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7화. 수련 장소
청연의 불꽃으로 에너지를 담금질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집어삼킨 양이 양인만큼 꽤나 오랜 시간의 수련이 필요했다.
그렇게 30분가량 담금질을 하자, 몸속에서 난폭하게 뒤엉켜 있던 약효가 정련되어 순수한 에너지로 변해 온 몸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체내의 통증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느낀 이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텅텅 비어 버린 염력 회오리를 채울 차례였다. 상처를 회복하는 것은 지금 당장 어찌할 수 없는 일이지만, 염력 회오리가 오랫동안 비어 있게 되면 실력이 떨어지게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두 손을 가지런히 놓고 수련의 인을 만들자, 호흡이 안정 되며 몸 주위로 미세한 파동이 일어났다. 곧이어 천지의 에너지가 체내로 흡수된 뒤 청록색 화염을 지나 다시 그의 온 몸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텅 비어버린 염력 회오리를 채우는 데는 4시간 정도가 소요됐다. 염력이 모두 회복되자, 몸이 한결 가뿐해지고 정신도 또렷해진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수련을 마치고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방 안의 천지 에너지가 격렬히 파동을 일으키며 형형색색의 반점 형태를 띤 거대한 에너지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그의 만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승급의 징조였다.
그는 꽤나 오랜 시간 4성 투황에 머물러 있었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5성 투황이 될 수 있었지만, 그는 승급을 서두르지 않았다. 연금비약의 약효에 의지해 염력의 양을 늘리는 것은 간단했지만, 그렇게 해서는 염력의 순도나 염력 통제 능력이 떨어져 5성, 아니 그 이상으로 승급한다 해도 그에 걸맞는 실력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천천히 염력을 쌓아 실력을 올리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또 한 차례의 격렬한 전투를 통해 마침내 승급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이에 이준은 다시 정신을 집중해 점점 더 많은 천지의 에너지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담금질을 거쳐 티끌 한 점 없이 순수한 형태로 변한 에너지가 그의 온 몸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다시 수련에 몰두하기를 두 시간, 갑자기 방안에 정적이 내려 앉았다.
곧이어 그의 눈꺼풀이 열리며 새까만 눈동자에서 눈부신 빛이 새어나왔다.
몸을 일으켜 두 팔을 벌리자, 온 몸의 뼈가 맞춰지며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준은 가볍게 주먹을 휘둘러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이번 승급으로 인해 실력이 향상됐을 뿐 아니라, 몸속의 상처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된 듯 했다.
기분이 좋아진 이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살짝 입을 벌려 이번에 흡수한 새로운 불꽃을 뱉어냈다.
이 회색의 불꽃을 정련해 흡수한다면 실력을 키우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지만, 네 개의 불꽃을 융합시킨 화련은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강자들이 우글거리는 중주로 향해야 하는 시점에 이런 강력한 무투기를 포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련을 할 것인가? 아니면 놔뒀다가 쓸 것인가?
그는 이 문제를 가지고 한참동안 골머리를 앓았다.
* * *
방 안에서는 뜨거운 회색 불꽃이 이글거리며 열기를 방출하고 있었다.
몇 시간이나 고민에 빠져있던 이준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손을 휘둘러 회색 불꽃을 다시 집어삼켰다.
중주는 투기 대륙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들이 모여있는 곳 이었고, 무시무시한 실력을 가진 투사들이 사막의 모래알만큼이나 지천에 널려있는 곳 이었다. 어줍잖은 실력으로는 일주일도 버티지 못 하고 목숨을 잃는 곳이 바로 중주였다.
물론 이준은 5성 투황이니, 어느 곳에 가더라도 실력을 인정받을만한 강자였다. 단 한 곳, 중주만을 빼놓고. 중주에서는 발에 채이는 것이 투황이었으니, 만일에 사태에 대비해 네 개의 불꽃을 융합한 화련이 필요했다.
마로와의 싸움에서 이 새로운 화련이 7성 투종에게도 치명상을 가할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으니, 그 이하의 강자를 만나 위기에 처했을 때는 악마의 불꽃을 사용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는 악마의 불꽃 속에 담긴 염력이 흩어지지 않도록 천지의 불꽃으로 잘 감싼 뒤 그것을 다시 자신의 몸속에 보관했다. 이 방법 외에는 그 어떤 방식으로도 그 안에 담긴 염력이 흩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불꽃을 흡수해 단숨에 실력을 올리는 것을 포기했으니, 이제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수련 속도를 올리느냐 하는 문제였다.
본원 주위에는 깊은 산과 오래된 숲이 가득했으니, 외지고 조용한 곳은 꽤 많았다. 그러나 이런 곳은 다양한 속성의 에너지가 복잡하게 얽혀있어 그가 원하는 순수한 불속성의 에너지를 흡수하기에는 모자란 감이 있었다.
인상을 쓴 채로 한참을 고민해 보았지만, 딱히 마땅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생각을 마친 그는 손을 펼쳐 두루마리를 하나를 손바닥 위로 소환했다. 그가 실력을 끌어 올릴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염력 자체를 성장시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강력한 무투기를 수련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은 이미 물 건너갔으니,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때마침 지금 그의 손에는 2격 무투기인 ‘육합자의 검’이 들려 있었다. 흑황성의 경매에서 이찬이 거금을 들여 구매했던 바로 그 검술 무투기였다.
‘육합자의 검’은 먼 옛날 투기 대륙을 호령했던 투존 ‘육합자’가 만든 무투기로, 지금까지 이준이 사용해오던 유일한 검술 무투기인 ‘태양검’보다 훨씬 더 대단한 위력을 가진 무투기였다.
그의 손에 들린 두루마리는 전체적으로 붉은 빛을 띠고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빨간 수정처럼 보였다.
영혼의 힘을 끌어내 두루마리를 펼치자, 은은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며 눈앞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곧이어 그의 눈앞에 붉디붉은 용암 바다가 펼쳐졌다. 기포가 터질 때마다 뜨거운 열기가 하늘 위로 치솟았다. 두루마리 안에는 육합존자가 무투기를 사용할 때의 감각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다른 사람은 주인이 남겨 놓은 이 감각을 바탕으로 보다 손쉽게 기술을 계승 받을 수 있었다.
이준의 영혼이 두루마리 안으로 흘러 들어가자, 용암 위에 노란색의 흐릿한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그림자의 손에는 새빨간 철검이 들려 있었다.
그 새빨간 철검은 이준의 검은 송곳처럼 두툼하거나 거대하지는 않았지만, 날렵하고 날카로운 기운을 사방으로 뿜어대고 있었다.
노란색의 희미한 그림자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발을 구르며 거대한 에너지를 폭발시켜 마그마를 하늘 위까지 솟구치도록 만들었다.
노란 형상의 동작은 생각보다 빠르지 않았지만, 웅장한 힘과 장쾌한 기세로 가득했다. 검법은 시작과 끝이 마치 하나처럼 이어져 있어 모든 동작이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었고, 검을 휘두를 때 마다 시뻘건 용암이 파도처럼 일렁이며 춤을 췄다.
그 그림자는 염력이 아니라 오로지 검술만으로 바람을 불러일으켰고, 그 바람을 통해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이준이 홀린 듯이 그림자가 펼치는 검술을 바라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이 무투기의 창시자로 알려진 ‘육합존자’의 목소리인 듯 싶었다.
「육합자의 검은 공수일체의 검술이다.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할 수 있다. 검법은 분열, 잠식, 합일. 총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수련시에는 용암을 찾아 파도를 일으켜야 하며, 염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용암에서 몸을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진정한 공수일체의 경지에 이른다면 비슷한 수준에서는 감히 그 적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준은 재빨리 정신을 집중해 검법과 관련된 내용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새겨들었다.
노란 형상은 수백 번에 걸쳐 검을 움직였고, 이준은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육합존자가 남긴 검술의 흔적을 좇았다.
두루마리 안에 남겨진 모든 기록을 하나도 빠짐없이 살핀 이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뜬 뒤 조심스럽게 다시 그 붉은 두루마리를 저장반지 안에 집어넣었다.
“떠나기 전에 육합자의 검을 잘 수련해 놔야겠군. 그런데 용암을 어디에서 찾지?”
진지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에 잠겨있던 이준의 머릿속에 번뜩 한 장소가 떠올랐다.
자신이 2년간 잠들어 있던 지하 세계. 천계의 탑의 지하, 구름 불꽃이 봉인되어 있던 그 곳! 그 곳이라면 용암이 있을 뿐 아니라 순수한 불 속성 에너지가 가득했다.
“천계의 탑 지하로 들어가겠다고?”
서재에서 책을 정리하고 있던 서천우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봤다. 헛것이라도 들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지하 세계는 서천우도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그 곳은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죽음의 땅이었다. 용암이 제 멋대로 흘러내리고, 곳곳에서 통제할 수 없는 에너지가 폭발했다. 그런 곳을 제 발로 걸어 들어가겠다니. 도통 무슨 생각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서천우의 표정에 이준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거기서 잠깐 지낸 적이 있었어요. 거기가 어떤 곳인지도 어느 정도 알고요. 난폭하긴 해도 불 속성 에너지가 가득한 것으로 치자면 그만한 곳이 없죠. 그래도 거긴 구름불꽃이 탄생한 곳이고, 지금은 제가 그 불꽃의 주인이니 목숨을 잃거나 하지는 않을 거예요.”
서천우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한쪽에 치운 뒤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 하니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곧바로 돌아와 얘기 하거라. 본원의 장로들을 입구에 배치해 놓을 테니까.”
“고맙습니다, 대장로님.”
“어휴, 이 녀석. 한시도 편히 쉬질 못하는구나. 따라 오거라.”
서천우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키자, 이준이 싱글 벙글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 * *
수년이 지나 다시 천계의 탑에 들어가게 되자, 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처음 이 곳에 발을 들였을 때는 본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햇병아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무려 5성 투황에 이른 상태였고, 흑각성 내에는 그와 비슷한 전투력을 가진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물론 중주에 가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실력이었지만, 이 안에서 얼마나 발전하느냐에 따라 또 다시 새로운 경지에 오를 수 있을거란 기대감이 들었다.
현재 천계의 탑은 구름불꽃이 고갈되어 예전과는 달리 많은 사람이 들락거리고 있지 않았다. 물론 구름 불꽃이 없다 하더라도 천계의 탑 내부에는 순수한 불 속성의 에너지가 제법 많았기 때문에, 불 속성의 염력을 가진 학생들은 여전히 이 곳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다. 또, 조용한 분위기에서 수련을 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 역시 여전히 이곳을 찾고 있었다.
서천우와 이준은 1층에 머무르지 않고 곧바로 탑의 가장 아래로 내려갔다. 가는 길에 마주친 학생들은 두 사람을 보자마자 황급히 예를 갖추며 반짝 반짝 눈을 빛냈다.
그렇게 10분 정도를 걸어가자, 천계의 탑 최하층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전에는 구름불꽃이 폭발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인지 지하를 향하는 대문은 언제나 단단히 잠겨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까지 삼엄하게 출입을 통제하지는 않고 있었다.
“구름불꽃이 없어져 불편한 점도 생겼지만 관리자로써 안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구나. 예전에는 그 녀석이 언제 폭발할지 몰라 하루 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으니까.”
서천우가 철문의 자물쇠를 열며 말했다. 구름 불꽃을 가져간 것에 대해 너무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뜻 이었다.
“마음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반드시 천계의 탑에 메마르지 않는 불꽃을 피워 드리겠습니다. 예전의 구름불꽃과 달리 안전한 것으로요.”
“하하. 그래주면 좋지.”
이준의 말에 서천우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