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2화. 태령황제의 옥
끝이 보이지 않는 용암 세계는 알아갈수록 신비로웠다. 천지의 불꽃을 두 개 씩이나 만들어 냈을 뿐만 아니라 정체불명의 괴물이 가득하고, 투존 강자마저 공포에 떨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니…….
“그럼 역시 빨리 이곳을 벗어나는 게 낫겠죠?”
“여길 떠나고 싶다면 먼저 실력을 회복하는 게 좋을 거다. 지금 네 몸속 염력이라면 용암 괴물이 아니더라도 무사히 나갈 수 없을 거다. 오륜이화법은 네 안전을 확보한 다음 수련하거라. 네 몸에 지니고 있는 천지의 불꽃을 사용하면 제법 쓸만 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게다.”
“네, 알겠습니다.”
이준은 천화존자의 충고에 따라 염력을 회복하기 위해 수련 자세를 잡은 뒤 곧바로 저장반지에서 붉은 구슬을 꺼내들었다.
“불 구슬?”
이준의 손에 들린 붉은 구슬을 발견한 천화존자는 놀란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허허, 그 와중에 이런 물건을 챙기다니, 담이 크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이준은 피식 웃음을 지은 뒤 곧바로 붉은 구슬을 입 안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뜨끈한 불꽃 덩어리가 식도를 타고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느껴지더니 이내 그의 피부가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준의 울긋불긋한 피부가 점차 정상적으로 되돌아오자, 그를 지켜보던 전화존자가 묘한 표정으로 용암 위쪽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 거렸다.
“내가 다시 살아날 날이 올 줄이야. 하늘도 날 그냥 버리지는 않으시는구나.”
이준이 삼킨 것은 상급의 불 구슬은 아니었다. 따라서 20분 정도가 지나자 불 구슬이 완전히 정련 되었고, 빠른 속도로 염력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역시 보통 물건이 아니야. 저장 반지 안에 있는 불 구슬로 순조롭게 6성 투황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군. 일단 여길 빨리 벗어나야 하겠지만.”
염력을 회복한 이준이 눈을 뜨자, 가만히 주위를 살피고 있던 천화존자가 입을 열었다.
“일단 이 공간을 벗어나면 내가 온 힘을 다해 마그마의 파동을 숨겨주지. 자네는 온 힘을 다해 위로 향하게. 지금 내 상태로는 그리 오래 공간을 봉쇄할 수는 없을 게야.”
말을 마친 천화존자의 영혼체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며 인을 맺자, 새하얀 저장반지가 이준의 손가락에 끼워졌다. 이윽고 천화존자의 희미한 형체가 저장반지 속으로 들어갔고, 저장반지 안에서 미세한 파동이 퍼져 나가며 이준 눈 앞에 있던 빛의 장막이 서서히 부서졌다.
빛의 장막이 깨지는 것과 동시에 이준의 몸 위로 청록색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 순간, 은은한 공간의 힘이 저장반지 속에서 퍼져 나오며 주위의 공간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준이 전력으로 마그마를 가르며 움직이려는 찰나, 갑자기 그의 손바닥에 오래된 옥 조각이 나타났다.
늘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던 옥 조각에서는 은은한 열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바로 이씨 가문에 오랜 기간 계승되어 온 ‘태령 황제의 옥’이었다.
이준은 태령황제의 옥을 천천히 만지작거리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껏 아무런 움직임이 없던 옥에서 갑자기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마도 저 용암 끝에 있는 무언가 때문인 것이 틀림없었다.
이은의 말에 따르면 태령황제의 옥은 투제가 남긴 물건이었다.
투제는 두말할 나위 없이 투기 대륙의 정점에 선 존재였다. 그 수준의 강자가 도대체 어느 정도의 힘을 갖고 있는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강자가 남긴 물건이라면 투기대륙 전체에 피 튀기는 싸움을 몰고 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준이 투제가 남긴 물건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영혼의 궁전과 일전을 벌일 때 엄청난 무기가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고기처럼 용암 속을 유유히 헤엄치던 이준은 뒤로 고개를 돌려 아래를 한 번 더 힐끗 바라봤다. 용암 바다의 가장 깊은 곳에는 틀림없이 태령황제의 옥과 관련된 단서가 존재할 것 같았다.
이준의 눈빛이 이글거리며 타올랐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지금 자신의 실력으로는 그 곳에 도달하기도 전에 죽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태령황제의 옥이 태령황제가 남긴 열쇠라는 것은 확실했지만, 그가 가진 것은 열쇠의 일부에 불과했다. 때문에 아래에 태령황제가 남긴 유산이 있다해도 지금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아래에는 천화존자조차 두려워하는 무언가가 있었으니, 지금 자신의 실력으로는 도망조차 치지 못 하고 죽음을 맞이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냉정을 되찾은 이준은 이를 악 물고 황제의 옥을 다시 저장반지 안에 넣어 두었다.
태령황제의 옥은 투존 강자라 하더라도 탐낼만한 물건이었고, 이는 천화존자라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영혼이 자신과 함께 있는 지금 태령황제의 옥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결코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또 한 가지, 용암 깊은 곳에 무언가가 있다는 소문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게 된다면 가람 아카데미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어떻게 생각해봐도 지금 그 곳으로 향하는 것은 시기상조였다.
생각을 마친 이준은 곧바로 속력을 높여 용암 호수 위쪽으로 향했다. 천화존자가 마그마의 유동을 감춰주고 있으니 마음껏 속력을 내도 용암 괴물들에게 들통 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하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용암의 온도가 낮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지상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 * *
퐁당!
고요한 수면 위로 작은 기포들이 소리를 내며 솟아 올랐다. 세상은 온통 죽은 듯이 고요했다.
그 때, 갑자기 잠잠한 수면을 뚫고 청록색 화염을 두른 그림자 하나가 튀어 나왔다.
“휴……. 그래도 어찌어찌 저 망할 곳을 벗어났네.”
이준은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내며 웃음을 지었다.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얻은 것이 많았다.
우선은 천계의 탑에 불꽃을 충전하는 문제로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고, 1격 무투기까지 얻었다. 게다가 천화존자의 영혼을 복구하는데 성공한다면 1년간은 투존 강자의 보호까지 받을 수 있었다.
고개를 숙여 손가락에 끼워진 하얀 저장반지를 바라보던 이준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내려 앉았다. 투존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반지를 끼고 있자니, 머릿속에 그리운 스승님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드디어 마그마 바깥 세상을 구경하는구나.”
그 순간, 하얀 영혼체 하나가 저장반지에서 빠져나오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젊은이, 내 영혼은 지금 아주 허약한 상태네. 오래 나와 있지 못해. 그러니 영혼을 복구하는 일은 모두 자네에게 맡기지. 내 영혼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걸 기억해 두게.”
천화존자가 이준을 바라보며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에 이준은 미소 띤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십시오 선배님. 저도 선배님의 도움이 꼭 필요하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곧 있으면 중주로 떠나야할 이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강한 힘이었다. 그것이 본인의 힘이든 외부의 힘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화존자의 영혼을 복구시킨다면 투존 강자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니, 그의 입장에서도 천화 존자의 영혼을 복구 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준의 대답에 천화 존자는 만족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가 오륜이화법을 수련할 때 궁금한 게 생긴다면 언제든지 묻게나.”
“네, 정말 감사합니다.”
이준은 웃으며 감사인사를 건넸다.
공간의 힘을 너무 오래 사용한 탓인지 천화 존자의 영혼은 용암 바다 속에 있을 때 보다 한층 더 희미해져 있었다. 더 이상 밖에 머무를 수 없었던 천화 존자는 긴 한숨을 내쉬며 하얀 저장반지 속으로 돌아갔다.
천화존자가 저장반지 속으로 무사히 돌아가자, 이준은 손을 탈탈 털고 고개를 들어 천계의 탑의 구멍을 내다봤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눈을 감은 채 수련에 들어갔다. 곧장 그곳을 떠나지는 않았다. 용암 바다 속에서 얻은 불 구슬을 이용해 수련을 한다면 곧 6성 투황이 될 수 있으니, 지금 이대로 밖으로 나가기는 너무 아쉬웠던 것이다.
생각을 마친 이준은 다시 낭떠러지에 만들어 놓은 동굴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그가 가져온 불 구슬은 백 알이 넘었고, 수련할 때 그 불구슬을 사용한다면 6성 투황이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 * *
적막한 용암 세계에서의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이 빠져나가듯 순식간에 흘러가 버렸다. 용암 세계에서 시간이란 개념은 애초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듯했다.
그렇게 한 달이란 시간이 눈 깜짝할 새에 흘렀다.
한 달 동안 이준은 대략 50알 정도의 불구슬을 흡수해가며 수련에 매진한 덕에 지금 이준은 또 한 차례의 승급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몸 안의 염력 회오리가 요동치기 시작하자, 이준은 계속 엉덩이를 붙이고 수련하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수련은 게을리 해선 안 되지만, 쉬지 않고 수련만 해대서는 오히려 실력이 뒷걸음질 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미 5성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을 확신한 이준은 염력 수련을 멈추고 ‘육합자의 검’의 수련에 들어갔다.
이준은 염력 수련에 대한 일은 아예 뒷전으로 미뤄놓고 오로지 무투기 수련에만 집중했다.
한 가지에 집중했을 때 얻는 효과는 정신이 분산 되어 있을 때와 비교도 되지 않았으니, 이준은 빠른 속도로 ‘육합자의 검’에 대해 더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는 무투기를 사용할 때마다 그의 신체 주변으로 바람이 새어 나가지 않는 촘촘한 그물이 만들어졌고, 용암 속으로 들어가 무투기를 펼쳐도 한 방울의 용암조차 자신의 몸에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무투기를 수련하다가 휴식을 취할 때는 주로 오륜이화법을 연구하며 시간을 보냈다.
오륜이화법은 불을 통제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무투기로, 아직까지 이준이 단 한 번도 수련해본 적 없는 종류의 무투기였다. 그는 평소에 천지의 불꽃을 이용해 전투를 하기는 했지만, 불을 사용한 무투기를 익힌 적은 없었으니 단순히 불을 다루는 솜씨만 놓고 비교하자면 한샘이 그보다 몇 수는 위였다.
다만 그에게는 두 개나 되는 천지의 불꽃이 있었고, 강한 영혼을 타고났기에 지금까지 그럭 저럭 해올 수 있었던 것에 불과했다.
오륜이화법에는 불을 활용한 다양한 전투 기술이 기록되어 있었고, 최소한의 에너지를 사용해 효율적으로 불을 사용하는 방법이 상세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이준이 오륜이화법을 연습하는 사이에도 천화존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확실히 용암 속에서 공간의 힘을 사용하느라 에너지 소모가 컸던 모양이었다.
비록 오륜이화법처럼 정식으로 불을 다루는 무투기를 익히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네 개나 되는 불꽃을 합칠 수 있는 이준의 불꽃 통제 능력으로 불꽃을 사용한 무투기를 익히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이준은 오륜이화법에 기재된 대부분의 기술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열흘 정도가 지나자, 또 다시 몸 안의 염력 회오리가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준은 그 느낌을 받자 마자 늑대 모양 불꽃을 만들던 인을 풀고 재빨리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정신을 집중하고 동굴 안에 자리를 잡은 이준은 몸 속에서 느껴지는 파동을 최대한 억누르며 불 구슬 열 알을 꺼낸 뒤 눈을 감고 수련의 인을 만들었다.
인이 만들어지기 무섭게 주변에 격렬한 파동이 일어나더니 이내 붉은색의 뜨거운 에너지가 모여들어 회오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준의 주위를 감싸고 소용돌이 치던 에너지는 기다란 붉은 뱀 마냥 그의 몸을 칭칭 감다가 빠른 속도로 그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