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4화. 소집
“한샘 쪽 움직임은 어때?”
한샘의 이야기가 나오기 무섭게 이준의 얼굴이 곧바로 돌덩이처럼 굳었다.
“진작 흑각성에서 도망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마염곡에 숨어 있었더라고. 마염곡은 마로나 방언을 비롯한 장로들이 죽었다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야. 하지만 한샘만한 실력자는 없으니, 그 놈이 우두머리를 잃은 마염곡을 집어삼키려는 모양인 것 같더군.”
이찬은 인상을 찌푸리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게다가 내가 새로 얻은 정보에 의하면 지금 놈은 흑각성의 다른 세력들과 연합해 새로운 조직을 만들려 하는 것 같아. 놈의 초대장을 받은 사람 중에는 흑황종이나 영산도 포함되어 있어.”
이를 들은 이준 역시 인상을 찌푸렸다.
“음흉한 놈 같으니.”
“한샘은 야망이 큰 자다. 네 덕분에 좌절을 겪긴 했지만 결국 투종의 힘까지 얻었고, 흑각성에서는 아직도 그를 기억하는 자가 많아. 그가 흑각성의 강자들을 모아 연맹을 결성한다면 가람아카데미랑 이씨 가문에게 모두 큰 위협이 될 거다. 천 장로님과 백 장로님은 이런 일에 나설 리 없으니 사실상 우리끼리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해.”
“그러니까 절대 흑각성의 다른 세력들이 연맹을 만드는 것을 지켜봐서는 안 돼.”
서천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찬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준 역시 두 사람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듯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샘이 언제 다른 세력들을 초청하는지 알아?”
“내일이야.”
“둘째 형, 그럼 이씨 가문의 모든 강자들과 이씨 가문과 동맹을 맺고 있는 다른 세력의 강자들을 모아줘. 내일 당장 마염곡으로 가야겠어.”
이준의 제안에 이찬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마염곡은 우리 아카데미와도 원한이 있으니 아카데미에서도 실력있는 강자들을 모두 모아 힘을 보태주마.”
서천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준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마염곡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한샘, 이번에야 말로 끝장을 내주마.”
* * *
다음 날, 가람아카데미 경계인 ‘평화마을’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산의 숲 속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나더니 뒤이어 십여 명의 강자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강자들의 선두에 선 것은 검은 망토를 두른 청년이었다.
“왔군.”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서 수십 개의 검은 점들이 작은 산봉우리 위로 날아왔다.
“하하, 가주님. 오랜만에 뵙는 군요. 그동안 별 일 없었길 바랍니다.”
“광철 단장님, 예전보다 더 위엄이 있어지셨군요.”
오늘 이준의 요청에 따라 이곳으로 날아온 것은 사자단의 광철을 비롯해 운남종을 상대할 때 그에게 힘을 보태주었던 세력들이었다.
“호호호! 위엄이라고 하면 가주님을 따라갈 자가 있을까요? 흑각성의 그 누구도 이씨 가문이 자기 힘으로 마염곡 세 장로를 죽이고 마로 노인까지 보내버릴 줄은 몰랐을 겁니다. 7성 투종 계급의 강자면 거의 천하무적이나 다름이 없는데 결국 이씨 가주 손에 처단을 당했으니 앞으로 흑각성의 어떤 세력도 감히 이씨 가문을 건드리지 못 할 것입니다.”
옆에 있던 빨간 치마를 입은 아름다운 여자가 애교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껄껄. 이씨 가문이 생긴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 정도의 힘을 갖추다니. 이 정도로 빨리 세력을 확장하는 곳은 본 적이 없습니다.”
은평강 역시 웃으며 한마디를 보탰다.
“아닙니다. 소문은 확대 돼서 퍼지기 마련이죠.”
이준은 가볍게 웃으며 주변을 살핀 뒤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제가 도움을 요청한 이유는 여러분들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예전에도 저와 손을 잡은 적이 있으시니, 제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고 계시리라 믿겠습니다. 이 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면, 그 때 보다 더 큰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이준의 한 마디에 초청 받아 온 강자들의 얼굴에는 곧바로 화색이 돌았다.
상대는 6레벨 연금술사였고, 반드시 약속을 지키는 사내였다. 게다가 지금 이씨 가문의 성장세로 보건데 흑각성 전체가 이씨 가문의 발 아래 놓이는 것도 꿈은 아니었으니,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안달이 난 세력이 한둘이 아니었다. 헌데 두둑한 보상까지 약속하며 직접 자신들을 지명했으니, 그들로써는 입이 귀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쓸데 없는 사족은 안 붙이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께서도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해주시길 바랍니다.”
이준의 말에 은평강이 연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가주님 걱정 마시죠. 저희도 마침 마염곡을 눈에 가시로 여기던 참입니다.”
“좋습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출발하죠.”
이준이 고개를 돌려 가볍게 손짓을 하자, 숲 속에서 열 댓 명의 사람들이 튀어나와 그의 뒤에 섰다.
“가자.”
곧이어 이준의 등 뒤로 한 쌍의 매끈한 뼈 날개가 뻗어나오며 그의 몸이 하늘로 솟구첬다.
이준의 움직임에 이찬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라와 서천우가 여유롭게 허공에 발을 디디며 하늘로 날아 오르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 날개를 펼쳐 그 뒤를 따랐다.
지금 이준의 곁에는 무려 두 명의 투종 강자가 붙어 있었고, 이준 역시 비범한 실력을 가진 강자였으니, 세 사람이서 투종 강자 세 명은 거뜬히 상대할 수 있었다.
소미와 광철, 은평강 역시 서둘러 염력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 올랐다.
* * *
마염곡은 흑각성 북쪽의 한 산골짜기에 위치해 있었다.
산골짜기라고는 하나 그 크기는 성 하나에 견줄 수 있을 정도였고, 그만큼 사람도 많았다. 그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마염곡의 구성원으로,그 곳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선발 절차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보통 10명 중 한 명 정도만이 마염곡의 구성원이 될 수 있었다.
마염곡이 이토록 세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7성 투종 ‘마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죽음을 맞은 지금, 세상 무서울 것 없이 오만방자하던 마염곡의 위세는 완전히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나마 그동안 축적해 놓은 부가 있었기에 마로와 세 장로가 죽었어도 흑각성에 붙어 살 수 있는 것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진작에 흑각성을 떠났어야할 지도 몰랐다.
마로가 죽으며 위기에 처한 마염곡에게 한샘의 존재는 구세주나 마찬가지였다.
투종 강자는 어디에서든 적잖은 영향력을 미치기 마련이다. 게다가 한샘은 한 때 흑각성의 약황이라고까지 불리우던 연금술사였으니, 마염곡 사람들 중 일부는 어쩌면 마로가 있던 시절 이상으로 좋은 날이 찾아올 것이라고 기대하기까지 했다.
한샘이 마염곡을 관리하기 시작한 뒤로 그는 예전의 인맥을 이용해 몇 달만에 흑각성의 많은 강자들을 끌고 왔다. 흑각성의 일류 세력들을 모아야 이씨 가문과 가람 아카데미를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 *
거대한 산골짜기는 마치 산 한 가운데를 푹 파낸 것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산골짜기 주변에는 짙은 검은색 바위가 널려 있었고, 바위에서는 기묘한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마염곡의 입구 쪽에는 마염곡의 호위병들이 무기를 들고 삼엄한 경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초대장이 없다면 아무도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덕분에 입구 쪽에는 줄이 아주 길게 늘어져 있었다.
발 디딜 틈 없이 사람으로 가득한 계곡을 바라보는 한샘의 입가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사제, 우리 사이의 악연도 이제 끝낼 때가 된 것 같군.”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대개 흑각성의 유명 세력과 강자들로, 특별히 실력이 뛰어난 몇 몇은 특별히 마련된 귀빈석에 앉아 있었다.
한샘의 양 옆에는 흑황종의 모천행과 예전에 이준과 보리점액을 놓고 다퉜던 영산이 앉아 있었다.
이 두 사람의 실력이 가장 뛰어났기에 불만을 표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죽어버린 마로를 제외한다면, 그 둘이 흑각성의 최강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천행과 영산 밑으로는 여러 흑각성의 세력의 수장들이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한샘과 뜻을 같이 했지만, 일부는 사실 한샘과 이준의 문제에 끼어들고 싶어 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다만 한샘의 영향력이나 실력을 무시할 수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얼굴을 비춘 것이다.
상석에 앉은 한샘의 주위로는 마염곡 강자들 외에도 일부 익숙한 얼굴들이 있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김씨 형제로, 그들 역시 이준과 관계가 좋지 않았으니 한샘의 초청에 즐거운 마음으로 응한 것이다.
“하하하. 이렇게 여기까지 불러 여러분들의 시간을 빼앗아 죄송합니다.”
한샘이 입을 열자, 광장 안이 조용해지며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미소를 머금고 다시 입을 뗐다.
“이번에 여러분을 부른 건 함께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흑각성은 늘 가람아카데미와 불화가 있었죠. 매년 가람아카데미의 집행부에서는 흑각성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들으셨겠지만 얼마 전 마염곡의 곡주인 마로가 가람아카데미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광장에 자리하고 있던 흑각성의 강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알고 있는 소식이기는 했지만, 막상 한샘의 입으로 마로의 죽음에 대해 직접 듣게 되니 충격이 더욱 컸다. 마로는 7성 투종 계급의 강자로, 흑각성에서는 실로 적수가 없는 강자였기 때문이다.
줄곧 무표정을 유지하던 모천행과 영산도 미간을 찌푸리며 말없이 차를 들이켰다.
‘정말로 그 두 노인네가 나타날 줄이야……. 하지만 그자들이 나타났을 때는 이미 마로가 이준에 의해 큰 부상을 입었다고 했으니 조심해야겠군.’
모천행이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가람아카데미의 실력은 저희가 아는 것 이상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항상 흑각성 사람들을 눈엣가시로 여겼으니, 마로가 죽은 지금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불을 보듯 뻔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최근 흑각성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이씨 가문의 창시자인 이준도 본원 사람입니다. 그 세력도 가람아카데미와 한 패라 가람아카데미의 지원을 받으면서 무서운 속도로 커가고 있죠. 마염곡에서 몸을 던져 막지 않았으면 여러분에게도 화가 미쳤을지 모를 일입니다.”
한샘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허나 지금 마염곡은 큰 타격을 입어 더 이상 홀로 이씨 가문을 상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염곡이라는 족쇄가 사라졌으니 이씨 가문은 분명 더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겠죠. 그렇게 되면 가장 위험한 사람들은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물론 여러분의 세력 내에 마로를 뛰어 넘는 강자가 있다거나, 본원의 두 괴물들을 상대할 수 있는 강자가 있다면 이런 말들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으신 분들은……. 이씨 가문에 귀속 되거나 멸망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겁니다.”
한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광장에 소란이 일었다.
“그럼 한샘 선생은 여기에 대한 대책이 있소?”
소란스러운 와중에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물었다.
한샘은 다시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 되자, 피식 웃으며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다시 설명을 이어나갔다.
“가람아카데미와 이준의 실력은 흑각성 내에 당할 자가 없는 수준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안전을 위해 연맹을 결성해 공동의 적을 몰아낼까 합니다.”
“연맹?”
이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한샘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염곡이 힘을 잃었으니, 흑각성의 다른 세력들과 연합해 가람아카데미와 이씨 가문에 대적할 생각인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