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2화. 마로
한편, 외부의 떠들썩한 분위기와 정반대로 이준을 비롯한 사람들은 차분히 상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6,7 성 투종은 두려운 존재였지만, 이준에게는 스승이 남긴 불꽃을 포함해 총 세 개의 천지의 불꽃이 있었으니 여차하면 목숨을 걸고 세 개의 불꽃을 융합한 화련을 통해 마로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생각이었다.
이에 이준은 크게 걱정하지 않은 채 수련에 전념하다가 종종 비석의 후배 연금술사들에게 연금술을 가르치거나 약재 창고를 들락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천계의 탑에 불꽃을 보충하는 일은 뒤로 조금 미뤄 두었다. 큰 전쟁을 앞두고 있어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 * *
널찍한 광장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광장 안에 빛이 번쩍이며 강력한 염력이 충돌할 때마다 주변에서는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준과 아라, 보람을 비롯한 몇 몇 장로들은 높은 좌석에 앉아 학생들의 대련을 지켜보았다.
이는 이준이 아카데미에 있을 때는 없던 행사로, 아카데미 측에서 주최한 행사가 아니라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문화였다.
최근 이준이 비석 내에서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는 소문에 많은 학생들이 그에게 심판을 봐주기를 요구했고, 이에 이준은 엉겁결에 심판을 맡고 말았다. 연금술 대회와 순위 쟁탈전을 비롯해 여러 가지 대회에 참가해 본적은 있었지만, 누군가를 평가하는 자리에 앉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그 역시 흥미진진하게 경기를 지켜봤다.
그리고 첫 번째 대결의 승자가 막 가려지려는 순간, 멀리 동쪽 하늘에서 이제껏 느껴보지 못 했던 무시무시한 기운이 퍼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 녀석들이 왔어…….”
옆에 있던 아라의 얼굴에도 심각한 표정이 드러났다.
곧이어 공중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천둥처럼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가람 아카데미의 핏덩이들아! 어르신이 찾아 왔는데 어서 맞이하지 않고 뭘 하는 게냐? 장천수 놈에게 뭘 배운 거야?”
머리가 울릴 정도로 커다란 소리에 이준은 눈을 가늘게 흘기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드디어 온 건가?”
노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머지않아 본원 곳곳에서 사람들이 튀어 나와 이준이 있던 광장의 상공에 도착했다. 날아온 사람들 중 가장 앞에 서있는 것은 바로 본원의 대장로인 서천우였다.
“마로 네 이놈!”
곧이어 검은 그림자들이 바람을 가르며 본원의 상공으로 날아왔다.
대략 스무명 정도의 마염곡 강자들 틈에는 이준의 원수인 한샘도 끼어 있었다.
가장 앞에 서 있는 것은 노란색 망토를 걸치고 있는 붉은 머리의 노인으로, 마치 뼈만 남은 듯 앙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의 두 눈동자는 기묘한 빛을 내뿜으며 반짝이고 있었고, 전신에서 끝을 모를 음침한 기운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노인의 소매가 움직이며 바람을 일으킬 때마다 주변의 공간에 미세한 파동이 일어났다. 파동은 아주 작았지만, 이준은 그 파동 주위로 퍼져나가는 끝을 모를 염력을 느낄 수 있었다. 메두사와 아라 조차 능가하는 그 무시무시한 염력으로 보아, 그 노인이 바로 마로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마로를 비롯한 마염곡의 흉악한 기운을 가진 사람 무리가 나타나자마자 본원의 하늘 위에는 웅장한 염력이 넘실댔고, 이에 본원의 학생들은 겁에 질린채 장로들을 바라봤다.
“오랜만이군. 실력이 더 강해졌을 줄이야.”
“서천우?”
서천우를 보자마자 마로의 얼굴에는 상대를 비웃는 듯한 웃음이 걸렸다.
“너 따위가 투종이 될 줄이야.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오늘 내가 여기까지 친히 행차한 이유는 네놈도 알겠지? 당장 이준이라는 놈을 데리고 와라.”
“그 쪽 세 사람이 먼저 이준을 공격했는데, 그럼 가만히 서서 죽으란 말인가?”
“흥, 그딴 건 내가 알바가 아니다. 어쨌든 확실한 건 그 자식이 우리 마염곡의 세 장로를 죽였다는 사실이지! 설마 마염곡의 장로를 셋이나 죽이고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말을 마친 마로는 본원 곳곳을 한번 슥 훑어보더니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네 놈 따위와 말을 섞고 싶지 않다. 당장 장천수를 불러와.”
마로의 말에 서천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아주 사람을 우습게 아는군. 원장님이 아카데미에 계셨다면 네 녀석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흥, 헛소리! 내가 아직도 장천수를 두려워 할 줄 아나? 어서 이준이라는 핏덩이를 내게 넘겨라!”
“하하, 마염곡의 곡주께서 제 이름을 다 기억해주시다니, 이거 영광이군요.”
그 순간, 청록색 날개를 펼친 청년 하나가 서천우의 곁으로 날아오며 말했다. 이준 뒤로는 아라와 보람이 바짝 따라 붙었어 있었다.
“네가 이준이냐?”
이준을 바라보는 마로의 시선에서는 섬뜩할 정도의 한기가 느껴졌다.
“아아, 마로님, 저 친구가 바로 이준입니다. 방언을 비롯한 마염곡의 장로 세 분이 바로 저 녀석에 의해 죽었습니다. 게다가 보리수의 점액도 저 녀석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준이 입을 떼기도 전에 마로의 곁에 있던 한샘이 히죽대며 말했다.
이에 마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한 번 이준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제 발로 걸어올 테냐, 아니면 내가 직접 사지를 잘라 끌고 가주기를 기다릴 테냐?”
“여기는 아카데미 본원이지 마염곡이 아니다! 멋대로 굴려 하거든 장소를 봐 가면서 해야지! 더 이상 우리 가람 아카데미를 모욕한다면 오늘 목숨을 걸고 네 놈을 없애버리고 말겠다.”
서천우의 호통 소리에 분위기가 더욱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큭큭. 역시 본원의 대장로다운 위엄이야. 하지만 그만한 실력은 갖추고 큰 소리를 치는 것이냐? 좋다. 오늘 내가 마염곡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마.”
말을 마치기 무섭게 마로의 손가락이 춤을 추더니 다섯 갈래의 염력이 이준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 순간, 새하얀 그림자 하나가 번개처럼 날아들어 마로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회색의 염력을 박살냈다.
“괜찮아?”
“괜찮아. 그런데 조심해야겠어. 6성이나 7성 투종이라더니, 그 말이 사실인 것 같아. 지금 네 실력으로 저 자의 공격을 맞으면 한방에 끝날지도 몰라.”
마로의 염력을 막아낸 아라의 얼굴은 전에 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메두사나 전필환과 목숨을 걸고 싸울 때보다도 훨씬 더 긴장한 표정이었다.
“응?”
자신의 공격이 너무나 손쉽게 막혀버리자, 마로의 눈빛이 더욱 더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 나이에 투종이라니. 놀랍군.”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투종의 경지에 이른 상대의 모습이 마로의 오래된 열등감을 자극했다. 그 역시 재능이 없는 자는 아니었지만, 장천수나 이미 흑각성을 떠난 자기 세대의 다른 강자들 중에서는 그가 가장 실력이 떨어지는 편이었고, 그와 동시대의 강자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의 뒤를 쫓기에도 급급했기 때문이다. 헌데 그가 질투해 마지않는 장천수보다도 더 어린 나이에 투종의 경지에 도달한 아라를 보니 새삼스레 꾹꾹 눌러두었던 열등감이 고개를 들고 만 것이다.
“마로님, 서천우는 제가 맡을 테니 이준과 저 하얀 옷을 입은 계집은 마로님이 맡아주십시오.”
마로가 아라를 못 마땅해 하는 듯하자, 한샘이 곧바로 다가와 두 사람을 그에게 떠넘겼다. 서천우 역시 만만치 않은 강자였지만 이준과 아라 두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더 두려웠기 때문이다.
마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염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한편, 광장 아래쪽에 있는 학생들은 생전 처음 보는 투종 강자들의 힘에 완전히 넋을 잃은 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로가 내뿜는 섬뜩한 살기에 서천우의 표정도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무언가가 마로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모양이었다.
“조심하거라.”
이상할 정도로 전의를 불태우는 마로의 모습에 걱정스러운 마음이 든 서천우는 곧바로 이준에게 주의를 주었다. 투종 강자들의 1성차이는 투황의 1성과는 차원이 다른 차이를 가지고 있었으니, 아라와 이준이 힘을 합친다 해도 아차하는 순간에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장천수와의 옛정을 생각해 우리 마염곡의 장로들은 나서지 않도록 하지. 그리고 본원의 장로놈들과 학생들의 목숨도 건드리지 않겠다. 물론, 날 방해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이준이란 놈만은 죽여야겠다. 그리고 옆에 있는 저 하얀 옷을 입은 계집애도 말이야.”
마로의 속셈은 뻔했다. 만일 그가 마염곡의 장로들을 몰고와 본원의 장로와 학생들을 해하고 아카데미를 쑥밭으로 만들었다는 소식이 장천수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가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 마염곡의 씨를 말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유야 뭐가 됐든, 서천우와 이준의 입장에서는 마염곡의 장로들이 끼어들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 이었다.
말을 마친 마로는 그대로 허공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며 손을 들어 이준을 가리켰다.
“네 녀석은 투황이지만 어줍잖은 투종 강자도 두려워할만한 실력을 가졌다지? 자, 저 계집과 함께 덤벼 보거라. 새빨간 핏덩이를 상대로 손을 썼다는 말을 듣는 것도 창피한 일이니 투종이라도 하나 끼어있어야 내가 덜 민망하지 않겠느냐.”
그의 말투는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흑각성 안에 그와 견줄만한 강자는 없었으니, 그 오만함이 근거 없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정말로 이준을 죽이려는 듯한 마로의 눈빛에 서천우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의 앞에는 한샘이 서 있었으니 섣불리 이준을 도우러 가기도 어려웠다.
“한샘, 원장님이 돌아오시면 아주 확실히 말씀드리마. 바로 네가 마로를 끌고 와 가람 아카데미를 공격했다고 말이지. 구름 불꽃 때의 일도 있고 하니 곱게 넘어가기는 어려울 게다.”
서천우가 원장을 언급하자, 한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 아무리 간이 배 밖에 나온 한샘이라 해도 투존이 두렵지 않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이준을 죽이고 투기 대륙의 구석진 곳으로 달아나 숨어버린다면 제 아무리 투존이라 한들 자신을 어떻게 찾아내겠는가?
“서천우 대장로. 미안한데 장천수 원장이 정말 살아있기나 한 건가? 내가 구름 불꽃을 얻기 위해 이 곳에 쳐들어 왔을 때도 보이지 않던 작자의 이름을 꺼내면 내가 두려워서 달아나기라도 할 줄 알았던 모양이지? 아니면 실력에 자신이 없으니 자꾸만 원장의 이름을 언급 하는 거야?”
한샘의 모욕적인 언사에 서천우의 뒤에 있던 본원 장로들의 눈이 살기로 빛났다.
“일을 크게 벌려서 괜히 학생들까지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 마염곡의 강자들은 언제든지 준비 돼있으니까.”
본원 장로들이 금방이라도 자신에게 달려들듯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한샘이 피식 웃으며 장로들에게 경고를 보냈다.
이에 서천우는 손을 들어 난폭해진 본원 장로들을 진정 시켰다.
“내 쪽은 신경 쓰지 말고 이준 쪽을 지켜보게. 가급적이면 끼어들지 말되, 정말로 마로가 그 아이를 죽이려거든 즉시 가서 그를 도와.”
“네!”
대장로의 단호한 말투에 잠시 망설이던 장로들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역시 서천우 대장로야. 상황 파악이 아주 빠르군.”
장로들에게 명을 내린 서천우는 곧바로 한샘에게 다가서며 염력을 끌어올렸다.
“닥쳐라 잡놈. 너 따위를 쳐 죽이기 위해 장로들의 힘을 빌었다는 소문이 나면 망신살이 뻗칠까 두려워 장로들을 물린 것뿐이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발밑에서 염력이 폭발했다.
온 천지를 뒤덮을 것 마냥 넘실거리는 거대한 에너지에 한샘의 얼굴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하지만 투존의 육신을 손에 넣은 그의 힘 역시 만만치 않았다.
“흥. 좋아. 어디 그 잘난 투종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보자고.”
한샘이 가볍게 팔을 휘두르자, 서천우 못지않은 염력이 폭발하며 서천우의 염력과 팽팽하게 맞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