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7화. 재회
이준 일행이 평화 마을에 들어서자, 사방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그들을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대장로님이 돌아오셨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기쁨에 찬 외침이 울려 퍼지며 가슴에 가람 아카데미의 휘장을 단 사람들이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달려 나왔다.
“드디어 왔는가. 조금만 더 늦었어도 흑각성까지 사람을 시켜 찾아보게 했을 거야.”
“껄걸, 성질 머리하고는, 투종 계급까지 올라가려면 한참 걸리겠어.”
서천우는 낯익은 노인의 얼굴을 보고 밝게 웃었다. 그에게 인사를 건넨 노인은 바로 외원의 부원장인 대건이었다.
“승급이랑 성질이랑 또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대건은 서천우의 곁에 있던 이준을 발견하자마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허허……. 처음 이 곳에 들어왔을 때는 고작 대투사 수준이었던 놈이 벌써 투황이라니. 왠지 억울하다는 느낌까지 드는구나.”
“안녕하세요, 부원장님.”
“됐다. 그렇게 예의 차릴 거 없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준에게 대접을 받아 기분이 좋았는지, 노인의 입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고 있었다.
“녀석들아, 이 친구가 바로 비석의 창시자인 이준이다. 지금은 투황 강자가 됐지. 너희도 흑각성에서 훈련하면서 이씨 가문을 봐서 알겠지? 그 가문의 가주가 이놈이다.”
대건의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이준을 위 아래로 흝어봤다.
“우와아……. 저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이준이야?”
“정말로 저런 사람이 있긴 있구나. 하도 소문만 무성해서 실존 인물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
“본원의 강자 50명 중 30명은 비석 사람이라던걸. 장로님들 중에도 비석 출신이 절반이나 된대.”
학생들의 동경에 찬 눈빛을 접한 이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해댔다. 가람 아카데미가 싫지는 않았지만, 올 때 마다 이런 일을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 가람 아카데미 창립 이래 최고의 인기인이구나. 좋으냐?”
대건이 이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농을 건네자, 이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껄껄, 어때, 저 아이들에게 손이라도 한번 흔들어주거라!”
이준을 놀리는데 재미를 붙인 듯한 대건의 태도에 서천우가 다가와 웃으며 그를 말렸다.
“적당히 하게. 우선 아카데미로 돌아가지. 집행부에게 당분간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전해주게. 흑각성 놈들이 밀고 들어올지 모르니까 말이야.”
“명령은 진작 내렸지. 보리수 점액이 얼마나 탐나는 물건인지 잘 아니까 말이야. 그나저나 이 분은 누구신가?”
서천우와 이야기를 나누던 대건이 아라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의 몸에서 새어 나오는 기운을 느낀 모양이었다.
“아라라고 합니다. 제 친구예요.”
이준의 대답에 대건은 잠시 멈칫거리다 쓴웃음을 지었다.
“허, 친구가……. 거참, 너는 정말이지 갈수록 모르겠구나.”
말을 마친 대건은 고개를 돌려 주위에 가득한 가람 아카데미의 학생과 장로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얘들아 이제 그만하고 순찰 돌거라.”
대건의 명령에 학생들은 머뭇거리다가 아쉬운 표정으로 하나 둘 자리를 떠났다.
“가자. 일단 같이 가람 아카데미로 돌아가야지. 우선 천계의 탑에 불꽃을 충전해 주어야겠다. 그리고 나서는 비석에 가서 편히 쉬거라.”
서천우가 앞장서서 발걸음을 옮기자, 이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2년 만에 그곳으로 돌아가려니 감회가 새로웠다.
“비석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
비석은 자신이 세운 최초의 세력이었다. 2년이 지난 지금, 그곳이 어떤 모습일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레었다.
* * *
이준 일행이 가람아카데미에 도착하자, 시계는 이미 점심 시간대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준은 외원에 오래 머물지 않고 가볍게 둘러본 뒤 곧장 본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서천우의 뒤를 따라 구불구불한 공간 안에 숨겨져 있는 은색 대문을 통과해 들어가자, 끝없이 빽빽한 수풀이 펼쳐졌다. 불의 힘 쟁탈전을 펼쳤던 바로 그 곳이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그리운 기억들이 하나하나 머리를 스쳤다.
“하하, 아직까지도 네가 세운 기록을 깬 신입생이 없단다. 매년 신입생이 들어오지만 다들 재학생들의 기에 눌려 빼앗기고 다니지, 너처럼 되려 반격을 시도하는 녀석들은 없단다.”
서천우의 입에서 예전 이야기가 나오자 이준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계속 가죠…….”
숲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광활한 땅 위에 세워진 본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준은 산언덕의 경사진 부분에 앉아 발아래 펼쳐진 넓고 활기찬 본원을 바라봤다. 2년 전보다 크기가 조금 더 커진 것 같았다.
서천우의 말에 따르면, 얼마 전 본원에서 입학 문턱을 조금 낮췄기 때문에 지금은 예전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본원에서 실력을 쌓고 있다고 했다.
본원에 들어간 이준은 서천우에게 먼저 비석에 들러보면 안되겠냐고 물었고, 이에 서천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석 본부의 위치가 바뀌었으니 아이들에게 물어보거라. 아마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될게다. 편히 들렀다가 장로원으로 오거라.”
말을 마친 서천우는 아라와 이찬 등의 사람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길가에 풀 하나, 돌 하나가 모두 익숙하게 느껴졌다. 마음이 편했다.
이준은 길 가던 학생 한 명을 붙잡고 비석의 위치를 물었다. 상대는 놀란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보며 비석의 위치를 알려주고는 자리를 떠났다.
“신입생인가? 어떻게 비석 본부 위치도 모르지?”
길에서 만난 학생이 가르쳐준 길을 따라 십 분 정도 걸음을 옮기니 어마어마하게 큰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본원에서 이 정도로 넓은 자리를 내어주다니, 실로 놀라울 따름이었다. 딸랑 누각 하나만 놓여있던 예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큰 저택이었다.
이준은 2년이나 본원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비석이 본원에서 얼마나 세력을 확장했는지 알 턱이 없었다. 지금의 비석은 재력으로도, 숫자로도, 실력으로도 자타공인 본원 최강의 조직이었다.
거대한 정원 안으로 걸어 들어가니 네 명의 학생들이 순찰을 도는 것이 보였다.
막상 안으로 들어가니 생각보다 더욱 넓은 저택의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들어가자, 넓은 공터 하나가 나타났다.
넓은 공터에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박수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니 하늘색 옷을 입은 여자 아이 하나가 높은 단상에 올라 연금비약을 제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약솥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를 맡아본 이준은 저도 모르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풍기는 약향은 분명히 4레벨 연금비약의 향이었다.
하늘색 옷을 입은 여자 아이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은 채 연금비약의 제조에 몰두하고 있었다.
“선화 선배 연금술은 갈수록 훌륭해진다니까. 저 나이에 4레벨 연금비약을 만들다니, 나중엔 얼마나 더 대단해질지 궁금하다.”
“장로님들이나 선생님들을 제외하면 선배보다 더 대단한 연금술사가 없잖아. 정말 대단하지. 아마 아카데미 최고의 연금술사가 아닐까?”
“아니지. 비석의 창립자인 이준 선배는 학생일 때 벌써 5레벨 연금비약을 만들었다던데?”
“에이, 설마. 허풍이겠지. 대단한 사람인건 맞지만, 설마하니 정말로 학생 시절에 5레벨 연금비약을 만들었겠어?”
학생들이 나누는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이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마치 전설의 인물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단상에 선 여자아이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짙은 약향을 풍기는 연금비약이 약솥 안에서 튀어나와 그녀의 손바닥 위에 안착했다.
반들반들한 연금비약이 손바닥 위를 굴러다니는 모습에 곳곳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아쉽네…….”
그 때, 정체불명의 사내 하나가 고개를 저으며 공터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사내의 발언에 환호 소리로 가득하던 공터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 앉았다.
갑자기 나타난 사내가 자신의 연금비약을 평가하자 기분이 상했는지, 단상에 있던 여자 아이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가득했다.
“뭐가 아쉽다는 거지?”
이준은 하늘색 옷 입은 여자의 눈빛과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에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한 뒤 입을 열었다. 본래 이런 상황에서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였지만, 비석의 촉망받는 연금술사 후배이니만큼 직접 가르침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연금술을 할 때 불을 좀 더 정확히 다루고 연금비약을 뭉칠 때 더 오랜 시간을 투자했어야지. 그럼 더 좋은 결과가 나왔을 텐데……. 너 정도의 재능이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조금 더 집중해.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학생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본원에서 그녀의 연금술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할 만한 사람이라고는 장로나 선생님들 뿐 이었고, 심지어 이렇게 부족한 점에 대해 이야기를 해줄만한 실력을 갖춘 사람은 세 손가락 안에 꼽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내는 그 세 사람 중 하나가 아니었다. 아니, 심지어 장로나 선생님도 아니었다.
하늘색 옷을 입은 소녀는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나이에 4레벨 연금술사라면, 어딜 가도 천재 소리를 듣는 것이 당연했다. 아카데미에서 자신에게 연금술에 대해 가르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그런데 자신과 나이차이도 얼마 나지 않아 보이는 사내 하나가 자신의 연금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평을 늘어놓으니 기가 차서 화조차 나지 않았다.
“넌 누구지?”
“너무 고깝게 듣지 마. 너무 빨리 재능을 드러낸 아이들은 종종 끈기를 잃고 자기 실력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어서 하는 소리니까. 그리고 그런 사소한 마음가짐이 먼 미래에는 큰 걸림돌이 되는 거야. 재능이 있다고 거기에 만족해서는 안 돼.”
계속해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한 이준의 태도에 선화는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여긴 비석 본부야. 비석 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어. 넌 휘장도 안 단 걸 보니 마음대로 들어온 것 같은데, 어디 소속이지?”
선화의 말을 들은 비석의 구성원들은 이준의 가슴에 휘장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곧장 날선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사람 좀 찾으러 왔어.”
“누굴 찾는다는 거지? 찾는 사람이 있어도 이렇게 막 들어오면 안 되지.”
선화가 이준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다음부터 조심하도록 해. 누굴 찾는지 말해봐.”
“이윤영이랑 오하늘. 두 사람 좀 불러줘.”
이준이 머리를 긁적이며 자신의 오랜 친구의 이름을 언급하자, 아이들의 인상이 더욱 험악하게 구겨졌다. 그 두 사람은 비석의 간부들이라 해도 함부로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휘장조차 달지 않은 사내 하나가 두 사람의 이름을 허물없이 불러대자 기분이 상했던 것이다.
“본원에서 그 두 분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너 한 명이 아니야.”
선화는 고개를 저으며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매년 신입생들 중 상당수가 그 두 사람을 만나고 싶다며 비석에 숨어들곤 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에는 눈앞의 사내도 그런 철없는 신입생들 중 하나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냉담한 태도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쓴 웃음을 지으며 말없이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후배들과 입씨름을 하는 것 보다는 아는 사람을 찾는 편이 빠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때, 이준의 눈에 반가운 얼굴 하나가 보였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빨간 치마를 입은 여자아이로, 작고 아담한 체구에 예쁘장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이준은 그 소녀를 발견하자마자 손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못 본 사이에 키도 많이 컸네.”
이준과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소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안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돌연 눈물을 떨구는 소녀의 모습에 주위에 있던 학생들은 당황하며 그녀를 달래려 애썼다.
“오빠, 정말 이준 오빠 맞지?”
“이……이준이라고?”
비석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비석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이안’이 ‘이준’의 친척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시끌벅적하던 공터가 순식간에 침묵으로 물들었다.
전설 속 인물로만 여겨지던 비석의 창시자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