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4화. 격살
이준은 자신의 지척까지 다가와 있는 붉은 봉황의 부리를 바라보며 깊은 숨을 들이쉰 뒤 다시 한 번 염력을 폭발시켜 화염 그물의 온도를 더욱 더 높게 끌어올렸다.
“짹! 짹!”
하늘 봉황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러대자, 참다 못 한 마염곡의 장로 중 하나가 방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대장로님 빨리 봉황을 다시 소환해야 합니다! 저 놈의 불꽃이 생각보다 너무 강력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방언의 얼굴은 완전히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는 감히 이준에게 불꽃으로 승부를 건 것을 후회하고 있었지만, 너무 늦은 깨달음 이었다.
“제기랄…….”
하지만 방언이 하늘 봉황을 회수하려는 순간, 돌연 무형의 불꽃이 피어오르며 푸른 색 화염 그물의 빈틈을 메우기 시작했다.
“이, 이런! 어떻게 이럴 수가!”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세 장로는 황급히 악마의 불꽃을 회수하려 했지만, 푸른색과 반투명한 유백색의 불꽃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불꽃 그물은 이미 빠르게 수축을 반복해 어느새 주먹만 한 크기까지 줄어들어 있었다.
“선물 감사합니다.”
이준이 피식 웃으며 주먹만 한 크기까지 줄어든 화염 그물을 집어 들자, 세 사람은 완전히 넋이 나가버리고 말았다. 두 개의 천지의 불꽃으로 만들어 진 작은 불꽃 주머니 안에는 그들이 자랑하는 악마의 불꽃이 들어 있었다.
하늘 봉황은 그들의 염력으로 만들어진데다가, 그들의 피까지 흡수한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그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천지의 불꽃으로 만들어진 불꽃 주머니 안에 갇힌 뒤부터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에 있음에도 하늘 봉황의 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는, 그들이 다시 그 염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이 빌어먹을 놈이! 감히, 감히 우리의 불꽃을!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이!”
순식간에 악마의 불꽃과 염력을 도둑맞은 둘째 장로의 입에서는 거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반면 상대의 불꽃을 완전히 봉인하는데 성공한 이준의 입가에는 득의양양한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투기를 이용한 평범한 싸움이었다면 이준이 이 대결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의 바보짓 덕분에 손쉽게 승리를 거머쥐었을 뿐 아니라 보기 드문 불꽃 에너지까지 손에 넣었으니 당장 상대에게 무릎 꿇고 절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이준이 악마의 불꽃이 든 화염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웃음을 짓자, 방언의 얼굴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는 다른 두 장로와 달리 이준에게 욕설을 퍼붓지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잠시 후, 생각을 마친 방언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역시 이씨 가주의 천지의 불꽃은 듣던 대로 대단하군요. 우리 세 사람이 너무 무모했습니다. 하지만 그 불꽃은 저희의 염력을 만든 것이니 가주님께서 가지고 있어봤자 아무런 쓸모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그 염력을 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만일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마염곡의 이름을 걸고 조용히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너무나 뻔뻔하고 속이 뻔히 보이는 요구였다. 이 어처구니없는 제안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방언 대장로님. 어지간히 당혹스러우신가 보군요. 그리고 제가 이 불꽃을 돌려주지 않더라도 당신들은 더 이상 이 싸움에 참여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그게 무슨 거래죠? 차라리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비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이준의 조롱 섞인 말에 방언의 이마에 불뚝 핏줄이 솟아났다.
“그럼 대체 어쩌려는 거지? 네가 그 불꽃을 가지고 있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고!”
방언이 이토록 당황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늘 봉황에는 막대한 양의 염력이 들어 있었으니, 그것을 잃어버린다면 그의 실력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염력이 담긴 피까지 고스란히 잃게 되는 것이니, 투종의 벽을 넘기는커녕 다시 투황으로 실력이 떨어진 뒤 다시는 지금의 실력을 회복하지 못할 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방언의 사정이지 이준이 알 바는 아니었다. 게다가 이 교활한 늙은이에게 염력을 돌려준다는 것은 도둑에게 칼을 쥐어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산전수전 다 겪은 이준이 그 따위 얄팍한 수작에 넘어갈리 없었다.
“글쎄요.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는 제가 판단할 일 아닙니까?”
이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방언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갑자기 자신의 가슴을 내리쳐 피를 토해내더니 피로 물든 두 손으로 인을 맺었다.
“돌아와라!”
인이 만들어지자 불꽃 방어막 안에 든 악마의 불꽃이 다시 격렬히 타오르며 푸른색의 화염 주머니를 뚫고 나오려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망령의 혼!”
하지만 이준이 손가락을 구부리자, 무형의 불꽃이 화염 주머니위에 덧씌워지며 하늘 봉황을 더욱 단단히 가두었다.
또 다시 염력을 회수하는데 실패한 방언의 얼굴은 완전히 잿빛이 되고 말았다.
잠시 후, 히죽 히죽 웃으며 방언을 바라보던 이준이 돌연 입을 벌려 그 불꽃 주머니를 집어 삼켰다.
“너, 너 이 미친! 악마의 불꽃을 삼키다니!”
이준의 정신 나간 듯한 행동에 방언을 비롯한 세 사람은 입술을 깨문 채 악다구니를 써댔다.
내장은 인체에서 가장 취약한 기관이었지만, 악마의 불꽃은 이미 자신의 몸의 일부와도 같은 두 개의 천지의 불꽃에 의해 완벽하게 봉인된 상태였으니 삼키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전투가 끝나고 나면 그 불꽃에 담긴 세 장로의 에너지를 느긋하게 흡수하는 것 뿐 이었다.
“둘째 장로, 셋째 장로, 저 놈을 죽여라!”
금쪽 같은 염력을 도둑 맞은 방언은 미친 사람처럼 날뛰며 나머지 두 장로에게 이준을 죽일 것을 명했다.
하지만 둘째 장로와 셋째 장로 역시 막대한 염력을 빼앗겨 이미 2성 투황 수준까지 실력이 떨어져 있었으니, 이준의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이준이 평온한 얼굴로 가볍게 소매를 휘두르자, 푸른 불꽃이 두 사람을 뒤덮었다.
“쯧쯧……. 한심한 늙은이 같으니.”
두 장로를 순식간에 재로 만들어버린 이준의 얼굴에 순간 상대를 경멸하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눈앞에 방언 장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준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으니 두 장로를 버리고 달아난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지금 방언 장로의 속도로 ‘번개의 춤’을 사용하는 이준에게서 달아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쉭!
다음 순간, 정신없이 달아나던 방언 장로의 등 뒤로 청록색 불꽃에 뒤덮인 주먹이 날아들었다.
“커헉……!”
날카로운 통증에 고개를 내려보니 어느새 상대의 주먹이 자신의 가슴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동료들이랑 힘을 합쳤으면 이렇게 쉽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처음부터 끝까지 멍청한 짓만 하다 가는군.”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방언의 손가락에서 저장반지를 빼낸 이준은 곧바로 영혼 탐지 능력을 활용해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반지 안에는 방금 전 세 장로가 사용했던 ‘악마의 불꽃’의 수련법이 적힌 두루마리가 들어 있었다.
방금 전 전투를 통해 ‘악마의 불꽃’에 관심이 생긴 이준에게는 아주 반가운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천지의 불꽃을 가지고 있는 그가 관심이 있는 것은 그 불꽃 자체가 아니라, 불꽃을 조작하는 능력이었다. 방금 전 그들이 만들어 낸 하늘 봉황은 상당한 수준의 불꽃 통제 능력이 있어야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 이 무투기를 익힌다면 불꽃을 다루는 능력을 향상시키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반지 안의 내용물을 모두 확인한 이준은 곧바로 다른 전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펑!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모아와 기문산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 보람의 모습이었다.
보람의 힘이 강력한 건 사실이나 상대는 흑황종의 수석 연금술사와 차기 종주였으니, 보람의 괴력으로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흑황각에서 그녀와 모어가 맞붙었을 때 모어가 보여주었던 기묘한 몸놀림을 생각해보면, 보람의 괴력도 그다지 쓸모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쾅!
아니나 다를까, 보람이 주먹을 휘두를 때 마다 모어는 교묘한 몸동작으로 그녀의 괴력을 흘려보내고 있었고, 그 때마다 번번이 기문산이 그녀에게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보람이 패배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에 이준은 곧바로 날개를 펼쳐 보람에게로 향했다.
“도와줄 필요 없어. 나한테 맡기고 넌 다른 사람부터 도와주러 가. 어서!”
하지만 이준이 막 보람에게 합류하려던 찰나, 갑자기 그녀가 고개를 돌려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전에 없이 단호하고, 결연한 보람의 표정에 이준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못 들었어? 가라고!”
너무나도 단호한 보람의 태도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마치 그녀의 몸속에 잠들어 있다던 상고시대 마수의 피가 폭발하기라도 한 듯, 보람의 말투에는 알 수 없는 위엄이 가득했다.
이에 이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날개를 펄럭여 다른 곳으로 향했다. 불안한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지금 그녀를 방해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번 싸움이 그녀가 본래의 힘을 되찾는 중요한 계기가 될지도 몰랐다.
한편, 털끝 하나 상하지 않은 이준의 모습을 발견한 모어와 기문산은 속으로 식은 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4성 투황에 불과한 이준이 마염곡의 세 장로를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제압할 수 있었단 말인가.
어쩌면 그 동안 상대가 실력을 감추고 있었거나, 뭔가 어마어마한 비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만일 그가 보람과 합류해 자신들과 싸움을 벌인다면, 패배는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뜻 밖에도 보람은 단신으로 자신들을 상대하겠다고 말했고, 이준은 순순히 물러났으니 그들로써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보람을 죽여버려야겠다고 결심한 순간, 갑자기 밤톨만한 소녀의 몸에서 기이한 보라색 섬광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잠시 후, 두 사람의 눈앞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눈 앞의 소녀가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깔끔하게 묶은 보라색 말총머리는 어느새 허리까지 드리운 긴 장발로 변해 있었고, 한참이나 아래쪽에 있던 상대의 눈동자가 어느새 자신들과 눈이 마주칠 정도로 높은 곳까지 올라와 있었다.
“이……이게 뭐야.”
밤톨만한 소녀가 돌연 성숙한 여인으로 변해버리자, 모어와 기문산은 너무 놀란 나머지 반쯤 정신을 놓고 말았다.
쉭!
그렇게 두 사람이 멍하니 넋을 놓고 있을 때, 갑자기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새하얀 다리가 허공을 가르고 모어의 머리통을 향해 날아들었다.
쾅!
모어는 황급히 손을 휘둘러 상대의 공격을 흘려보내려 했지만, 소녀에서 다 자란 성인으로 변한 보람의 힘은 도저히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이었다.
“쿨럭!”
마치 산을 뽑아 내리치는 것만 같은 일격에 모어는 단박에 피를 내뿜으며 바닥으로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