 역사상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기록될 거야. 분명히 준이는 아버지가 존재 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말씀하셨던 우리의 선조까지도 뛰어넘겠지.”
* * *
하늘에는 검은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이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흩어지는 검은 안개를 주시하며 저장반지에서 연금비약을 꺼내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 점점 혈색이 돌아왔다.
이제는 세 가지 불꽃을 융합한 화련을 만들어도 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간의 수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준의 곁에는 백발의 독술사가 서 있었다. 그녀의 손끝에서는 아직도 짙은 독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곧이어 검은 안개는 완전히 흩어지고, 그 속에서 만신창이가 된 한샘의 모습이 드러났다.
한샘의 전신에는 붉은 물집이 가득했고, 머리카락 역시 한 올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있었다. 그의 오른 팔은 반쪽이 없어진 채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으며, 입에서는 끊임없이 새빨간 선혈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샘의 처참한 모습에 아래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이들은 온 몸의 털이 거꾸로 서는 것만 같은 공포를 느꼈다.
진작 싸움을 멈춘 영산 노인도 한샘의 상태를 보고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자리에 한샘이 아니라 자신이 서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섣불리 이준에게 싸움을 걸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보리수의 점액을 되찾는 것은 불가능하겠군. 자네가 몸을 사린 것도 이해가 가.”
영산이 옆에 있던 모천행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 아무리 보리수의 점액이 귀하다 해도 목숨보다 귀할 수는 없었다.
모천행 역시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아라가 쏜살같이 한샘 앞으로 날아가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개화!(開花)”
그녀의 목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한샘의 몸이 딱딱하게 굳더니 그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도… 독을 넣었군.”
아라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인을 맺자, 한샘의 온 몸에서 분수처럼 피가 뿜어져 나왔다.
곧이어 한샘의 몸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지더니 이내 뼈가 부서지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샘의 몸이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자, 주변이 침묵으로 물들었다. 그 누구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하던 한샘이 이런 결말을 맞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있는 와중에 한샘의 영혼의 힘이 핏덩이가 된 육신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샘의 영혼이 막 도망을 치려던 찰나,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새카만 그림자 하나가 지상으로 내려왔다.
형태 없는 영혼의 힘은 이준의 손에서 달아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쳤지만, 이미 청록색 화염이 사방을 포위한 상태였다.
한샘은 영악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사내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영혼의 힘 중 대부분을 버리고 극히 일부만 남긴 채 도망치려 했다.
그 정도라면 영혼 에너지가 너무 작아 투종 강자라 해도 한샘의 영혼이 달아났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준은 달랐다. 그는 한샘의 영혼이 달아날 것을 진작부터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한샘의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오기 무섭게 지상으로 내려와 불꽃으로 감옥을 만들었다.
이준은 청록색 불꽃으로 만들어진 밧줄로 한샘의 영혼을 꽁꽁 묶은 뒤 옥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아직 물어볼게 많으니 이렇게 달아나면 섭하죠.”
한샘의 영혼을 옥병안에 가두는데 성공한 이준은 곧바로 저장반지 안에 옥병을 던져 넣은 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이준의 시선이 닿는 곳은 모두 조용해졌다. 한샘의 초청을 받아 온 강자들의 얼굴은 완전히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감히 이준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 하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어떻게 하면 이 자리를 빠져나갈까 머리를 굴리느라 바빴다.
곧이어 이준의 시선이 영산에게 고정됐다.
이준의 시선을 느낀 영산 노인은 천천히 염력을 움직이며 싸울 태세를 갖췄다. 자신이 먼저 이준에게 덤빌 생각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지만, 이준이 먼저 자신을 공격한다면 호락호락하게 목숨을 내줄 생각은 없었다.
“영산 선생님, 오늘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번에 또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이준은 말을 끝맺지 않고 싸늘한 눈으로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리고 영산이 대답하기도 전에 서천우와 아라가 그의 양 옆을 차단했고, 뒤이에 모천행이 은근슬쩍 그의 뒤를 잡았다.
‘저 간사한 놈이…….’
영산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사방을 둘러봤다. 앞에는 이준, 좌우에는 서천우와 아라, 뒤는 모천행.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내가 자네를 너무 과소평가했군. 오늘 일은 한샘의 요구로 시작된 거니 너무 날 탓하지 말아줬으면 하네.”
영산 노인이 숙이고 들어오자 이준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내려앉았다.
“영산 선생님, 보리수의 점액이 아깝지 않으신가요?”
“그런 보물은 능력 있는 사람이 가져가야지. 자네가 가져가겠다니 오히려 마음이 놓이는군.”
노인의 대답에 이준은 곧바로 모천행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자신을 돕고 있지만 워낙에 간사한 인간이니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허허. 나도 약속을 어기고 한샘을 돕지 않았으니 이제 약속을 지켜주지 않겠나?”
해독제를 달라는 의미였다. 이에 이준은 망설임 없이 아라를 향해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영산의 퇴로를 막고 해독제를 요구한다는 것은, 해독제를 주지 않으면 언제든지 영산을 돕겠다는 협박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라가 물건을 던지자마자 모천행은 바로 손을 뻗어 옥병을 잡은 뒤 염력으로 그 표면을 단단히 감쌌다. 병이 깨져 약 가루가 조금이라도 새어 나갈 까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약 분말을 뜨거운 물에 넣고 풀어서 아들을 한 달 동안 담궈 놓으세요. 독이 모두 빠져나갈 겁니다.”
아라가 모천행을 보며 말했다.
“오오, 정말 고맙네.”
모천행은 그제서야 한숨을 내쉬며 아라에게 두 손을 모아 감사의 뜻을 전했다.
마침내 상황이 모두 정리되자, 이준의 시선이 폐허가 된 마염곡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