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0화. 천화 존자
격렬한 전투가 거듭되면서 염력의 소모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조금 더 버틸 수 있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이 용암 바다속에서 생을 마감하게 될 지도 몰랐다.
‘서둘러야겠어.’
이준이 저장반지 속에서 염력을 회복하는 연금비약을 꺼내 입 안으로 밀어 넣으며 더욱 속도를 높이려는 찰나, 갑자기 새빨간 괴수들이 반으로 갈라서며 길을 만들었다.
곧이어 그 사이로 거대한 용암 괴물 하나가 천천히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아까 전에 보았던 그 ‘지성이 있어 보이는’ 괴물이었다.
놈은 이준에게 시선을 고정한채 손을 휘두르며 계속해서 기이한 울음 소리를 뱉어댔다.
다음 순간, 주위에 있던 용암 괴물들이 일사 분란하게 공격을 멈추고 거리를 벌리더니 일제히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지시를 받은 모양이었다.
작은 괴물 하나하나의 힘은 약했지만, 이제 놈들은 하나하나 달려들지 않고 에너지를 한군데로 응집하고 있었다. 제 아무리 보잘 것 없는 힘이라도 이 정도 숫자가 모여 에너지를 응집시킨다면 그 위력은 어지간한 투황 강자의 공격 못지않을 것이 자명했다.
‘저 놈이 다른 괴물들을 지휘하는 게 틀림없군. 일단 저 놈부터 죽여야겠어.’
대장격으로 보이는 거대한 용암 괴수의 실력은 투황 초기 단계 정도였다.
그 순간, 무수히 많은 작은 괴물들의 몸 주위로 머리통만한 화염구가 생성되더니 이내 수백 개의 화염구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하나하나의 위력은 보잘 것 없었지만, 수백, 아니 수천 개에 달하는 화염구를 모두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침내 수천 개의 용암구가 발사되는 찰나, 이준의 발치에서 이제까지 본 적 없는 눈부신 은빛 섬광이 터져 나왔다.
다음 순간,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던 이준의 몸이 돌연 거대한 괴수의 등 뒤에 나타났다.
용암의 흐름으로 상대가 자신의 뒤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눈치 챈 괴수는 곧바로 거대한 주먹을 휘둘러 이준을 내리쳤다.
턱!
하지만 커다란 주먹은 이준의 손에 의해 너무나 간단히 막혀버리고 말았고, 거대한 파문이 일며 주위의 작은 괴물들이 일제히 뒤로 날아가고 말았다.
“어림없지!”
한 손으로 상대의 공격을 잡아낸 이준은 콧방귀를 뀌며 가볍게 오른손을 휘둘러 가장 익숙한 무투기를 발휘했다.
“태초의 힘!”
곧이어 힘찬 기합 소리와 함께 거대한 괴수의 가슴 위로 육중한 주먹이 내리 꽂혔다.
콰앙!
괴물의 가슴에는 어느 새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순식간에 우두머리를 해치운 이준은 재빨리 놈의 가슴에서 용의 눈알을 연상케 하는 커다랗고 검붉은 구슬을 꺼냈다.
검붉은 구슬 안에는 작은 구슬의 열 배도 넘는 불 속성 에너지가 담겨 있었다.
“캬아악!”
이준이 우두머리를 죽이자, 수천 마리의 괴수들이 한꺼번에 비명을 질러댔다.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은 소음이었다.
게다가 거대한 놈을 잡는 사이 더 많은 괴물들이 몰려와 또 다시 그를 겹겹이 포위한 상태였다. 상황이 이쯤 되니 이 용암 바다 속에 대체 얼마나 많은 괴수들이 살고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번개의 춤을 최대한도로 사용한다 해도 놈들의 포위망을 벗어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바로 그 때, 투명한 빛을 내뿜고 있는 백골이 이준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백골 주위로는 감히 그 어떤 괴물도 접근하지 못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결국 이준은 이를 악물고 그쪽으로 몸을 날리며 구름 불꽃으로 몸을 감쌌다. 어차피 위로는 올라갈 수 없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백골을 둘러싼 구름 불꽃 안으로 몸을 숨기는 것 뿐이었다.
이준이 투명한 빛을 뚫고 들어간 그 순간, 이상한 파동이 그의 온 몸을 휩쓸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 파동은 이준의 몸을 둘러싼 구름불꽃을 감지하자마자 신속하게 흩어지며 그가 투명한 빛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보호막 안으로 들어간 이준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연신 주위를 둘러봤다.
안에 들어와서 살펴보니 바깥에서 본 것 보다 공간이 훨씬 넓었다. 적어도 두배, 아니 세 배는 되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빛의 장막 밖을 쳐다보니, 아까 전 죽인 놈보다 더욱 거대한 괴물이 나타나 있었다. 놈의 실력은 거의 투황 최고 수준에 달해 있었다. 아무 것도 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 용암 세계에 정체모를 괴물들이 이렇게나 많이 살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투황 최고 수준의 힘을 가진 괴물까지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가장 나쁜 것은, 투황 최고 수준을 넘어 투종급의 괴물까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만일 그렇다면 죽을 때까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젠장. 밖에서는 그렇게 평화로워 보이더니…….”
하지만 기묘하게도 빛의 장막 밖에 있는 괴물들은 백골도 빛의 장막도 보이지 않는 듯 그 주위를 한참이나 배회하다가 하나 둘 흩어졌다. 심지어 어떤 놈은 이준의 코앞까지 다가와 놓고도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 듯 그대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이준은 마지막 한 마리까지 자리에서 사라지기를 기다리며 장막안의 백골을 관찰했다.
정체불명의 백골에게 다가가자,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준은 시선을 백골 위에 피어 있는 무형의 불꽃에 시선을 고정한 채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이 불꽃, 혹은 이 백골이 자신의 체내에 흡수된 구름 불꽃을 자극한 것이 틀림없는 듯싶었다.
장막 안에 있는 구름 불꽃은 성인 남성의 머리 정도 크기로, 그 온도는 이준이 가진 구름 불꽃에 비하자면 미지근한 수준에 불과했다. 만일 이준의 구름 불꽃이 성체라고 하면, 지금 눈앞에 보이는 불꽃은 아직 어린아이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천지의 불꽃은 천지의 불꽃이었으니, 천하에 둘도 없는 보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다만 어떻게 같은 곳에서 똑같은 천지의 불꽃이 둘 이나 나올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스러웠다. 그런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직 충분히 자라지 못한 구름 불꽃을 바라보던 이준은 잠시 그 불꽃을 흡수하면 어느 정도나 실력이 상승할지를 가늠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 정도의 에너지로는 큰 효과를 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불개를 진화시키려면 그야말로 방대한 에너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아기 불꽃’으로는 도저히 불개를 진화시킬 수 없었다.
바로 그 때, 그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좋은 생각 하나가 스쳤다. 자신에게는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이것은 ‘진짜’ 구름 불꽃이었다. 즉, 이 불꽃을 무사히 가져갈 수만 있다면 천계의 탑을 재가동 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작을 때부터 길들이기 시작한 불꽃은 나중에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더라도 이준이 흡수했던 구름 불꽃처럼 심하게 저항하지 않았으니 수 백년의 시간이 지나면 본원의 뛰어난 후배가 이 물건을 손에 넣는 것도 가능했다.
무엇보다 천지의 불꽃은 자라나는 과정에서 영성과 지혜를 갖게 되는 존재였으니, 이 작은 불꽃이 자라나며 본원을 자신의 집으로 여기게 된다면 문자 그대로 본원을 수호하는 영물이 되어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준이 그 ‘아기 불꽃’을 손에 넣으려 다가가자, 돌연 백골에서 눈부신 불빛이 터져 나왔다.
깜짝 놀란 이준이 멍한 표정으로 두 눈을 깜빡이고 있는 사이,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백골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영혼체가 나타난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영혼체는 하얀 도포를 입고 있었고, 하얀 눈썹에 하얀 수염을 가지고 있는 노인이었다. 노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범상치 않은 기운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덜컥 겁을 집어먹지 않을 수 없었다.
“으음……? 그건 구름불꽃이 아닌가? 설마 그 녀석을 손에 넣을 줄이야.”
노인은 이준을 힐끗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여기 계신 줄 모르고 함부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준은 혹여나 상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까 걱정하며 최대한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눈 앞의 노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자신의 스승인 약로 못지 않게 강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준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가볍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이준의 몸속에 있던 구름 불꽃이 주인의 제어를 벗어나 상대의 손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저기, 선생님. 지금 뭐하시는 거죠?”
너무나 당혹스러운 상황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구름 불꽃은 마치 형태 없는 뱀처럼 노인의 손바닥을 휘감으며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이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운 광경에 이준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천지의 불꽃이 주인의 통제를 벗어나 타인의 명령을 들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주인의 몸에 있을 때 보다도 더 순종적인 태도로!
“신기한가?”
홀린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이준의 모습에 노인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구름 불꽃의 지난 주인이었지. 자네가 아무리 수련을 해서 잘 길들였어도 나에게는 거역하지 못해. 불 다루는 기술도 자네가 날 뛰어 넘을 순 없을 테고 말이야.”
“지난 주인이요?”
노인의 말에 이준은 이해할 수 없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하하……. 선생님, 농담이시죠? 그 녀석에게는 분명히 주인이 없었는걸요.”
“당연히 몰랐겠지. 내가 죽음에 가까워졌을 때 자유롭게 놓아줬으니까. 네가 보기에는 주인이 없어 보였겠지.”
노인의 말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집어 삼켰다. 여기서 구름불꽃의 지난 주인을 만날 줄이야. 만일 노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서천우조차도 그의 존재를 모르는 것이 당연할 것 같았다.
그보다 지금 이준이 걱정하는 것은 노인이 구름 불꽃을 다시 가져가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천지의 불꽃은 그에게 있어 목숨이나 다름 없었다. 만일 누군가가 이를 강제로 가져가버린다면 그의 염력과 몸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구름 불꽃을 빼앗긴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에 이준은 주먹을 움켜쥐며 금방이라도 노인에게 달려들 준비를 했다. 이 노인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불꽃을 뺏겨 죽으나 그와 싸우다 죽으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인은 그런 이준의 속을 빤히 알고 있다는 듯 인자하게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걱정 말게. 자네에게서 구름불꽃을 빼앗을 생각은 없으니까. 게다가 난 이미 죽은 사람이고, 자네가 보는 내 모습은 그저 영혼의 잔재일 뿐이지. 난 자네에게 아무런 해도 입힐 수 없네.”
이준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민망하다는 듯 웃음을 지어보였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존함을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소천화라고 하네. 생전에는 천화 존자라고 불렸었지.”
“존자요?”
‘존자’라는 두 글자에 이준의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존자’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오로지 투존 강자에게만 허락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껄껄, 놀라기는. 어차피 다 옛날이야기네. 지금은 그냥 약해 빠진 영혼체에 불과하지. 오히려 내가 자네를 두려워해야 할 판이네. 내 영혼체는 자네 실력으로도 충분히 죽일 수 있으니까 말이야.”
천화존자가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들고 있던 구름불꽃을 건네자, 구름 불꽃은 다시 순한 양처럼 이준에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