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1화. 난폭한 뼈날개
이준은 거대한 날개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은 채 계속해서 불꽃의 온도를 끌어 올렸다. 온도가 올라갈수록 육안으로는 보기 어려운 미세한 회색 에너지가 계속해서 새어 나왔다.
“휴……. 마수의 에너지가 생각보다 많이 남아있었군. 청연의 불꽃이 아니었다면 제련하는 데만도 며칠은 걸렸겠는 걸…….”
그렇게 한 시간 이상 날개를 태워내자, 마침내 날개에서 아무런 것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이제야 숨어있던 모든 에너지가 빠져 나온 것이다.
그러나 회색 에너지가 모두 사라졌다고 제련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두 시간 정도를 더 가열하니 마침내 매끈하고 투명한 옥색 날개에 끈적한 액체가 맺히기 시작했다.
첫 번째 물방울이 떨어진지 대략 30분이 지나자, 어느새 바닥에는 옥색의 작은 물웅덩이가 생겨나 있었다. 날개의 크기는 이미 반으로 줄어들었다.
이준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인을 바꾸며 불꽃의 온도를 조절해 나갔다.
퐁당…….
마침내 맑은 액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방 전체에 울려 퍼졌고, 불꽃 속에 는 마수의 날개 대신 끈적한 비취색의 액체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준은 신중한 표정으로 저장 반지에서 은색의 뼈 열 개를 꺼내 불덩이 안으로 집어던졌고, 청록색의 화염에 의해 순식간에 재로 변한 뼈 조각이 액체 위로 떨어졌다.
그가 꺼내든 은색 뼈 조각은 번개속성 마수의 것으로, 그 안에는 아직 번개 속성의 에너지가 남아 있었다.
뼈 조각 다음은 깃털과 다른 마수의 뼈 조각, 그리고 다른 비행 마수의 날개였다. 물건의 형태는 다양했지만, 모두 강렬한 에너지를 품고 있는 것들이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 던져진 각양각색의 재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끈적한 액체로 변해 비취색의 웅덩이 안으로 섞여 들었다. 하나하나 재료가 더해지자, 비취색의 액체에서는 점점 더 영롱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액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지켜보던 이준은 천천히 불꽃의 온도를 낮추며 눈을 감았다. 이제부터 필요한 것은 인내였다.
* * *
불꽃의 온도를 낮추고 액체를 끓이기를 이틀, 마침내 끈적한 액체가 걸쭉하게 변하며 말랑말랑한 고체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영혼의 힘을 끌어내 그것을 불꽃 안으로 던져 넣었다. 이준의 영혼의 힘이 흘러 들어가는 순간, 옥색 액체가 갑자기 생명력을 얻은 것처럼 요동쳤다.
또 다시 30분 가량이 지나자, 거대한 날개 한 쌍이 모습을 드러냈다. 뼈로 만들어진 그 거대한 날개에는 작고 가는 은색 가시가 돋아나 있었고, 은은한 은빛 섬광이 주위를 떠돌고 있었다. 날개의 다른 부위에는 다양한 색깔로 기묘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마침내 완성에 가까워진 날개의 모습을 보며 이준은 다시 한 번 정신을 집중해 불꽃의 온도를 끌어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꽃이 잦아들고, 손바닥 크기의 작은 날개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준은 곧바로 중지를 깨물어 피를 낸 뒤, 그것을 손바닥만 한 날개 위에 떨어뜨렸다.
핏방울이 떨어지자, 뼈 날개가 강렬한 빛을 내뿜으며 이준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순간 어깨가 타들어갈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오랜 고생 끝에 만들어 낸 보물이 자신의 몸속에 자리 잡은 것을 확인한 이준은 곧바로 새롭게 얻은 날개를 펼쳐보았다.
다음 순간, ‘촤륵’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보라색의 날개 하나가 그의 등 뒤에서 솟아나며 은은한 바람이 퍼져 나왔다.
뼈 날개를 가볍게 흔들자, 방안에 미세한 번개가 내리치며 바람이 불어왔다. 날개에서는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중주에서 자신의 목숨을 보존해 줄 새로운 날개를 만드는데 성공한 이준은 가볍게 숨을 내쉰 뒤 날개를 접고 천천히 방문을 나섰다.
근 삼일 만에 보는 햇빛에 눈이 적응하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드디어 나왔네…….”
이준이 문을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 새하얀 옷을 입은 백발의 여인 하나가 그에게 다가오며 생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본원은 좀 적응 됐어?”
“응. 이런 분위기는 거의 처음이야. 너무 좋아.”
아라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슬픔이 묻어나고 있었다. 재난독체로 인해 원치 않는 고독과 함께 해야 했던 그녀였으니, 생기가 넘치는 아카데미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마음 한 곳이 아려왔다.
“몸은 좀 어때?”
“나쁘지 않아. 하지만 이제 길어야 일 년 일 것 같아. 그 때까지 재난독체를 다스리는데 성공하지 못 한다면…….”
“일 년이라…….”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걱정 마. 보리수의 점액은 구했잖아. 이제 7레벨 마수의 마정핵만 있으면 돼. 그 귀한 보리수의 점액도 구했는데 마정핵 하나 못 구하겠어?”
“응……. 믿을게.”
애써 자신을 위로하려는 듯 밝은 표정을 지어보이는 이준의 모습에 아라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 맞다. 대장로님이 회의실로 찾아오라고 하셨어. 어떻게 하면 천계의 탑 문제를 해결할지 고민하고 계신 것 같더라고.”
“그래, 같이 가자.”
대장로가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에 이준은 곧장 아라를 데리고 회의실로 향했다.
* * *
철컥…….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이준과 아라가 모습을 드러내자, 이야기를 나누던 몇몇 장로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로 그들을 맞이했다.
“하하. 드디어 왔구나. 숙소에 틀어박혀 뭔가 만드는 모양이던데, 만들던 물건은 잘 만들어졌느냐?”
“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천우의 말에 이준은 민망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은 뒤 아라와 함께 회의실 한켠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럼 이제 불꽃을 채우러 가볼까요? 바로 가면 될까요? 아니면 뭔가 다른 계획이 있으신가요?”
“서두를 것 없다.”
서천우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불꽃을 채워 넣더라도, 길어야 2년이면 다시 돌아와야 할 텐데 그래서야 지금까지와 다를 바가 없지 않겠느냐. 너도 네 일이 있는데 매번 불꽃을 채우러 이 먼 곳까지 오라고 할 수는 없지.”
“뭔가 좋은 방법이 있으신 건가요?”
“방법은 있지. 다만 네가 고생을 좀 해줘야 할 것 같구나.”
대장로가 곧바로 투명한 유리로 만든 기묘한 공예품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이건 가람 아카데미의 한 어르신이 만든 ‘불꽃 주전자’라는 물건이지. 네가 구름불꽃의 일부를 안에 주입하고 염력을 채워 넣으면 활성화 시킬 수 있단다. 게다가 계속해서 불꽃을 만들어낼 수 있지. 그것만으로도 구름불꽃 본체만큼의 위력이 있을 게다.”
서천우의 설명에 이준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그 유리로 만든 물건을 바라보았다. 기다란 유리관이 붙어 있다는 것 외에는 딱히 주전자라고 부를만한 모양새를 하고 있지는 않았다. 왜 ‘주전자’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구름불꽃의 일부를 떼 내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상처를 입게 될게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야 회복할 수 있지…….”
“원래 제가 본원의 보물인 구름불꽃을 가져가는 바람에 생긴 문제인데,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이준이 시원스럽게 답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서천우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져갔다.
“하하. 보물이 주인을 알아본 거겠지. 본원에서는 그저 구름 불꽃을 봉인해 두었을 뿐, 제대로 쓰지는 못하고 있었으니까. 가져간 것도 네 능력이지. 그러니 너무 죄책감가질 거 없다. 네가 아니었으면 언젠가 구름 불꽃이 날뛰어 아카데미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서천우는 ‘불꽃 주전자’를 이준에게 건넸다.
“이 물건은 일단 네가 갖고 있거라. 여유가 된다면 불꽃을 넣어봐도 좋고.아직 그리 급하지 않으니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이에 이준은 곧바로 불꽃 주전자를 건네받아 자신의 저장 반지 안에 넣어 두었다. 일단 천계의 탑에 대한 일을 해결해야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수련에 몰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남은 시간 동안 네 친구를 데리고 본원을 좀 돌아보거라.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얘기하고.”
말을 마친 서천우가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이자, 아라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올랐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서천우는 아라를 가람 아카데미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제법 견문이 넓다고 자부하는 그였지만, 이토록 젊은 투종 강자를 보는 것은 그에게도 처음 있는 일 이었다. 만일 그녀를 아카데미의 장로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흑각성의 어떤 세력이라 해도 감히 아카데미를 넘보지 못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중요한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회의실의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본원의 많은 장로들은 이준과 구면이었으니 서로 근황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삼십 분 가량을 웃고 떠든 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찰나, 갑자기 문이 열리며 굳은 표정을 한 이찬이 황급히 회의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심상치 않은 이찬의 표정에 자리에 있던 장로들의 얼굴도 덩달아 어둡게 내려 앉았다.
“무슨 일인가?”
“마염곡 놈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샘 그 자가 마로를 불러낸 것 같습니다.”
웃음 소리로 가득했던 회의실 안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서천우 대장로였다.
“우리가 마염곡의 장로를 셋이나 죽였으니 언젠가는 벌어질 일 이었다. 다만 이렇게 빨리 마로가 나서리라고는 예상하지 못 했군…….”
“대장로님, 그 자가 설마 아카데미까지 밀고 들어올까요?”
장로 중 한 사람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염곡과 우리 아카데미는 애초에 물과 기름이었으니 이번 일을 구실삼아 결판을 내려 들겠지. 원장님이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면 감히 이곳으로 향할 생각조차 하지 못 했겠지만, 지금은 원장님도 없으니까.”
장로 중 한 명이 입을 열자, 서천우 역시 이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흥. 원장님이 계실 때는 거북이마냥 머리를 집어넣고 숨어있더니, 비겁한 놈들.”
장로 한 명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지금부터 가람 아카데미는 비상경계 상태에 들어간다. 이찬, 조직을 구성해 마염곡을 주시하고, 그 쪽에서 조금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이 보인다면 곧장 알려주게.”
“알겠습니다.”
마로가 나섰다는 소식에 이씨 가문과 아카데미는 곧바로 손을 잡아 마염곡에 대항하기로 결의했다. 가람 아카데미가 무너지면 이씨 가문이 무너지는 것 역시 시간문제였기 때문이다.
말을 마친 서천우는 곧바로 이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준아, 당분간 본원에 머물러 줄 수 있겠느냐? 너와 네 친구 분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구나.”
“당연하지요 대장로님. 이게 모두 보리수의 점액 때문에 생긴 일이니 목숨을 걸고 마염곡 놈들을 막아내겠습니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 전쟁이다.”
노인의 얼굴에는 분노와 살기가 가득했다. 이미 많은 학생들이 마염곡에 의해 목숨을 잃었으니, 그 역시 진작부터 마염곡을 박살내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서천우의 싸늘한 표정에 모두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이토록 살기를 풍기는 대장로의 모습은 오랜 시간 아카데미를 지켜온 장로들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 * *
그 이후로 본원의 방어는 눈에 띄게 강화 되었다. 심지어 학생들의 출입도 엄격히 제한했으며, 본원의 많은 학생들도 살기등등한 장로들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방어를 강화하면서 집행부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그들은 외원과 아카데미 주변 지역을 돌며 촘촘한 방어선을 구축했고, 그 방어선에 가까이 다가오는 자들이라면 그 자가 누구이든지 가리지 않고 공격했다.
가람 아카데미의 이러한 움직임에 흑각성의 다른 세력들 역시 무언가 큰 일이 벌어졌음을 알아차렸다. 가람 아카데미와 흑각성의 세력들은 어지간하면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고, 간혹 충돌을 일으킨다 해도 아카데미 측에서 이렇게까지 살벌하게 대응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일부 소문에 밝은 자들에 의해 보리수의 점액으로 인해 마염곡과 가람 아카데미가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며 흑각성의 모든 이목이 그들에게로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