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3화. 악마의 불꽃
“시작하자. 질질 끌 거 없어.”
한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어둡고 차가운 기운이 폭발적으로 솟구치며 하늘 위에 먹구름이 모여 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따뜻한 햇살이 완전히 차단되어 주위가 밤처럼 어두워졌다.
한샘은 회색의 망토를 펄럭이며 기이한 붉은 빛이 도는 눈동자로 서천우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늙은이, 오랜만이군.”
“쯧쯧……. 흑각성의 약황이 어쩌다가 사람도 귀신도 아닌 존재가 되었는지 모르겠군. 자네가 무슨 술수를 써서 다른 사람의 몸을 빼앗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혼과 몸이 맞지 않으니 분명히 무언가 부작용이 있겠지?”
서천우의 한 마디에 한샘의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서천우의 말대로, 그는 이미 죽을 날이 정해진 사람이나 다름이 없었다.
“내가 이 꼴이 된 건 다 네놈 때문이 아니던가! 내가 살아 있는 이상 너희들은 단 하루도 편히 다리를 뻗고 자지 못 할 거다!”
벽력같은 고함 소리와 함께 웅장한 에너지가 폭발하며 한샘의 몸이 귀신처럼 서천우를 향해 날아갔다.
열기를 머금은 한샘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자, 주위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이에 맞선 서천우 역시 곧바로 염력을 폭발시키며 주먹을 들어올렸다.
퍼—엉!
두 투종 강자가 대결을 벌이자 강렬한 에너지가 폭발하며 사방에서 회오리가 일었고, 회색과 검은색의 그림자가 맞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할 때마다 굉음이 울려 퍼졌다.
서천우와 한샘이 맞붙는 것과 동시에 방언과 나머지 두 명의 장로는 곧바로 삼각형의대형을 이룬 채 이준에게로 날아갔다.
세 명의 강자가 이준을 향해 움직이는 것을 발견한 아라는 곧바로 그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날리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막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 모천행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네 상대는 나야. 한 눈 팔지 말라고.”
그렇게 아라와 서천우가 각각 모천행과 한샘에게 붙잡혀 있는 사이, 마염곡의 세 장로는 이미 옥 상자를 들고 있는 이준에게 도착해 있었다.
“흑각성 전체에서 명성이 자자한 이씨 가문의 가주를 죽일 기회가 오다니. 이거 아주 영광이군.”
세 명의 강자가 자신을 둘러싸자, 이준은 곧바로 자신의 저장 반지에 보리수의 점액이 들어있는 옥상자를 집어넣은 뒤 검은 송곳을 빼들었다.
“죽일 기회를 얻은 건지, 내 손에 죽을 기회를 얻은 건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
“끌끌……. 새파랗게 어린 것이 건방지기 이를 데 없구나.”
세 명의 장로를 눈앞에 두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이준의 대범한 태도에 방언은 기가 차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좋아. 어디 이걸 보고도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태도를 유지하는지 한번보자고.”
말을 마친 방언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으며 돌연 다른 두 장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둘째 장로, 셋째 장로!
방언이 소리치자, 옆에 있던 두 명의 장로가 빠르게 날아가 거리를 벌리더니 재빨리 인을 맺기 시작했고, 이내 그들의 몸에서 회색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곧이어 세 개의 불꽃이 하나로 모여들며 뒤엉키더니 온 산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만들어 낸 회색 불꽃의 온도는 천지의 불꽃에 버금가는 수준의 온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네 놈이 천지의 불꽃을 가지고 있다지? 우리 마염곡의 불꽃과 네 놈의 천지의 불꽃 중 무엇이 더 강한지 한번 겨뤄보자!”
마염곡의 장로들이 만들어 낸 불꽃은 마치 회색 태양처럼 하늘 위에 떠오른 채 쉴 새 없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불꽃의 온도는 이준이 가진 대지의 불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물론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었다.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 낸 것이 수 백, 수 천 년에 걸쳐 형성된 에너지의 응집체인 천지의 불꽃을 뛰어넘을 수 있다면 왜 세상 모든 연금술사들이 천지의 불꽃을 탐하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실로 놀라운 힘을 가진 불꽃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진짜 천지의 불꽃을 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들이 만들어 낸 회색 불꽃을 천지의 불꽃이라고 착각할지도 모를 정도의 온도였다.
방언이 손을 휘두르자, 회색 불꽃은 다시 세 갈래로 나뉘어 세 장로의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불꽃 덩어리를 흡수한 세 사람의 기운은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강력했고, 이내 뜨거운 열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정작 이 무시무시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이준의 입가에는 조소가 어려 있었다.
“세 분이 기껏 염력을 모아 불꽃을 만들어냈는데 남에게 상처 입히기도 전에 본인이 다친 것 같은데요?”
“역시 천지의 불꽃을 가진 자라 그런지 예리한 구석이 있군. 어디 네 불꽃을 한번 꺼내 보거라. 소문대로 천지의 불꽃이 이 악마의 불꽃보다 강력한지 보자꾸나!”
“악마의 불꽃이라……. 허접한 불꽃치고는 이름이 너무 거창하군요.”
이준이 천천히 인을 맺자, 청록색 불꽃이 화산처럼 소용돌이치며 그의 몸을 감싸 안았다가 다시 재빨리 몸속으로 흡수되더니 그의 염력이 미친 듯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대는 이미 이준이 염력을 증가시키는 비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게다가 자신은 투종에 반쯤 발을 걸친 수준의 강자였고, 나머지 두 장로 역시 투황 최고 수준의 강자였으니 4성 투황인 이준이 비술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패배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자신이 있기는 이준도 마찬가지였다. 일 대 삼으로 육탄전을 벌인다면 자신이 불리하겠지만, 상대가 먼저 불꽃을 이용해 싸움을 걸어왔으니 진짜 천지의 불꽃을 가진 그로써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준이 손가락을 구부려 불꽃을 소환하자, 청록색이 아니라 옅은 푸른색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번에 그가 불러낸 것은 청연의 불꽃이 아니라, 그의 첫 번째 불꽃인 대지의 불꽃이었다.
“그게 바로 그 잘난 천지의 불꽃이군!”
이준의 손에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한 방언은 기다렸다는 듯이 인을 맺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몸을 휘감고 있던 회색 불꽃이 거대한 불새로 변하더니, 날카로운 부리를 앞세워 이준을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회색의 불새가 채 그에게 닿기도 전에 허공에 옅은 청색의 불꽃 그물이 만들어져 불새를 옭아맸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방언이 번개처럼 인을 바꾸자, 회색의 불새가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며 푸른 그물을 태우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진짜 천지의 불꽃으로 만든 불꽃 그물이 가짜 천지의 불꽃에 의해 타들어가는 모습에 이준은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온도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준이 염력을 끌어올리며 주먹을 움켜쥐자, 청색의 불꽃 그물이 더욱 뜨겁게 타오르며 다시 한 번 불새를 옭아맸다.
치익!
결국 대지의 불꽃이 제 힘을 발휘한지 얼마 되지 않아 회색의 불새는 갈기 갈기 찢겨 형체를 잃고 말았다.
“쳇.”
하지만 이준의 예상과는 달리 불꽃은 그대로 사라지지 않고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갔고, 이내 방언의 염력이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 방금 전 보다는 조금 기세가 누그러져 있기는 했지만, 상당량의 염력이 그에게로 다시 돌아간 것 같아 보였다.
그 순간, 이준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어떤 생각 하나가 스쳤다.
악마의 불꽃은 천지의 불꽃은 제외한다면 그가 보아온 그 어떤 불꽃보다도 강력했다. 그리고 그의 염력 수련법인 ‘불개’는 불꽃을 흡수해 성장하는 수련법이었고, 그 불꽃이 꼭 천지의 불꽃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과거 이준 역시 ‘하늘 사자의 불꽃’을 흡수해 불개를 진화시키려 했던 적이 있지 않았던가.
물론, 천지의 불꽃에 비하면 다른 불꽃을 흡수하는 것은 그 효과가 너무 미미해 큰 쓸모가 없었지만, 마염곡의 불꽃 정도라면 자신의 수련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둘째 장로, 셋째 장로!”
그렇게 이준이 한창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방언이 또 다시 두 장로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하늘 봉황!”
방언의 명에 따라 두 장로가 이를 악문 채 인을 맺자, 이내 세 갈래의 짙은 회색 불꽃이 뒤엉키며 거대한 새의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세 사람의 불꽃이 융합되어 만들어진 거대한 새는 그 크기가 무려 3미터에 달했고,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거대한 아지랑이를 피워내며 사방으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 무시무시한 불꽃 에너지의 결정체를 바라보는 이준의 눈은 공포가 아닌 기쁨으로 물들어 있었다.
새파란 하늘 위에서 거대한 새가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주위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열기를 뿜어댔고, 이에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마치 한낮의 사막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거대한 몸집의 회색 불새를 만들어 낸 마염곡의 장로들은 마치 화련을 만들어 낸 이준처럼 얼굴에서 핏기가 가셔 있었다. 아마도 이 ‘하늘 봉황’이라는 것이 그들의 비장의 수인 모양이었다.
“이씨 가주, 우리가 만든 ‘하늘 봉황’이 어떤가?”
비록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이준을 바라보는 방언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가짜치고는 제법 그럴 싸 하네요. 겨울을 따뜻하게 나는 데는 부족함이 없겠어요.”
이준의 조롱섞인 말투에 방언 장로의 핏기 없는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흥, 좋아. 그럼 어디 그 잘난 천지의 불꽃이 이 하늘 봉황을 막아낼 수 있는지 확인해보지.”
그의 인이 변화하자 거대한 회색 봉황이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더욱 세차게 날개를 펄럭이기 시작했고, 돌연 불꽃으로 만들어진 깃털들이 이준을 향해 화살처럼 쏟아졌다.
칙! 칙!
그러나 수백 개의 불꽃 깃털은 끝내 이준의 몸 앞에 펼쳐진 청색의 불꽃 보호막을 뚫지 못하고 모두 불타 사라지고 말았다.
“이, 이럴 수는 없어. 우리 마염곡이 자랑하는 악마의 불꽃이…….”
방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사지를 덜덜 떨며 다시 한 번 이준을 향해 불꽃 깃털을 날려보았지만, 아무리 많은 깃털을 날려 보내도 이준의 불꽃에 닿는 순간 마치 불꽃에 닿은 얼음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뿐 이었다.
“거봐요. 이름이 너무 거창하다고 했잖아요. 악마의 불꽃은 무슨……. 고기 구울 때나 쓸 불꽃을 싸움에 쓰려고 하니 이 꼴이 나는 겁니다. 차라리 이 불꽃을 만들 염력으로 육탄전을 하시지 그랬습니까.”
이준이 그들의 자랑인 악마의 불꽃을 조롱하자, 방언을 비롯한 마염곡의 장로들의 얼굴이 더욱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네 이놈……! 감히 우리 마염곡의 불꽃을! 둘째 장로, 셋째 장로!”
방언은 분통을 터뜨리며 곧바로 단도를 꺼내 자신의 팔뚝을 그었고, 이에 나머지 두 장로도 단도를 꺼내 자신의 팔뚝을 그었다.
곧이어 세 사람의 팔에서 흘러내린 피가 물방울처럼 모여 들더니 그대로 하늘 봉황에게 흡수되었다.
세 사람의 염력을 듬뿍 머금은 혈액을 흡수한 봉황은 서서히 붉은 빛을 띠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짙은 피비린내가 풍겨 나오며 봉황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에너지가 폭발했다.
“녀석을 죽여라!”
방언의 눈은 마치 피 눈물을 흘린 것처럼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붉은 봉황의 동굴 같은 눈동자 역시 핏빛으로 물들었고,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하늘 가득 울려 퍼졌다.
다음 순간, 하늘 봉황이 살기로 눈을 번뜩이며 이준을 향해 날아들었다.
붉은 색의 봉황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심상찮은 열기를 감지한 이준은 곧바로 염력을 끌어올려 푸른색의 불꽃 그물을 만들어냈다.
불꽃 그물에 붙잡힌 봉황은 격렬하게 날갯짓을 거듭하며 계속해서 이준을 향해 달려들었고, 칼날 같은 부리를 이준에게 향한 채 쉴 새 없이 괴성을 내질렀다.
“어딜 감히!”
하지만 이준이 주먹을 움켜쥐자, 새파란 불꽃 그물이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붉은 색의 봉황을 더욱 더 세차게 옥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