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8화. 방법
이준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퍼지자마자 드넓은 대청 아래에 반가운 얼굴들과 낯선 얼굴들이 잔뜩 모여 들었다.
이준은 주변 사람들을 쭉 둘러보며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다들 앉아. 다 한 식구인데 그렇게 깍듯이 굴 거 없어.”
“대장, 그래도 다들 대장이 오기까지 기다렸어. 지금 밖에 있는 녀석들 다 거의 미쳐있다니까?”
건장한 사내 하나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하태준, 이준은 그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했다. 비석의 창립자 중 하나였다. 너무 오랜 시간 떨어져 있던 탓인지, 하태준은 이준에게서 약간의 거리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다…당신이 그 이준이라고?”
한참이나 멍한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보고 있던 선화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왜? 아닌 것 같아?”
“조, 조각이 미화가 많이 됐군!”
바로 그 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열리고, 이내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쳇. 너 이 자식 돌아왔구나! 매번 한 번 떠나면 2년씩 걸린다니까. 그 동안 혼자 재밌었어?”
문 틈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며 단발머리를 한 여자 하나가 신이 나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여자의 곁에는 붉은 검을 든 사내 하나가 서있었다. 사내의 얼굴에는 평소와 달리 밝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오하늘과 이윤영을 바라보는 이준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가 아카데미를 떠나있던 2년간 이윤영은 몰라볼 정도로 성숙해져 있어 예전의 새침한 소녀의 모습은 이제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세 사람은 한참동안이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었다.
비석의 설립자인 이준이 아카데미를 떠나있는 동안 사실상 비석 전체의 관리를 도맡아왔던 윤영은 이에 대해 연신 볼멘소리를 해대며 불만을 표했지만, 그녀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니까 정말 반갑네. 내가 아카데미를 떠나있는 사이에 비석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꿈에도 몰랐어. 정말 대단해.”
“예전이랑은 비교도 안 되게 커졌지.”
이준이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사를 내뱉자, 윤영의 얼굴에 또 다시 웃음꽃이 피었다.
“하늘이는 본원 장로가 됐고 나는 장로가 될 자격은 있지만 비석을 관리하고 있는 입장이라 아직 그쪽으로 갈 계획은 없어. 장로가 되면 학생들 일에 너무 관여할 수 없게 되니까.”
“그래도 숫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아. 기껏해야 2백 명 정도니까. 그래도 우리가 처음 비석을 만들었을 때에 비하면 엄청나게 커졌지.”
이윤영에 이어 옆에 있던 오하늘이 웃으며 말했다.
“인원만 많아 봤자 쓸모가 없으니까. 요즘은 한 학기에 50명 정도만 받고 있어. 매 계절마다 받아주는 학생이 50명이 채 안 돼. 그래도 본원의 유망주들은 거의 다 비석 소속이라고 볼 수 있지.”
두 사람의 설명에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두 사람에게 비석의 운영을 맡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흑각성의 이씨 가문과 가한제국의 불의 연맹이라는 두 세력을 총괄하고 있는 지금이야 조금 사정이 다르지만, 비석을 처음 세웠을 때의 자신이라면 결코 이 정도까지 조직을 키워나갈 수 없었을 것 같았다.
“비석 사람들 중 졸업하고 이씨 가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몇 명 정도 돼?”
한참동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준은 슬그머니 자신이 궁금하던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가 흑각성에 이씨 가문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사실 비석이라는 세력에서 계속해서 유능한 인재들을 뽑아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본원에 들어올 정도의 인물이라면 재능은 이미 입증된 셈이었으니, 이씨 가문으로써는 계속해서 우수한 인재들을 영입해 세력을 확장해 나갈 수 있었다. 게다가 아카데미를 졸업한 학생들 입장에서도 보다 실력을 키울 수 있는 강한 세력에 들어가기를 원했으니, 자연스레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게 된 것이다.
“꽤 많아. 비석의 구성원이라면 모두 비석이랑 이씨 가문 사이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으니까. 매년 20명씩은 이씨 가문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
윤영이 말했다.
“비석 내부에서도 딱히 갈 곳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졸업생들을 이씨 가문으로 보내려고 하는 편이고, 아카데미 측에서도 흑각성 내의 유일한 동맹세력인 이씨 가문의 힘을 키우면 좋은 일이니까 좋게 생각하고 있어.”
이어지는 오하늘의 말에 이준의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이대로라면 아카데미도, 흑각성내의 이씨 세력도 순조롭게 성장해 나갈 것이 분명했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 고마워.”
“쳇. 됐거든.”
이준이 감사 인사를 건네자, 민망해진 윤영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었다.
“하하하. 괜히 심술부리기는. 넌 그럼 이번에 얼마나 머물다 갈 생각이야?”
오하늘이 웃으며 물었다.
“그렇게 오래 있진 못할 거야. 여기에서의 일을 다 해결하고 나면 또 천지의 불꽃을 찾으러 가야 하거든.”
“천지의 불꽃이요?”
가만히 앉아 세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선화는 천지의 불꽃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며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그녀 역시 연금술사이니 천지의 불꽃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 당연했다.
“너도 참 바쁘다 바빠.”
* * *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실컷 대화를 나눈 이준은 곧바로 본원의 장로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회의실에 도착하니 서천우가 고서들을 뒤적이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친구들은 잘 만나고 왔느냐?”
“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준이 자리에 앉기 무섭게 서천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번에 가람 아카데미에 온 이유가 뭔지 물어도 되겠느냐? 천계의 탑에 불을 붙이는 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노인의 질문에 이준의 얼굴에도 진지한 표정이 떠올랐다.
“대장로님, 원장님은 이번에도 본원에 안 계시는 건가요?”
“그렇지. 항상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시니……. 간간히 사람을 시켜 소식을 전해주시지 않는다면 생사조차 알 수 없을 정도니까.”
이에 이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검은 망토를 끌어내려 노인에게 가슴에 피어난 새까만 덩어리를 보여주었다.
그의 가슴에 새겨진 검은 반점을 본 서천우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중독이 된 모양이구나.”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구름제국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투존 강자라니…….”
이준의 설명을 들은 서천우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몇 번이나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본원에 원장님 외에 다른 투존 강자는 없다. 아카데미 내에 숨겨진 강자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투존은 오직 원장님 한분 뿐 이니까. 그들이 힘을 합치면 가능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에게 부탁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그 분들은 아카데미가 생사의 기로에 놓이지 않은 이상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 누군가의 독을 제거해주려 나타날 리는 더더욱 없고 말이야……. 대장로인 나라 해도 그 분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는 없다. 정말 막막하구나.”
이준이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답변이었다. 이준 역시 원장이나 가람 아카데미의 숨은 강자라는 사람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지는 않았다. 몇 년 전 한샘과의 일전 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나타날 리가 없었다.
“투존 강자가 없다면 이제 방법은 하나밖에 안 남았네요…….”
“그 방법이 무엇이냐?”
대장로가 진지한 얼굴로 되묻자, 이준이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천지의 불꽃을 찾는 거요…….”
“천지의 불꽃을 하나 더 찾겠다고?”
서천우는 경악에 찬 표정으로 이준을 응시했다. 그 역시 천지의 불꽃이 얼마나 희귀하고, 강력한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천계의 탑에 있던 구름 불꽃 역시 천지의 불꽃이었고, 그것이 탑을 벗어나지 못 하도록 지켜온 것이 그였으니까.
“대장로님도 아시겠지만 제 염력 수련법은 천지의 불꽃을 흡수해서 성장하니까요. 만일 새로운 불꽃을 찾을 수 있다면 제 힘으로 악마의 반점을 지울 수 있을 거예요.”
“하아……. 헌데 천지의 불꽃을 찾는 것이 그리 쉽겠느냐? 너도 알다시피, 천지의 불꽃은 보리수의 점액과는 비교도 안 되는 보물이다. 얻는 것은 고사하고 찾는 데만 해도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서천우와 이준은 잠시 서로를 마주보며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이제 이 방법밖에 없어요. 제가 가람 아카데미에 온 것도 사실 이화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예요. 대장로님은 저보다 훨씬 견문이 넓으시잖아요.”
이에 서천우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안하구나. 나보다는 약존 선생님에게 여쭤보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그 분은 연금술사이신 데다가 경험도 나보다 많으시니…….”
이어지는 노인의 말에 이준의 얼굴이 더욱 어둡게 내려앉았다.
“스승님은 영혼의 궁전 놈들에게 붙잡히셨습니다. 제가 이렇게 천지의 불꽃을 찾는 것도 악마의 반점을 제거하고 스승님을 되찾기 위해서고요…….”
“약존이 놈들의 손에 넘어갔다고?”
이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서천우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겨났다.
“그 자들은 강한 영혼들을 그렇게 많이 데려다가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원장님께서도 이전에 영혼의 궁전과 마찰이 있었다. 영존이라고 불리는 자였는데, 그 자도 투존 강자인 모양이더구나. 원장님과 맞붙어도 전혀 밀리질 않았어.”
“영존이요?”
이준이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너도 앞으로 조심해야 한다. 절대로 성급히 약존 님을 찾겠다고 움직여서는 안 돼.”
서천우의 말 대로였다. 투종들과 연합해서 겨우 ‘영호’를 잡았는데, 지금 자신의 실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영존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일단 영존과 마주치게 된다면 목숨만 건져도 다행일 것 같았다.
“그래도 약존께서 지난 세월 맺어온 인연들이 있으니 투기 대륙의 숨은 강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을게다. 일단 풍존을 찾거라. 그 분이라면 반드시 너를 도와줄 거야.”
서천우의 목소리에는 존경심과 두려움이 배어 있었다.
“풍존이요?”
대장로의 입에서 풍존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이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가 아는 바에 따르면, 풍존은 약로와 막역한 사이였고, 투존 강자였다. 만일 서천우가 그의 행방을 알고 있다면 스승의 영혼을 되찾을 때 가장 든든한 아군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의 행방을 알게 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 풍존께서는 약존의 형제와도 같은 분이지. 약존이 실종 되었을 때는 온 대륙을 돌아다니며 그 분의 행방을 찾았으니까. 풍존이 영혼의 궁전과 마찰을 빚은 것도 약존을 찾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들었다.”
“혹시 풍존의 행방을 알고 계신건가요?”
이준의 질문에 서천우는 민망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미안하게도 풍존의 행방에 대해서는 나도 아는 게 없구나. 하지만 그 분은 원장님조차 존경을 표하는 강자이니, 그 분을 찾으면 영혼의 궁전과의 싸움에서 아주 큰 힘이 되줄 게다.”
“네, 최선을 다해볼게요.”
결국 서천우도 풍존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소리였다. 이에 이준은 다시 천지의 불꽃에 대한 정보를 물었다.
“천지의 불꽃에 대한 정보는 없으신가요? 아주 작은 단서라도 좋으니 아시는 게 있다면 뭐든지 말씀해 보세요.”
이준의 간곡한 물음에 서천우는 한숨을 푹 내쉬며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불의 협곡이란 세력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지 모르겠구나.”
“불의 협곡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