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5화. 전광석화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모천행과 영산 장로님은 이미 연맹에 참가하기로 하셨습니다.”
이어지는 한샘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천행과 영산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은 모두 흑각성에서 소문이 자자한 투종 강자였으니, 그 두 사람을 앞세운다면 이씨 가문과 가람 아카데미에 대적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사람들은 쉽게 결단 내리지 못했다. 말이 좋아 연맹이지 연맹 내부에서 누가 자기 등에 칼을 꽂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연맹을 결성하게 된다면 분명 연맹주가 필요한 법인데 그 우두머리를 고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하. 연맹 이야기는 제 제안일 뿐입니다. 돼도 그만, 안 돼도 그만이죠. 여러분들의 생각이 더 중요합니다. 하지만 연맹에 참여하지 않은 분들까지 지켜드릴 수는 없으니, 부디 현명한 판단 부탁드리겠습니다.”
짝짝짝!
바로 그 때, 광장에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과연 대단해. 말을 정말 교묘하게 하는군.”
박수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검은 망토를 두른 청년을 필두로 범상찮은 기운을 풍기는 강자들이 광장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준?!”
검은 망토의 청년을 발견하자마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몇 몇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이준을 발견한 한샘은 잠시 경계하는 표정으로 그의 뒤쪽을 살폈다. 하지만 천 장로와 백 장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곧바로 그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준. 겁도 없이 제 발로 걸어올 줄이야.”
한샘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마염곡의 강자들에게 흘깃 눈치를 주었다.
“내 적은 한샘 당신과 마염곡이 전부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건드릴 마음은 없으니 이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면 지금 당장 자리를 뜨시면 됩니다. 하지만 만일 저 자의 편을 들겠다면, 그 세력은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멸망시켜버리겠습니다.”
이준이 한 걸음씩 천천히 광장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리고 골짜기 밖에 있던 마염곡의 호위병들에게 연락할 생각이라면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희가 이미 깔끔하고 정리하고 왔으니까요.”
이 말에 한샘은 물론이고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자리에 있는 강자들 중 누구도 마염곡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호위병들이 죽은 것을 눈치 채지 못 했기 때문이다.
“네 이놈! 마염곡에 전쟁을 선포하겠다는 것이냐!”
한샘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이준이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염곡이 먼저 가람 아카데미의 무고한 학생들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지금 이 자리를 빌어 미리 경고하겠습니다. 앞으로 흑각성의 어떤 세력이라도 가람 아카데미의 학생들을 죽인다면 마염곡과 똑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한샘의 몸에서 염력이 폭발하며 눈 앞에 있던 딱딱한 책상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마염곡을 멸망시킬 생각으로 찾아 왔구나! 하지만 모 종주와 영산 장로가있는 이상 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 이다.”
한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준의 살기등등한 시선이 모천행과 영산에게로 향했다.
“모 종주님과 영산 장로님은 이미 마염곡과 한샘의 편이 되기로 결정하신 것 입니까?”
“이보게, 보리점액은 우리 두 사람에게 아주 중요한 물건이라네. 한샘의 말을 우리가 어떻게 거부할 수 있겠나…….”
모천행이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만일 자네가 보리점액을 돌려준다면 우리 두 사람은 바로 자리를 떠나겠네.”
영산도 이준을 바라보며 한 마디를 보탰다.
두 사람의 답변에 한샘은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이름을 빌려 연맹을 결성해야 하는데 그 두 사람이 이준 앞에서 이리 약한 모습을 보이면 다른 세력들을 어떻게 끌어들인단 말인가.
하지만 이준은 두 사람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보리점액은 아라의 재난독체를 치유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재료였으니 이제 와서 돌려줄 수는 없었다.
“오늘은 이씨 가문과 마염곡 사이의 원한을 해결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마염곡 편에 서지만 않는다면 모두 저 이준과 이씨 가문의 친구입니다. 저는절대 친구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을 대할 때는 반드시 철저하게 끝장을 본다는 것을 알아두셨으면 좋겠군요.”
이준이 광장 앞까지 다가가 염력을 폭발시키며 소리를 지르자, 자리에 있던 다른 강자들은 물론이고 한샘과 모천행 역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 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이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더욱 커져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실로 믿을 수 없는 성장 속도였다.
“저 녀석이 계속 나대게 둘 순 없지 않나.”
분위기가 이상해 진 것을 느낀 한샘은 곧바로 곁에 있던 김씨 형제에게 눈치를 주었다.
한샘의 눈짓을 받은 두 김씨노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광장 앞까지 날아갔다. 두 사람은 이준이 정확히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췄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에 한샘을 쓰러뜨렸던 그 무투기만 아니라면 두 사람이서 충분히 이준을 상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씨 가주, 오늘은 마염곡에서 손님을 초대한 중요한 날이니 불청객인 자네는 빨리 떠나주길 바라네!”
김씨 형제가 이준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번개 소리와 함께 공기에 파동이 일어나더니 가느다란 손이 두 사람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너희 따위는 나와 얘기할 자격도 없다.”
“어떻게 저런 속도가!”
“투황 단계인데 저 속도가 가능하단 말인가?”
오랜 시간 흑각성에서 이름을 날리던 두 강자가 단번에 이준의 손에 제압당하자, 광장 안에 있던 흑각성의 강자들이 너도 나도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이준의 등 뒤에서는 거대한 뼈날개가 펄럭이며 계속해서 천둥 소리를 내뿜고 있었다.
새로운 날개를 사용한 이준의 속도는 투종 강자라 해도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였으니, 김씨 형제 정도는 감히 이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눈 깜짝할 새에 목덜미를 붙잡힌 김씨 형제의 이마에서는 가느다란 땀방울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지금 그들은 문자 그대로 목숨줄을 붙잡힌 상태였다.
“이 가주, 왜, 왜 이러나. 부디 너그럽게 봐주시게.”
금색 옷을 입은 사내가 침을 꿀꺽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전까지 보이던 자신만만한 표정은 이미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었다.
“저 멍청한 것들이…….”
이 광경을 바라보던 한샘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표정을 굳혔다. 상대를 제압하라고 보내놨더니 오히려 적의 기세를 올려주다니,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그 두 명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한편, 모천행과 영산은 인상을 찌푸린 채 이준의 등 뒤에 달린 날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 달린 날개가 자신이 팔았던 8레벨 마수의 등 뒤에 달려있던 것과 같은 것을 알아챈 순간, 모천행의 얼굴이 더욱 험악하게 구겨졌다. 별 쓸모도 없으리라 생각했던 마수의 날개 뼈가 상대에게 이토록 큰 무기가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준의 손에서 염력이 터져 나오자, 그의 손에 들려있던 둘이 의식을 잃고 시체처럼 축 늘어지고 말았다.
이준은 의식을 잃은 둘을 쓰레기처럼 질질 끌고 가 광장 밖으로 던져 버린 뒤 다시 모천행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모 종주님, 그쪽 아드님은 아직도 혼수상태에 있습니까?”
그 순간, 모천행의 눈빛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네 녀석이 한 짓이냐?”
사실 모어가 중독된 것은 이준과 무관한 일이었고, 그저 아라에게 지나가는 말로 들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자신과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당신이 제 적으로 남는다면 그 친구에게 내가 손을 좀 쓴다고 한들 문제 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모천행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해독약을 내놔. 그렇다면 내 쪽에서도 눈 감아 주겠어.”
“당신이 이씨 가문과 마염곡 사이의 문제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신다면요.”
이준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한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모 종주, 설마 그런 잔꾀에 넘어가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흑각성의 약황일세. 해독이라면 나도…….”
하지만 한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기 실력을 과신하는 것 같은데요. 연금술사와 독술사는 완전히 다른 직종입니다. 독소를 배출하려면 해독비약이 있어야 하는데, 아드님 몸속의 독은 보통 해독약으로는 안 될 겁니다. 뭐 이건 모 종주가 더 잘 아시겠지만요. 뭐 아드님의 목숨을 가지고 도박을 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이준의 입가에는 조롱 섞인 웃음이 걸려 있었다.
이에 이를 악문 채 한샘과 이준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던 모천행이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들 독을 완전히 제거하겠다고 맹세할 수 있나?”
“이씨 가문의 이름을 걸고 약속 드리겠습니다. 투종 강자 분께 제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이준이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답하자, 모천행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 번 믿어보지.”
“모 종주! 저 어린 녀석의 꾐에 넘어가서는 안 되네! 게다가 그냥 두면 이씨 가문쪽 세력이 커져 흑황종까지 노릴 수도 있다고!”
한샘이 노발대발하며 소리를 질렀지만, 모천행은 자신의 뜻을 바꿀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래도 내 아들의 목숨을 가지고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네.”
모어는 흑황종의 희망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식이 목숨을 잃는 것을 두 눈 뜨고 지켜볼 아비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상황을 보아하니 한샘이 설령 연맹 결성에 성공 하더라도 이씨 가문과 가람아카데미를 이길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아 보였다.
한샘 입장에서는 미치고 펄쩍 뛸 일 이었다. 투종 강자가 갑자기 발을 뺀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손실이었다. 지금 같이 흑각성 세력들의 마음을 얻어야하는 때는 더더욱 그랬다.
모천행이 발을 빼겠다고 말하자, 자리에 있던 강자들 역시 분분히 한마디씩 내뱉으며 한샘의 눈치를 살폈다.
상황이 이쯤 되니 영산 장로 역시 표정이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모천행이 발을 뺀다면 자신과 한샘 둘이서 두 명의 투종과 이준을 상대해야 했다.
분위기가 바뀐 것을 느낀 이준은 아라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아라가 모어를 만나 그를 중독 시키지 않았더라면 모천행을 움직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모천행이 움직이자, 한샘 쪽에 붙으려던 강자들 역시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한샘이 무슨 말을 한들 이 분위기를 바꿀 수는 없었다.
뒤이어 소미, 광철, 은평강 등 지원을 온 많은 강자들이 도착해 반달 형태로 진영을 이룬 채 흉흉한 기운을 내뿜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 있던 흑각성의 다른 세력들이 하나 둘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한샘이 무언가 결심한 듯 이를 악물고 입을 열었다.
“사제, 자네를 조금 더 살려주고 싶었는데 제 손으로 죽여 달라고 찾아오는군. 그럼 어쩔 수 없지!”
휘이익!
한샘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광장 주위의 낭떠러지에서 까만 안개가 일더니 돌연 십여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영혼의 궁전?”
“걱정 할 거 없다. 그래 봤자 투종 강자는 한 명 뿐이야.”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자, 서천우와 아라가 곧바로 이준 곁으로 날아왔다.
“큭큭. 이준. 우리 정보가 이씨 가문에 그리 쉽게 흘러 들어갈 거라 생각했나? 네가 알고 있는 것들은 내가 일부러 네 귀에 들어가게 손을 쓴 거야. 널 여기까지 끌고 오기 위함이지. 진짜로 찾아와줄 줄이야…….”
한샘은 괴상한 웃음을 지으며 모천행과 영산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