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9화. 구룡의 불꽃
이준의 ‘천계의 불꽃’은 본래 불의 협곡의 비술이었으니, 낯선 이름은 아니었다. 그리고 스승의 말에 따르면, 불의 협곡에서는 비밀스런 방식으로 천지의 불꽃을 계승해오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대대로 구룡의 불꽃이라는 화염을 가지고 있지. 내가 알기로는 구름불꽃보다 순위가 높은 12위의 불꽃이라고 들었다.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는 몰라도, 구름 불꽃보다 강한 것만은 확실하지.”
불의 협곡이 이화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약로에게 들은 적이 있지만, 이렇게 자세한 정보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런 막강한 세력에게서 천지의 불꽃을 얻어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 같았다.
이준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노인의 입가에는 또 다시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이 정도가 내가 아는 전부란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천지의 불꽃을 얻어내기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이 없을게야.”
구룡 불꽃은 불의 협곡의 생명줄이나 다름없었으니, 순순히 불꽃을 내놓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스승과 아버지의 생명이 걸린 상황에서 그런 것을 따질 수는 없었다.
바로 그 때, 맑은 목소리 하나가 두 사람의 귓등을 때렸다.
“구룡의 불꽃은 천지의 불꽃이기는 하지만, 오랜 세월 불의 협곡에 의해 길들여져 있어요. 그래서 그 불꽃에는 불의 협곡의 각인이 새겨져 있죠. 불의 협곡의 비술을 익힌 자가 아니라면 가져가도 사용할 수 없어요.”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이준과 서천우 모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눈앞에 서있는 것은 하늘색 옷을 입은 여자아이였다.
상대의 모습을 확인한 이준은 곧바로 번개처럼 몸을 날려 그녀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그의 눈에는 짙은 살기가 배어 있었다.
“어떻게 네가 여기에 있지? 우리 대화를 엿들은 거야?”
서천우의 표정 역시 이준 못지않게 살벌했다. 장로원의 회의실은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들어서는 안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선화야! 이곳은 네가 함부로 드나들어도 되는 곳이 아니다!”
“대장로님, 아는 친구인가요?”
대장로의 반응에 선화의 목덜미를 잡고 있던 이준의 손에서 약간 힘이 풀렸다.
“그래. 내 오랜 친구의 손녀딸이지. 작년에 대뜸 이곳에 보내 놓고 길러 달라 부탁을 하더구나.”
상대가 다른 세력에서 보낸 첩자가 아님이 확실해지자, 이준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목을 놓아주었다.
“나랑 대장로님 눈을 피해 그렇게 오래 숨어 있던 걸 보니 뭔가 특별한 연금비약을 복용한 것 같은데, 무슨 의도로 그런 짓을 한 거지?”
하지만 이준의 눈빛은 여전히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엿들은 건 맞지만, 도와주려던 사람에게 너무 한거 아니에요? 구룡의 불꽃을 훔치려 했다가는 불꽃도 손에 넣지 못 하고 괜히 감당 못할 세력을 적으로 돌리게 될 거라고요.”
“왜지?”
“휴……. 아까 말했잖아요! 구룡의 불꽃은 이미 수백 년 동안 불의 협곡의 것이었어요. ‘청화의 힘’이라는 비술을 쓸 줄 모르면 절대 그 불꽃을 길들일 수 없다고요. 길들이지도 못 할걸 훔쳐서 뭐할 건데요?”
“대장로님, 진짜 그런가요?”
이준의 물음에 서천우의 입가에 쓴 웃음이 번졌다.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구나. 하지만 이 아이의 말이라면 아마 사실일 게다. 그리고 투기대륙의 수많은 강자들이 그 불꽃을 노리고 있을 테니, 수 백 년 동안이나 그 불꽃을 빼앗기지 않고 지켜왔다면 뭔가 특별한 수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서천우의 대답에 이준의 마음이 돌덩이처럼 내려앉았다.
“선화는 투기대륙의 중주에 살았던 아이니 불의 협곡의 위치도 알고 있을 거다. 게다가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거짓말을 칠 아이는 아니야.”
이준이 여전히 선화의 말을 믿지 못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서천우가 한 마디를 더 보탰다.
“중주요?”
생소한 명칭이었다.
“중주는 대륙 중앙 지역을 부르는 이름이지. 땅은 넓고 수많은 세력이 복잡한 관계로 얽혀 있지. 특이한 가문도 여럿 볼 수 있어. 그야말로 투기대륙의 중심이라 할 수 있지. 대륙의 최고 강자들은 대부분 그 지역에서 나온단다.”
서천우는 웃으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네 여자 친구의 배경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다.”
서천우의 한 마디에 무겁게 내려앉았던 이준의 마음이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미소를 상상하자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은이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쳤다.
잠시 후, 멍하니 추억에 잠겨있던 이준의 시선이 다시 선화를 향했다.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야?”
그녀가 이유 없이 두 사람의 말을 엿듣고 있을 리는 없었다. 게다가 아무 용건도 없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 리는 더더욱 없었다.
“천지의 불꽃과 관련된 단서를 얻고 싶은 거죠?”
“응”
“그럼 구룡의 불꽃을 일단 포기해요. 그건 절대로 못 훔쳐요. 중주에서도 그 불꽃을 노리는 사람들이 한 둘인 줄 알아요? 그런데도 수백 년을 지켜왔다고요. 그 물건에 손을 대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어요. 만에 하나라도 그 물건을 손에 넣는다고 해도, 쓰지도 못할 물건을 들고 쫓겨 다니다 비참하게 죽고 말 거예요.”
“그럼 다른 방법이라도 있어?”
“그러니까, 지금 그 다른 방법이라는 게 전혀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거잖아요. 그 불꽃은 포기하세요.”
“나는 꼭 천지의 불꽃이 필요하다니까!”
이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성을 내자, 선화가 픽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거참……. 비석의 설립자라는 분이 이렇게 성격이 급한 분일 줄은 몰랐네요. 제 말을 끝까지 들어요. 전 어디까지나 구룡 불꽃을 포기하라고 한 거예요. 저한테 그 물건보다 더 강한 불꽃에 대한 정보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불꽃은 구룡의 불꽃과 달리 선배가 능력만 있다면 선배의 불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고요.”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이준의 낯빛이 대번에 변했다.
“다른 천지의 불꽃이라고?”
흥분을 이기지 못한 이준이 갑자기 선화의 어깨를 덥썩 붙잡으며 거의 소리를 지르듯이 말했다.
“알려줘. 네가 필요한 거라면 뭐든지 다 줄게!”
그러자 선화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내려앉았다. 아마도 뭔가 원하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알려주는 건 어렵지 않아요. 대신 그 전에 확인할게 있어요. 선배는 6레벨 연금술사인거죠?”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좋아요. 그럼 우리 가문이 다시 연금술사의 탑의 장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도와줘요.”
“연금술사의 탑?”
낯익은 이름의 등장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연금술사의 탑이라면 단왕 고하가 가입하고 싶어 안달이 나있는 그 투기대륙 최고의 연금술사 조직이었다. 그런 세력의 장로 자리라니……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선화야, 억지 부리지 말거라. 네 가문이 연금술사의 탑에 다시 들어가는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장로직을 차지하는 것을 도와주려면 7레벨 연금술사는 돼야 해.”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서천우가 말했다.
“저도 지금은 어렵다는 거 알아요. 근데 지금 이 나이에 6레벨 연금술사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눈이 뒤집힐 일이라고요. 연금술사의 탑에도 이런 사람은 거의 없을 거예요. 만일 이분이 도와준다면 저희 가문이 다시 장로자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서천우의 말에도 선화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만일 절 도와주겠다고 약속하면 천지의 불꽃에 대한 정보를 드릴게요.”
하지만 이준은 선뜻 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연금술사의 탑은 그가 아는 한 투기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 중 하나였다. 연금술이라면 어디 가서도 빠지지 않는다고 자신하는 그였지만, 그리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불의 협곡에 쳐들어가 그들의 보물을 훔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쪽에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너희 가문이 장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해준다고 장담은 못해. 그리고 네가 도와준다고 그렇게 쉽게 천지의 불꽃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하지만 정보를 준다면 나도 최선을 다해볼게.”
이준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선화의 입가에 밝은 미소가 번졌다.
“그렇다면 이제 그 정보를 알려줘.”
이준의 약속을 받아낸 선화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사실 그 정보는 연금술사의 탑과도 관련이 있어요. 우리 가문이 한 때 그 곳의 장로였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정보죠.”
“뭐라고?”
연금술사의 탑과 관련이 있다는 말에 이준의 머릿속에 순간 사기를 당한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스쳤다. 만일 그 불꽃이 연금술사의 탑의 물건이라면, 차라리 구룡의 불꽃을 훔치는 편이 훨씬 가능성이 높았다. 불의 협곡이라는 곳이 얼마나 강력할지는 몰라도, 연금술사의 탑보다 강력할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오해하지 말아요. 확실히 이 불꽃은 구룡의 불꽃보다 훨씬 손에 넣을 가능성이 높은 물건이에요. 능력만 있다면 연금술사의 탑에서도 그 물건을 가져가는 걸 반대하지 않을 테니까요.”
마치 이준의 속마음을 꿰뚫어본 듯한 그녀의 설명에 이준의 얼굴에 잠시 드리워졌던 살기등등한 표정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좋아. 그 불꽃의 이름이 뭔데?”
이준의 질문에 선화는 씩 웃으며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 올렸다.
“혹시 별의 불꽃이라고 들어봤어요?”
“별의 불꽃?”
그녀의 입에서 불꽃의 이름이 나오기 무섭게 이준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별의 불꽃은 무려 천지의 불꽃 중 9위를 차지하고 있는 불꽃이었다. 이는 약로의 얼음불꽃의 정수보다도 두 단계나 높은 순위였다. 전설에 따르면 이 불꽃은 지상이 아닌 은하의 불꽃에서 만들어지며, 밤을 낮처럼 만들어줄 정도로 밝은 빛을 발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 불꽃은 수천 년의 세월에 걸쳐 만들어지며, 지능을 가지고 있어 더더욱 길들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손에 넣기 어려운 만큼 그 가치 역시 이루 말할 수 없이 높았다. 별의 불꽃을 보유한 자는 불사의 몸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별의 불꽃은 그 주인이 어떤 부상을 당해도 치료해냈고, 조금이라도 숨이 붙어있다면 반드시 살아날 수 있었다. 물론 부상이 심하다면 상처를 회복하는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고, 머리나 심장이 날아가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머리나 심장이 날아가면 죽는 것은 그 불꽃을 가지고 있든 가지고 있지 않든 마찬가지였고, 작은 부상이나 어지간한 중상을 입더라도 빠르게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은 생사를 가르는 전투에서 두말할 나위 없는 최고의 능력이었으니, 이준 역시 그 불꽃을 탐내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때요? 거짓말을 한건 아니죠? 이 정도면 구룡의 불꽃 따위에 목숨을 걸 이유가 없지 않겠어요?”
확실히 이 정도 정보는 그 자체로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귀중한 보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 문제가 남아있었다.
“정말이군. 하지만 별의 불꽃이 정말 연금술사의 탑 안에 있다면 그쪽에서도 철저하게 지키고 있을 텐데, 그것을 어떻게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거야?”
이준의 질문에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서천우가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보기에도 그 정도 보물이라면 순순히 그것을 내어주겠느냐. 힘으로 빼앗아 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고, 만에 하나 몰래 빼돌린다 해도 연금술사의 탑을 적으로 돌리면 별의 불꽃이 아니라 무슨 불꽃을 가지고 있어도 시체가 되고 말게다.”
서천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선화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아까도 말했잖아요. 실력만 있으면 된다고. 이 불꽃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집어간다고 해도 누구도 말리지 않을걸요.”
“어째서지?”
이준이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되묻자, 선화가 다시 설명을 이어나갔다.
“연금술사의 탑에서 별의 불꽃을 발견한건 사실이지만, 누구도 이 불꽃을 길들이지는 못 했으니까요. 내로라하는 연금술사들이 달려들어서 죄다 실패했거든요. 심지어 크게 다치거나 죽은 사람도 있어요. 지금은 일단 봉인술을 사용해 잠시 봉인해둔 상태죠. 그 마저도 임시방편일 뿐이지만요.”
이준은 묵묵히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