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8화. 부름
묵직한 철문이 열리자, 철커덕 소리와 함께 살갗이 타들어갈 것만 같은 뜨거운 바람이 새어 나왔다.
“여기만 해도 이렇게 열기가 엄청난데, 정말 이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냐?”
서천우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지만, 이준은 두 팔을 벌린 채 그 열기를 즐기고 있었다.
“걱정마세요. 제가 원하던 게 딱 이런 거였어요. 천지의 불꽃으로 몸을 보호하면 이 안에 뛰어들어서 헤엄을 쳐도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대단한 녀석.”
서천우는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천천히 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탑의 아래층에서는 은은한 붉은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빛이 새어 나오는 곳은 삼 미터 정도 크기의 깊은 동굴이었다. 붉은 빛이 동굴에서 쏟아지며 어둠을 밀어냈다.
탑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동굴에 가까워질수록 주위의 공기가 점점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침내 동굴 입구에 도착하자, 타는 듯한 열기에 숨을 쉬는 것 마저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서천우는 본래 불 속성의 염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으니 제 아무리 투종이라 해도 이런 열기를 버티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이었다.
반면 이준은 동굴 입구에서 깊은 숨을 들이쉬며 그 속에 가득한 불의 에너지를 느끼고 있었다. 착각인지는 몰라도 그의 몸속에 잠들어 있는 구름 불꽃이 춤을 추듯 불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직 용암세계와는 거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강력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네가 그리 자신 있다니 나도 더 이상 말리지 않으마. 중주로 떠나려면 아직 시간이 있으니, 그 때까지 마음껏 수련하다 나오거라. 네가 수련하는 동안 네 둘째 형과 아라는 내가 잘 대접하고 있을 테니 걱정 말고. 그리고 불 속성 공법을 다루는 장로 몇 명을 데려다 놓을 테니 문제가 생기면 즉시 얘기하거라.”
어린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이준의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는지, 서천우의 입가에도 어느새 미소가 내려 앉아 있었다.
“대장로님, 감사합니다.”
“나한테 고마울 거 없어. 일단 내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 한 번 들어가 보거라.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내가 구하러 가마.”
이준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고는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동굴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막 동굴에 발을 디디는 순간, 이준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머나먼 아래쪽에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준의 몸은 계속해서 동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용암세계와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공기가 더욱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곧이어 은은한 청록색 화염이 그의 몸을 감싸며 외부의 뜨거운 공기를 차단했다. 이준은 아래쪽의 순도 높은 붉은색을 보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천지의 불꽃이 있으니 무슨 큰일이야 있겠냐만은, 사방에서 용암이 들끓는 곳이니만큼 긴장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무엇보다도, 아래쪽에서 흐릿하게 들려왔던 그 소리가 이준의 경계심을 자극했다.
그렇게 한참을 더 내려가자 갑자기 시야가 넓어지며 붉은 용암바다가 펼쳐졌다.
거대한 기포가 터질 때 마다 후끈한 열기와 함께 새하얀 연기가 퍼져나왔다. 그 연기에는 불의 독이 들어있어 인체에 흡수된다면 서서히 몸이 망가지게 되었다.
이준은 뼈 날개를 펼쳐 천천히 용암 세계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천계의 탑의 지하는 그가 떠날 때와 한 치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곳은 여전히 쥐 죽은 듯 고요했고, 조금의 생기도 존재하지 않았다. 소리라고는 용암이 들끓는 소리가 전부였고, 끈적한 용암이 출렁이는 것 외에는 어떠한 움직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특별히 이상하다 생각되는 곳이 없는 걸 확인한 이준은 날개를 펼쳐 절벽으로 이동했다.
적절한 장소를 찾아내자, 그는 곧바로 청록색 불꽃으로 감싼 검은 송곳을 휘둘러 절벽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이 곳에서 수련을 하는 동안은 절벽에 만들어 둔 그 작은 동굴이 그의 집이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무투기를 수련하기에 앞서 우선 정신을 집중하고 자리에 앉아 주위의 에너지를 흡수했다.
이준의 몸이 수련상태에 돌입하자, 격렬한 파동이 일어나며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의 선명한 붉은 에너지가 앞 다투어 그의 몸 속으로 들어갔다.
그 곳의 에너지는 이준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농밀하고, 순수하고, 또 거대했다. 다만 한 가지, 에너지 안에 난폭한 기운이 담겨 있어 그대로 흡수한다면 성격이 변해버릴 우려가 있었다.
“미리 준비 해놔서 다행이야…….”
이준은 홀로 중얼거리며 씩 웃었고 손을 들어 청록색의 화염을 피워냈다.
곧이어 이준은 다른 한쪽 손을 튕겨 다양한 약재를 꺼내들었다. 전부 얼음 속성과 물 속성의 약재들이었다.
그는 몇 가지 얼음속성 약재를 불꽃 안으로 집어넣어 정련을 시작했다.
그는 이미 6레벨 연금술사가 되었으니, 평범한 연금비약 정도는 손바닥 위에서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마치 그의 스승처럼.
하지만 지금 이준은 연금비약이 아니라 그가 바깥으로 수련을 나갈 때 약로가 만들어 주었던 것 같은 수련 보조제를 만들 생각이었다. 이는 지금의 그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불과 10분 만에 제련이 끝났다.
이준이 손바닥을 뒤집자 옥병이 나타났다. 그는 옥병의 입구를 기울여 그 안에 들어있던 붉은 액체와 방금 만들어 낸 차가운 액체를 뒤섞었다.
두 액체를 섞은 뒤 그것을 청연의 불꽃으로 달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은은한 냉기를 내뿜은 액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준은 곧바로 옷을 벗고 그 액체를 온 몸에 바르기 시작했다.
곧이어 냉기가 그의 몸을 감싸며 용암이 뿜어내는 난폭한 기운을 차단해 주었다.
이준이 다시 수련상태에 들어가자, 주변의 뜨거운 불 속성 에너지가 마치 빨려 들어가듯 그의 몸으로 날아들었다.
몸속으로 들어온 에너지에 난폭한 기운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수련에 집중했다.
이 속도로 수련을 지속한다면 세 달 안에 6성 투황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곳을 선택한 자기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한 시간도 안 되서 체내 염력이 더욱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용암세계에서 꼬박 하루 동안 불 에너지를 흡수한 이준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검은 송곳을 꺼내들었다. 드디어 새로 얻은 무투기를 수련할 시간이 된 것이다.
처음 수련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육합자의 검은 상당한 수준의 상급 무투기였으니, 그는 크게 실망하지 않고 두루마리 속에서 보았던 검술을 하나하나 되짚어가며 수련을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몇 번인가 용암 속에 빠질 뻔 하기도 했지만, 며칠 정도 정신없이 수련에 매진하자, 어설프게나마 육합자가 사용하던 검술을 흉내낼 수 있게 되었다.
* * *
적막한 용암 세계 안에서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이준은 어림짐작으로 대충 열흘이 지났겠거니 생각하며 또 다시 수련에 집중했다.
그 사이 그는 5성 투황 단계에 안정적으로 들어섰을 뿐만 아니라 육합자의 검을 제법 그럴싸하게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고요한 적막 속에서 수련을 거듭하던 어느 날……. 또 다시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의 귓등을 때렸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또렷한 소리였다.
정신을 집중해 그 소리의 근원을 따라가던 이준은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자신의 뱃속에 있는 구름 불꽃이었다.
사방에 적막만이 가득한 용암 세계에 돌연 낮은 폭음이 울려 퍼지더니, 이내 시뻘건 용암이 크게 솟구쳤다가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붉은 색의 용암 바다에 풍랑을 일으킨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이준이었다.
그는 손에 들린 검을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떨어지는 용암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켜내고 있었다.
거대한 마그마 파도가 아래로 떨어질 때 마다 온 몸에 한기가 들었다. 저 뜨끈한 것을 몸에 뒤집어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미칠 듯한 열기를 내뿜는 용암 위에서는 등골이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순간, 팔뚝에서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팔 위에 용암이 튄 것이다. 그나마 몸 위에 발라 놓은 액체가 막고 있어 큰 부상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그게 아니었더라면 화상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팔뚝에서 느껴지는 통증보다 이준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은, 이번에도 육합자의 검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 했다는 사실이었다. 육합자의 검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용암 안에 뛰어들어도 한방울의 용암조차 몸에 튀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용암 안에 뛰어들기는커녕 그 위에서 수련을 하는데도 흘러내리는 용암을 전부 막아내지 못 하고 있으니 답답한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이제 수련을 시작한지 겨우 2주 정도가 지났으니, 그렇게까지 낙담할 이유는 없었다. 고작 2주 만에 2격 무투기를 완벽하게 익힐 수 있다면, 그게 더 신기한 일 이었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 하며 검은 송곳을 저장 반지 안에 넣은 뒤 수정처럼 반짝이는 날개를 펼쳐 동굴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위에서 대기하는 장로들에게 물어본 결과, 자신이 이곳에 들어온 지 보름이 지났다고 했다.
그 사이 그의 염력은 크게 상승해 어느새 6성 투황에 한발짝 가까워져 있었다. 게다가 불 속성 에너지의 순도가 높은 덕인지 본래 몸속에 있던 염력도 평소보다 훨씬 뜨거워진 것 같았다. 여기에 육합자의 검도 어느 정도 발전을 보이고 있으니, 과연 이곳에 들어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동안이나 검술 수련에 매진하니 온 몸 이곳저곳이 쑤셔오기 시작했다. 이에 이준은 곧바로 자리에 앉아 다시 염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육합자의 검을 연습한 뒤 수련 상태에 들어가면 더욱 빠른 속도로 불의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염력을 흡수하고, 무투기를 수련하기를 반복하는 내내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중주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 곳에서 목숨을 잃지 않고 버텨내려면 자는 시간마저 아까웠다.
또 한 가지, 연금술사의 탑에서 주최하는 연금술 경연에서 10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금술이라면 어디 내놓아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 그였지만, 이 정도 대회에 나가는 것을 쉽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별의 불꽃에는 그의 목숨은 물론이고 스승과 아버지의 목숨이 달려 있었으니 그 문제를 생각할 때 마다 무거운 중압감에 숨조차 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사치였다. 지금 그가 할 일은 단 하나, 미친 듯이 수련하고, 또 수련하는 것 뿐이었다.
그 후로도 이준은 가끔 위쪽으로 올라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확인하는 시간과 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무투기를 연습하고, 염력을 단련하는데 사용했다. 이 정도 속도라면 두 달 안에 6성 투황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사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외침 소리의 빈도가 점점 잦아졌다.
마치 용암 바다속에 잠들어 있는 무언가가 구름 불꽃을 자극하는 것만 같았다.
펑!
잠시 후, 거대한 마그마가 물결을 이루며 바닥으로 떨어지고, 커다란 소리가 정적을 깨며 지하 전체에 울려 퍼졌다.
용암 파도 안에서는 이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오묘한 그의 칼놀림을 따라 바람이 일며 그의 몸 위로 떨어지는 마그마를 튕겨냈다.
이준의 눈빛이 한 곳에 집중 되자, 돌연 검 끝이 멈춰서며 수 십개의 잔상이 생겨났다.
“열화!”
곧이어 몇 갈래의 거대한 불빛이 그의 검에서 교차되며 쏟아져 나와 굵직한 구름을 만들더니 그의 눈앞에 있던 마그마가 반으로 갈라졌다.
첨벙!
눈앞에서 요동치는 붉은 파도를 바라보던 이준의 얼굴 위에 흡족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불과 한 달 만에 육합자의 검을 익혀낸 것이다. 이는 본인도 예상치 못할만큼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그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동굴로 돌아가려던 찰나, 또 다시 동굴 안에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또렷한 목소리였다.
“저 아래에 대체 뭐가 있길래 구름불꽃이 이렇게나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거지?”
상황이 이쯤 되자, 아래쪽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기로 결심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