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6화. 화근을 뿌리 뽑다
이준이 한샘과 싸우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자, 서천우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혹여나 이준이 사적인 원한을 앞세워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지 않을까 못내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가자.”
이준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이씨 가문과 가람 아카데미의 강자들이 그를 둘러쌌다.
이준은 자리에 모여든 흑각성의 강자들을 위협하기 위해 섬뜩한 열기를 발산하는 화련을 손에 든 채 이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각성의 많은 강자들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이준을 쫓고 있었다.
공중에서 이준 일행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던 한샘은 조용히 마염곡 장로들의 시신을 회수한 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큭큭……. 부디 무사히 가람 아카데미로 돌아가거라. 그래야 내가 마로를 불러낼 수 있으니까 말이야.”
* * *
영산과 이준 일행이 충돌을 일으켰던 산에서 조금 떨어진 숲에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는 하나 같이 범상치 않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으며,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에게서는 더욱 강렬한 염력이 느껴졌다.
펑!
잠시 후, 조용하던 숲 속에서 낮은 폭음이 울려 퍼지고, 시신 몇 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 여섯 개의 그림자가 숲 속에서 튀어나와 공터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십여 명의 사람들에게로 달려왔다.
“가주님. 뒤에 가까이 따라 붙은 녀석들은 모두 처리 했습니다.”
사내가 보고를 올리자, 무리의 중앙에 있던 청년은 꼭 감고 있던 두 눈을 천천히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놈들이 많군……. 대장로님, 아카데미까지 얼마나 더 걸릴까요?”
“별다른 일만 없다면 모레 점심쯤에는 도착할 수 있겠지. 우리 쪽 사람이 많아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날파리 같은 놈들을 일일이 상대하느라 며칠은 더 걸렸을 게야.”
그 날의 전투로부터 벌써 이틀이 지났다. 이틀 동안 이준과 그의 무리들은 부지런히 가람 아카데미를 향해 움직였다. 하지만 이준 쪽에서 아무리 외진 길을 찾아 움직여도 흑각성의 도적놈들은 추격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씨 가문과 가람 아카데미의 강자들이 지원을 와주었다는 점 이었다. 아라와 보람, 이준 셋만으로는 보리수의 점액을 손에 넣었더라도 그것을 지켜내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다행이야. 쫓아오는 놈들 중에 투종급 강자는 한명도 없으니까.”
아라가 말했다.
“하지만 한샘은 아직도 보리수의 점액을 포기하지 않았을 거야. 분명 어딘가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겠지.”
이준은 손가락에 끼워진 저장반지를 만지작거리다가 곁에 있던 이씨 가문의 수하 하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큰 도씨, 이씨 가문 중 괜찮은 사람들을 데리고 뒤에서 움직여. 뒤따라오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처단한다. 만일 너무 강한 상대를 만나면 일단 후퇴해. 절대로 목숨을 버려가며 싸우지는 마.”
“네, 가주님!”
명령을 내린 이준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한편, 이준의 뒤를 쫓던 흑각성 강자들은 가람 아카데미가 가까워질수록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초조해도 함부로 손을 쓸 수 가 없었다. 이준을 습격했던 사람들 중 벌써 세 명이나 되는 투황 강자가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 * *
칠흑 같은 밤, 수많은 산봉우리가 어둠에 잠기고, 마수의 울음소리가 곳곳에 메아리 쳤다. 은은하게 쏟아지는 달빛도 숲의 어둠을 쫓아내지 못했다.
이준 일행은 어느새 가람 아카데미의 목전까지 도달해 있었다.
“다들 며칠 동안 고생 많았어. 부상당한 사람들에게 이걸 나눠주도록 해.”
사람들은 서둘러 이준에 건넨 연금비약을 받아 그것을 부상당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내일이면 드디어 가람 아카데미에 도착하겠네요…….”
“껄껄, 간만에 아주 힘든 여정이었구나. 늙은이를 이렇게 고생시켜도 되는 게냐?”
서천우가 기지개를 펴며 농을 던지자, 이준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뒤 머리를 숙여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대장로님. 이 은혜는 반드시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하지만 그 문제는 가람 아카데미에 도착하고 나서 얘기하도록 하자꾸나.”
말을 마친 서천우는 피식 웃으며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이 사람들 좀 지켜줘. 난 잠깐 조용한 곳에서 새로 얻은 무투기를 좀 살펴볼게.”
이준은 아라에게 귓속말을 건넨 뒤 바로 몸을 일으켜 수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컴컴한 숲 속을 한참이나 걸어가자, 맑은 계곡 하나가 나타났다. 이준은 빠르게 계곡의 으슥한 곳으로 들어가 주위를 들러본 뒤 저장 반지 속에서 경매장에서 얻은 2격 무투기 ‘육합자의 몸’을 꺼냈다.
이준은 두루마리를 펴자마자 홀린 듯이 정신을 집중했다.
그 때, 그의 손에 있던 저장 반지에서 갑자기 기이한 광채가 쏟아져 나오더니 옥 상자 하나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킥킥. 젊은이! 덕분에 수고를 덜었어!”
노인은 바위 위에 서 있는 이준을 보며 눈 깜짝할 새에 옥 상자를 들고 숲 속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숲 속에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 노인의 등 뒤에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들러붙었다.
“영산, 역시 당신이었군……”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노인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쉭!
곧이어 눈을 찌르는 듯한 밝은 빛과 함께 날카로운 에너지가 노인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노인은 반사적으로 공간을 왜곡시켜 상대의 공격을 피한 뒤 곧바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누구냐!”
간신히 공격을 피한 노인은 곧바로 염력을 실은 손을 휘둘러댔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노인의 염력은 두꺼운 나무 몇 그루를 순식간에 잘라냈지만, 시커먼 그림자는 번개 같은 몸놀림으로 그의 염력을 피해냈다.
영산이 상대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도 전에, 이번에는 역겨운 비린내를 풍기는 회색빛의 안개가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경험이 풍부한 그는 단번에 그 안에 담긴 치명적인 독성을 감지하고는 바람을 일으켜 안개를 내쫓았다.
그가 독 안개를 쫓아내는 사이, 또 다시 검은 그림자가 그를 따라와 앞을 막아섰다.
“서천우!”
“하하, 영산 장로님.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이번엔 또 무슨 수를 쓰신 겁니까?”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자신의 보물을 도둑질한 자들의 우두머리가 나타났다.
“네 녀석에게 들킬 줄이야……. 한 명 더 있는 것 같은데, 어서 나와!”
영산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무성한 나뭇가지 속에서 백발의 여인 하나가 튀어나왔다.
“하하. 네 놈도 참 교활하구나. 저 녀석의 뛰어난 영혼 탐지 능력이 아니었다면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보리수의 점액을 도둑맞을 뻔 했어.”
이어지는 서천우의 말에 영산의 얼굴이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보리수의 점액에 자신의 영혼 에너지를 숨겨 두었던 것은 이준과 한샘이 부상을 입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보리수의 점액을 낚아채 도망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이준 일행은 큰 부상 없이 그 곳을 빠져나왔고, 심지어 함정을 파놓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며칠간 추격해오는 놈들이 너무 많아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그리고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정말 대단하더군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더라면 꿈에도 몰랐을 거예요. 그래도 가람 아카데미에 도착하기 전에는 다시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죠. 아무리 보리수의 점액이 탐나도 가람 아카데미 안에서 난동을 부릴 수는 없을 테니까요.”
“일부러 내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단 소리군!”
영산은 온 몸의 털이 삐쭉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설마하니 이 어린 놈이 자신의 계획을 꿰뚫고 역이용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영산 장로님, 그 물건을 돌려주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럼 오늘 일에 대해서는 굳이 따지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영혼 상태인 당신에게도 충분히 타격을 입힐 수 있어요. 게다가 제 영혼 탐지 능력으로 당신의 본체를 찾는 것도 가능하고요. 그건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영산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흥, 그런다고 내가 겁을 먹을 줄 알았느냐? 네 놈에게 이 물건을 넘기느니 차라리 보리수의 점액을 없애버리겠다.”
“하아……. 제 말을 못 믿으시는 모양이군요. 영혼 분신을 사용하신걸 보니 본체는 이 근처에 있을 텐데, 제가 장로님 분신이 어디 있는지 한번 맞춰볼까요?”
이준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숲의 북쪽 방향을 가리키며 웃음을 지었다.
“본체가 아마 저쪽에 있겠죠?”
이준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을 보는 순간, 영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행여나 영혼 분신이 부상을 입게 되면 한참을 수련해야 원래 실력을 회복할 수 있었고, 그전에 상대가 본체를 찾아낸다면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지금 눈앞에 있는 세 사람과 삼 대 일로 싸운다면 실력이 온전한 상태여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 경고입니다. 보리수의 점액을 넘기세요.”
영산은 한참을 고민하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목숨을 건사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억하심정에 보리수의 점액을 파괴하기라도 했다가는 오늘 살아서 이 산을 나갈 수 없을 것이 불보듯 뻔했다.
“끌끌……. 좋아. 이번엔 내가 졌군.”
결국 보리수의 점액을 포기하기로 한 영산은 얌전히 옥상자를 이준에게 넘겼다.
“하지만…… 보리수의 점액을 손에 넣는다 하더라도 보리심에 관련된 정보를 알아내긴 힘들 거다.”
“아, 괜찮습니다. 전 보리수의 점액이 필요한 거지, 보리심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요.”
이준의 짤막한 한마디에 아라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준은 정말로 보리심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 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목숨을 걸고 보리수의 점액을 손에 넣으려 했던 것은 오직 하나, 오랜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흥……. 그렇다면 됐고. 어찌됐든 참으로 대단한 놈이 나타났구나. 감히 나 영산에게서 보리수의 점액을 빼앗아가다니.”
영산 노인은 입을 내밀고 그렇게 중얼거린 뒤 곧바로 모습을 감췄고, 그의 영혼은 빠르게 흩어져 이내 이준이 감지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다.
그렇게 흑각성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보리수의 점액은 마침내 이준의 소유가 됐다.
“평화마을이다!”
마침내 마지막 산을 넘은 이준 일행은 발아래에 보이는 작은 마을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가자. 평화마을까지 들어가면 추격자들도 없을게다. 가람 아카데미에서 이미 소식을 전해 받았을 거고, 마을에 우리 아카데미 소속의 강자들이 마중 와 있을 거야.”
이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뒤 피식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여전히 흉흉한 기운들이 느껴졌다.
“정말 지칠 줄도 모르는 녀석들이군.”
하지만 이준 일행이 평화마을의 영역 안으로 들어서자, 결국 흑각성의 무법자들도 어쩌지 못하고 하나 둘 자신들의 본거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몇 몇 무리는 끝까지 보리수의 점액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에는 회색 망토를 두른 사내 하나가 끼어 있었다.
“빌어먹을 놈……. 반드시 복수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