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1화. 오륜이화법(五輪離火法)
상대에게 정말로 적의가 없음을 확인한 이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머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정말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선배님의 시신에 손을 댈 뻔 했군요.”
이준의 예의바른 태도에 천화존자는 민망한 듯 손사래를 치며 자기 옆에 있던 ‘아기 불꽃’을 가리켰다.
“이 녀석에 관심이 있어서 왔나보군?”
“선생님 물건인지 몰라서 그랬습니다. 이 구름불꽃을 전승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껄껄,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게. 내가 살아있을 때는 자네의 할아버지조차 태어나지 않았을 시절이야. 노인의 연륜을 무시하면 안 되지.”
상대가 민망한 듯 웃음을 짓자, 천화존자가 인자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이 곳을 찾은 첫 번째 사람이었네. 그 후 수년을 들여서 겨우 구름 불꽃을 손에 넣었지. 당시에 내가 길들인 구름불꽃이 바로 자네 몸속에 있는 그것이네.”
천화존자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이준은 귀를 쫑긋 세운 채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투존 강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정말이지 흔치 않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그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는 천지의 불꽃과 이 용암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던가.
“난 구름불꽃을 손에 넣은 다음 바로 이 곳을 떠나지 않았네. 용암세계의 깊은 곳이 궁금했거든.”
마치 이 곳을 떠나지 않은 것을 후회하는 듯한 말투였다.
“용암 세계에 깊이 들어온 뒤 구름 불꽃의 씨앗을 발견했지. 발견하자마자 아주 기뻤네. 하지만 이 씨앗까지 가져가려고 욕심을 부린 것이 화근이었어. 두 불꽃이 몸속에서 완벽히 융합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철천지원수처럼 싸움을 벌였거든. 결국 두 불꽃의 싸움에 의해 중상을 입게 됐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용암 속에 사는 괴물들에게 습격을 당하고 말았지.”
“그 이상한 도마뱀 같은 놈들에게 습격을 당하신 것 입니까?”
“자네도 그 녀석들과 만난 적 있는 모양이군. 그 놈들은 이 곳의 원시 생물이네. 머릿수가 아주 많은 데다가 그 중에는 투존과 맞먹을 정도의 강자도 존재하지. 당시 내가 만났던 것도 투존급의 괴물이었어. 천지의 불꽃에 의해 중상을 입은 몸으로 상대하기는 벅찬 놈이었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도마뱀족 강자들이 내가 숨은 공간을 끝내 찾지 못 했다는 점이었네. 아마도 공간 제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모양이야.”
자신의 최후에 대해 이야기하는 천화존자의 표정은 너무나도 담담하기 짝이 없어 마치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몸을 숨기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이미 너무 큰 부상을 입어 육체가 무너져 내렸지. 결국 내가 지니고 있던 성숙한 구름 불꽃을 풀어주고 영혼은 구름 불꽃의 씨앗에 붙어 연명하게 되었네. 그런데 이것도 시간이 오래 지나니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더군. 만일 2년 안에 아무도 여길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겠지.”
한마디로, 이 천화존자는 아직 완전히 죽은 목숨이 아니었다. 실력이 투존 단계에 이르면 영혼이 사라지는 것만 아니면 부활할 기회가 있었다. 약로가 그랬듯이 말이다. 그 역시 투존이니, 약로 같이 영혼을 담을 수 있는 몸만 만들어진다면 다시 살아날 뿐 아니라 예전의 실력을 회복하는 것도 가능했다. 다만 천화존자의 영혼은 약로와 달리 생명의 힘이 너무나 미약해 부활의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며 불꽃의 씨앗이 점점 불의 형태를 갖춰 가더군. 물론 아직은 어린아이 같은 수준에 불과하지만 말이야.”
천화 존자는 가볍게 손을 휘둘러 아기 불꽃을 손에 잡은 채 담담하게 웃어보였다.
“이걸 갖고 싶겠지?”
이준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공손한 말투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선생님께서 구름불꽃을 제게 주실 수만 있다면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겠습니다.”
이준의 말을 들은 천화 존자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좋을대로 하게. 대신 날 좀 도와줄 수 있겠나? 물론 그에 대한 보상은 내 섭섭지 않게 쳐주겠네. 어차피 죽은 목숨이니 말이야.”
“뭐든 말씀하시죠.”
아기 불꽃을 건네주겠다는 말에 이준의 눈이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내가 보니 자네는 불의 기운이 왕성하면서도 그 안에 은은한 나무의 기운을 가지고 있더군. 연금술사인 거지? 게다가 구름불꽃도 다룰 수 있으니 등급도 낮지 않겠군.”
천화존자가 웃으며 말했다.
“역시 투존 강자이십니다. 영혼체이신데도 아주 예리하시네요.”
“그럼 손상된 영혼을 복구 시키는 방법도 알겠지?”
노인의 질문에 순간 이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투존 계급 강자의 영혼을 복구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를 섣불리 부활시켰다가 되살아난 천화존자가 자신을 죽이려 든다면 지금 이준의 실력으로는 저항다운 저항조차 하지 못 하고 목숨을 잃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하. 걱정 말게. 천화 존자라는 이름에 걸고 맹세컨대, 절대 자네의 뒤통수를 치는 일은 없을걸세. 뭐, 자네 생각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야. 잘 알지도 못 하는 투존을 부활시켰다가 천지의 불꽃을 빼앗기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겠지. 나라도 그랬을 테니 원망은 않겠네.”
천화존자는 이준의 마음을 손바닥 보듯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말을 마친 그는 가볍게 손을 휘둘러 새하얀 저장반지 속에서 눈처럼 하얀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들었다. 두루마리 위에는 붉은 날개를 가진 짐승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이건 내가 살아 있을 때부터 아주 유명했던 오륜이화법(五輪離火法)이라는 무투기라네. 무투기보다는 불을 다루는 수련법에 가깝지.”
천화존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두루마리를 이준에게 건넸다.
“날 도와준다면 이걸 자네에게 주지. 만일 내가 의심된다면 그 물건을 먼저 주도록 하겠네. 별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날 도와줘도 좋아.”
이준은 족자를 들고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신중하게 그것을 펼쳐 보았다.
「오륜이화법. 불꽃 제어법. 총 5종류로 분류할 수 있으며 늑대, 표범, 사자, 호랑이, 뱀, 다섯 마수가 모두 모이면 오륜불꽃이 가동되어 바다를 모두 증발시킬 정도의 위력을 자랑한다. 만일 다섯 개 중 네 개가 천지의 불꽃으로 만들어진다면 그 위력은 1격 무투기를 능가한다.」
“1격 무투기?”
1격 무투기라는 말에 이준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살면서 단 한번도 1격 무투기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투기 대륙을 호령하는 강자라 한들 한평생 1격 무투기에 대한 소문조차 듣지 못 하고 생을 마감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다섯 마수 중 네 개가 천지의 불꽃으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네 종류의 천지의 불꽃이 필요했으니, 1격 무투기를 구하는 것 보다도 이 조건을 충족하는 것이 더 어려워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륜이화법은 몹시 매력적인 무투기였다. 지금 자신에게는 세 개의 천지의 불꽃이 있으니, 1격 하급이나 2격 상급 정도의 위력은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준은 그 상태로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천화존자는 조금도 재촉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이준의 결정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이준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께서 영혼을 회복하는 걸 도와드리겠습니다. 대신 한 가지만 더 약속해주세요.”
이준의 말을 들은 천화존자는 이내 잔잔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보게.”
“선생님께서 기력을 회복하신다면 그 뒤로부터 저를 일 년만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1년 동안 지켜 달라고?”
천화존자는 잠시 넋을 놓았다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껄껄껄, 이거 아주 재미있는 젊은이군. 절대 손해보는 장사는 안 할 친구야. 물론 자네도 투존 강자가 어떤 존재인지는 알고 하는 소리겠지?”
“선배님 같은 강자에게 일 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지 않습니까? 게다가 영혼의 힘만 회복하면 부활도 가능할 텐데, 1년 정도라면 괜찮은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허허……. 뭐 자네 말이 틀린 것도 아니지. 1년은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니까 말이야. 다만 내 영혼은 이제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이니, 서두르는게 좋을걸세.”
“걱정 마세요. 영혼의 힘을 회복하는 일을 처음 해보는 게 아니라서요. 경험이 있으니 선배님의 영혼이 큰 상처를 입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복구시켜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지금 이준에게는 약로에게 물려받은 다양한 조합표가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영혼의 힘을 복구하는 연금비약의 조합표도 있었으니, 약재만 있다면 천화 존자의 영혼을 회복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역시 내가 사람 잘못 본 건 아닌 것 같군.”
가만히 이준을 바라보던 천화존자는 망설임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구름불꽃을 이준에게 넘겨주었다.
구름불꽃을 건네받은 이준은 솟구치는 기쁨을 애써 억누르며 재빨리 저장반지 속에서 불꽃 주전자를 꺼내 그 안에 불꽃을 던져 넣었다.
불꽃주전자 속으로 들어간 구름 불꽃이 기세 좋게 타오르자, 이준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이걸로 천계의 탑 문제는 완전히 해결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어 그는 천화존자를 향해 ‘오륜이화법’이라 적힌 두루마리를 흔들어 보인 뒤 그것을 자신의 저장반지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럼 이 물건도 제가 잘 챙겨 두겠습니다.”
이에 천화존자는 새하얀 저장반지를 손에 쥔 채 눈앞에 쌓인 백골을 바라보며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번거롭지 않다면 내 뼈도 좀 거둬주게. 투존 강자의 뼈는 꽤 진귀한 것이니, 갖고 있어서 나쁠 것은 없겠지.”
이준 입장에서야 천화존자의 요구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곧바로 투존의 뼈를 저장반지 안에 집어넣었다.
거래를 끝마친 이준은 곧바로 손을 털며 빛의 장막 바깥쪽을 바라봤다. 어느 새 빛의 장막 바깥으로는 단 한 마리의 괴물조차 보이지 않았다.
“용암 괴물들은 마그마의 유동에 아주 민감하지. 만일 이 안에서 조금이라도 큰 움직임이 느껴진다면 바로 눈치 챌 거야. 게다가 숫자도 많고 투황이나 투종, 투존급 괴물도 있으니 신중하게 행동하게.”
“알겠습니다 선배님.”
천화존자의 충고에 따라 이준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빛의 장막 안에서 가만히 용암 바다의 동정을 살폈다.
확실히 천화존자의 말대로 지금 나가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그들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숨어있다면, 눈으로 그들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상태로는 절대로 놈들의 포위를 뚫고 용암 바다를 벗어날 수 없었다. 심지어 천화존자의 말에 따르면 개중에는 실력이 투존과 맞먹는 괴물도 있다고 했으니 경거망동은 금물이었다.
“헌데 저 놈들이 용암 바깥까지 따라 나오면 어떻게 하죠? 바깥에는 가람 아카데미의 본원이 있습니다. 제가 저 놈들을 끌고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네. 이 곳의 생물들은 용암 속에서만 살 수 있으니까. 이곳을 벗어나면 물을 벗어난 물고기처럼 곧바로 목숨을 잃고 말게야.”
천화존자의 말에 이준은 그제야 안도한 듯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는 정말로 놀랍군요. 저 녀석들은 대체 언제 어디서 생겨난 것들인지. 혹시 더 아래로 내려가면 뭐가 더 있을지도 모르……”
이준은 말을 하다 말고 천화존자의 눈치를 살폈다. 더 아래쪽으로 내려간다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노인의 얼굴이 전에 없이 어둡게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이 아래 쪽에 대해서는 절대로 호기심을 갖지 말거라. 나도 아래에 정확히 뭐가 있는지는 모르기만 아주 무서운 존재가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느껴지니까 말이다. 설령 내가 부활하여 예전의 실력을 되찾는다 해도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할 무언가가 아래쪽에 숨어있는 것 같다.”
그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이준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투존 강자를 이토록 겁먹게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면 적어도 투성급의 무언가가 아래에 잠들어 있다는 의미였다.
“내가 그 존재를 감지한 것도 육체가 무너지기 전이었지. 내 생각이지만, 저 괴물들이 용암 바다 아래에 위치한 무언가를 지키는 문지기 같은 역할은 아닐까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