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7화. 악령퇴치
허영호의 광기어린 웃음소리가 천둥처럼 메아리치자, 짙은 먹구름이 멈춰서며 더욱 흉흉한 붉은 빛을 내뿜었다.
서천우와 아라는 검은 구름에서 피어나는 난폭한 기운을 느끼고는 굳은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보았다.
이준은 완성된 화련을 손에 든 채 가만히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상대방 쪽에 투종이 하나 더 늘어나고 있는데, 왜 빨리 손을 쓰지 않는단 말인가?
“끌끌……. 오래 기다렸다. 드디어 악령이 완성됐구나.”
잠시 후, 검은 구름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더니 이내 하늘을 가득 뒤덮고 있던 검은 구름이 사라지고 그 안에서 사람 모양의 새빨간 물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물체는 마치 피가 뭉쳐서 만들어진 것처럼 섬뜩하고 선명한 붉은 색을 띠고 있었으며 얼굴에는 코도 입도 없이 오로지 루비처럼 붉은 눈만이 번쩍이고 있었다.
악령의 눈에서 인간의 감정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 담긴 것은 오로지 끝없는 살기와 광폭한 기운 뿐이었다. 그야말로 살생을 위해 태어난 병기와도 같은 눈빛이었다.
이준은 악령에게 시선을 멈춘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앞의 악령은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며 불길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 그 붉은 형체 옆에는 온 몸에 검은 안개를 두른 허영호가 만족스런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내 목표는 오직 이준이다. 지금 도망가는 녀석들은 굳이 쫓지 않으마.”
모든 사람들에게 하는 경고 같았지만 허영호의 시선은 시종일관 서천우와 아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악령을 만드는데 성공했음에도 여전히 투종이라는 존재를 경계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서천우와 아라는 허영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물러나기는커녕 보란 듯이 염력을 끌어 올렸다.
두 명의 투종이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보여주자, 자리에 있던 다른 강자들도 용기를 얻어 다시 한 번 전의를 다졌다.
“허영호, 저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 필요 없네. 어차피 목에 칼이 들어와야 후회하는 족속들이라 말이야.”
한샘이 완성된 악령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투종 강자 영혼 두 개도 선물로 받아가지. 투종의 영혼 두 개에 천지의 불꽃 두 개라니, 이 정도면 영혼의 궁전에서도 큰 상을 내리겠군.”
곧이어 허영호와 대화를 나누던 한샘이 시선을 이준에게로 향했다.
“이봐 사제, 네 놈이 계속 가람아카데미에 숨어 지냈다면 나도 손을 쓰지 못 했을텐데 제 발로 찾아와주다니, 이거 고마워서 눈물이 나려고 하는군.”
“돌아갈 곳도 없는 떠돌이 주제에 말이 많군요. 구질구질하게 남의 몸에 빌붙어서까지 삶에 미련을 못 버리니 이승 바람이나 며칠 쐬다 가라고 배려해준 것 뿐 입니다. 이제 그만 저승으로 가야지요, 사형.”
이준의 조롱 섞인 답변에 한샘의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개자식이……!”
두 사람이 살기를 피워대며 말싸움을 벌이는 것을 바라보던 모천행은 조용히 속으로 어느 쪽에 붙어야 할지를 고민했다.
한샘 측에는 한샘과 허영호, 허영호가 불러낸 악령과 영산 장로까지 총 네 명의 투종이 있었지만, 이준 쪽에 투종이라고는 달랑 아라와 서천우 둘 뿐 이었다. 여기에 자신이 가세한다면 한샘이 이기는 것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지난 번 보리수의 점액을 가지고 대결을 벌였을 때를 떠올려보면, 이준을 단순한 투황으로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 때도 어지간한 투종 강자 수준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6성 투황이 되었으니 섣불리 한샘에게 붙었다가 이준이 이기기라도 하는 날에는 흑황종이 멸망할지도 모를 일 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들인 모어의 목숨줄을 잡고 있는 것이 이준이니, 절대로 함부로 처신할 수는 없었다.
속으로 한참을 갈등하던 모천행은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이번에 일이 너무 크게 벌어진 것 같네. 나는 다 늙어서 젊은이들 같은 패기도 없고 말이야. 그러니 이번 일에서는 아예 발을 빼겠네.”
모천행의 대답에 한샘의 낯빛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지만, 이내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악령이 완성된 이상 그가 이준 편에 서지만 않는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괜히 모천행을 비난했다가 그가 이준에게 붙으면 그야말로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꼴이니, 일단 가만히 두어 중립을 유지하게 하는 편이 나았다.
그 때, 남 몰래 천화존자의 영혼이 담긴 하얀색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이준이 돌연 서천우와 아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흉악한 영혼이랑 허영호는 제가 맡겠습니다.”
이준의 자신만만한 발언에 서천우와 아라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악령과 허영호는 모두 투종 강자였고, 영혼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둘 사이의 연계도 굉장할 것이 분명했다. 이준의 실력이 크게 올랐고 새로운 날개를 얻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도저히 이준 혼자서 두 명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걱정 마세요. 죽을 수도 있는 일은 안 하니까요.”
이준이 피식 웃으며 다시 입을 열자, 두 사람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평소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괜한 자신감이나 호기로 하는 말인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자신감을 보일 때는 늘 자신들이 모르는 비장의 수단 같은 것이 있었다.
“큭큭, 이준. 정말 한샘의 말처럼 정신이 나간 놈이구나. 뭐 그래서 더 마음에 들긴 하지만.”
가만히 이준의 말을 듣고 있던 허영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한샘은 웃기는커녕 더욱 심각한 표정으로 이준을 노려볼 뿐 이었다. 얄미운 녀석이기는 했지만, 자신이 아는 이준은 결코 근거 없이 저런 말을 늘어놓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대장로님, 아라와 함께 다른 사람들을 지켜주세요.”
말을 마친 이준은 곧바로 신비한 문양이 가득한 날개를 펼쳐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건방진 놈 같으니. 그래, 뭘 믿고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는지 한번 확인해 보지.”
그 순간, 허영호의 곁에 있던 악령이 번개처럼 날아와 이준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붉은 악령이 주먹을 휘두르자, 공간이 일그러지며 거대한 염력이 폭발했다. 이준 역시 피할 생각조차 없다는 듯 당당히 상대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이준의 주먹과 악령의 주먹이 맞부딪히는 순간, 그의 손가락에 끼워진 새하얀 반지에서 눈부신 빛이 폭발했다.
악령과 이준의 주먹이 교차하는 순간, 마치 하늘 위에 또 다른 태양이 떠오른 것처럼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준의 주먹 위에는 어느새 새하얀 막 같은 것이 씌워져 있었다.
그 신비한 백색의 보호막은 소용돌이마냥 악령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흉흉한 기운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붉은 색의 악령은 천적을 만난 산짐승처럼 발버둥 치며 이준에게서 떨어지려 했지만, 백색 섬광은 더욱 더 강한 흡입력을 발휘하며 놈을 빨아들였다.
하지만 악령이 아무리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려 해도 반지와 놈의 거리는 멀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영혼 상태로도 투종 강자 수준의 힘을 가지고 있는 악령을 가뿐하게 제압하는 천화존자의 힘 앞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수많은 영혼을 희생해 만들어 낸 악령이 허무하게 사라지려하자, 허영호가 곧바로 인을 맺으며 염력을 폭발시켰다. 허영호의 움직임에 맞춰 악령의 저항은 점점 더 강해졌고, 마침내 점점 흡입력의 영향 범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준, 날 도와주게!”
그 순간, 이준의 머릿속에 천화존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까요?”
“영혼의 힘을 저장반지 속에 넣어주게!”
이에 이준은 곧바로 눈을 감으며 휘몰아치는 영혼의 힘을 조종해 저장반지 속에 쏟아 넣었다.
이준의 도움을 받은 천화존자가 더욱 강인한 흡입력을 내뿜자, 악령은 몇 걸음도 채 떼지 못하고 다시 백색의 반지 쪽으로 끌려가기 시작했고, 놈과 이준의 거리는 눈 깜짝할 새에 1미터 정도까지 좁혀졌다.
“젠장!”
허영호는 욕설을 내뱉으며 다시 한 번 인을 맺었지만,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아마도 백색 섬광에 영혼의 힘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기껏 만들어 낸 악령이 아무것도 하지 못 하고 사라지려하자, 한샘의 얼굴 역시 허영호 못지않게 일그러졌다. 이준이 대체 무슨 수로 저 강력한 힘을 가진 악령을 꼼짝 못 하게 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대로 두면 모처럼 만들어 낸 악령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사라질 거라는 것 말이다.
이에 한샘은 잽싸게 염력으로 장검을 만들어 낸 뒤 이준을 향해 그것을 발사했다.
그러나 그의 염력 장검이 이준의 목을 노리고 날아드는 순간, 회보랏빛 그림자가 번개처럼 장검을 낚아챘다.
“어딜 감히!”
한샘의 장검을 막아낸 아라는 회색 연기와 함께 매캐한 독향을 내뿜으며 그를 노려봤다.
살기등등한 아라의 눈빛에 한샘은 주먹을 불끈 쥔 채 아무것도 하지 못 하고 허영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분하기는 했지만, 지금 자신의 실력으로는 저 백발의 독술사를 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허영호가 이준을 처리해 줄 때까지 아라와 서천우가 이준을 돕지 못 하도록 방해하는 것 뿐 이었다.
“이 빌어먹을,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그러나 그 기대가 부서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사이 악령이 이준의 손가락에 끼워진 하얀 저장반지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 것이다.
“저 저장반지는 대체 뭐지?”
한샘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이준의 손에 끼워진 저장반지를 유심히 관찰했지만, 그의 실력으로는 그 안에 들어있는 천화존자의 영혼을 감지해낼 수 없었다.
악령이 저장반지 속으로 빨려 들어가자, 허영호의 주변에 가득했던 검은 연기가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허상처럼 흐릿해진 허영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의 몸을 가려줄 연기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조금 전 악령을 빼앗기며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큰 타격을 입은 것이 틀림없었다.
눈부신 빛이 사라지자, 허영호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이준! 영혼을 돌려줘라! 어서! 아니면 오늘 이 자리가 네 무덤이 될거다!”
이준은 허영호의 협박에 콧방귀조차 뀌지 않고 가만히 천화존자의 영혼체가 들어있는 저장 반지로 시선을 옮겼다.
악령과 허영호의 영혼은 서로 연결 되어 있었으니, 악령이 사라지면 그 역시 심대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준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이미 허영호는 그에게 조금의 위협조차 될 수 없었다.
하얀 반지의 표면에는 어느새 조그마한 빨간 점 하나가 생겨나 있었다.
하지만 저장반지가 특이한 탓인지, 천화존자의 존재 때문인지, 그의 탐지 능력으로도 그 내부를 살펴볼 수가 없었다,
“이준. 악령은 내가 봉인해 뒀네. 하지만 나도 영혼의 힘을 너무 많이 사용해 수면 상태로 들어갈 것 같군. 그러니 자네가 열흘 안에 내 영혼을 복구시켜주게. 그렇지 않으면 나는 영영 사라지고 말거야. 그리고 내가 사라지면 악령도 다시 부활할걸세.”
그 때, 천화존자의 목소리가 이준의 머릿속에 울렸다. 목소리만 들어도 걷잡을 수 없이 약해진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열흘이요? 선배님,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영혼 에너지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약재는 너무 귀한 것이라 그 시간 안에 구할 수가 없습니다.”
“열흘 안에 내 영혼을 완전히 고쳐달라는 소리가 아니네. 그저 내 영혼에 약간의 에너지를 불어넣어 잠에서 깨어날 정도면 돼.”
천화존자는 대답에 이준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혼에 약간의 에너지를 불어넣는 정도라면 열흘로도 충분했다.
“선배님, 너무 걱정 마세요. 반드시 잠에서 깨워드리겠습니다.”
“하하. 자네가 그리 말해주니 마음이 놓이는군. 부탁하네. 아주 중요한 일이니.”
이준의 대답에 천화존자는 안심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와 알고 지낸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준의 됨됨이로 보아 목숨을 맡겨도 되리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