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1화. 회색 망토의 정체
“젊은이, 저 늙은이의 말을 믿나? 저 자는 분명 나를 처리한 뒤 입을 막기 위해 자네를 죽이려 들걸세. 투종인 나를 상대로도 이런 짓을 벌이는데, 자네와 정말로 거래를 하겠는가?”
영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돌연 모천행의 손에서 금빛 염력이 폭발하더니 커다란 구렁이의 형상으로 변해 그를 덮쳤다.
이에 맞서 영산 역시 주름이 가득한 손바닥을 내밀었고, 이내 두 개의 염력이 부딪히며 온 산이 뒤흔들렸다.
“임현 선생, 이 늙은이가 맹세하지요. 투종의 열쇠만 우리 흑황종에 넘겨준다면 보리수의 점액은 선생의 것이 될 것입니다.”
이준이 모천행과 영산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을 때, 갑자기 허공 위에 또 다른 그림자가 나타났다.
“모 종주, 진짜로 손을 잡을 사람이 필요하면 우리 마염곡이 최상의 선택이 아니겠습니까?”
고개를 들자, 회색 망토를 걸친 의문의 사내를 필두로 방언과 마염곡의 장로들이 허공에 떠있는 것이 보였다.
“마염곡……?”
예상 밖의 상황에 이준의 안색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이렇게 된다면 자신이 누구를 선택하느냐 고민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영산의 표정 역시 어둡기는 매한가지였다. 본래 영혼 분신을 사용해 아무도 모르게 흑황성을 빠져 나가려던 그의 계획은 이미 완전히 실패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준으로도 모자라 또 다른 세력이 등장하자, 모천행의 표정은 완전히 울상이 되어 있었다. 잠시 말없이 이마를 감싸 쥔 채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마염곡 장로들의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런데 이 분은 누구시죠? 이 늙은이의 소견으로는 마염곡 곡주님은 잠시 일선에서 물러나 수련에 전념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선생님은 우리 마염곡의 손님이십니다. 모 종주님은 우리 마염곡에 꽤 오랫동안 발걸음을 하지 않았으니 자연히 모르시겠죠.”
모천행의 말에 간단하게 답을 한 방언은 곧바로 이준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분은 임현 선생이군요. 아, 그보다는 이씨 가문의 가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으려나요?”
“뭐라고?”
방언의 한마디에 모천행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이런, 모 종주님께서는 아직 모르셨던 모양이군요. 임현 선생이 바로 이씨 가문의 가주입니다. 이 뭐라고 했는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통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한 때 흑각성에서도 꽤 명성이 자자했지요. 그 대단한 약황 한샘과 김씨 형제도 이 분에게 무릎을 꿇었으니까요.”
이준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모천행의 눈길을 애써 무시한채 회색 도포를 입은 사내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이전에 받았던 그 기묘한 느낌이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이 음산하고도 강렬한 기운은 분명히 어딘가에서 느껴본 적이 있는 것 이었다.
“큭큭……. 날 알아보는 것인가?”
사내의 입에서 낯익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는 순간, 이준의 뇌리에 무언가가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말을 마친 사내는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망토를 천천히 벗어던졌다.
“역시나 너였군.”
사내가 망토를 벗어던지기 무섭게 이준의 눈빛이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이준 앞에 나타난 사람은 이준이 직접 목숨을 끊은 약로의 첫 번째 제자이자 과거 흑각성 최고의 연금술사였던 ‘약황(藥皇)’ 한샘이었다.
이준을 바라보는 한샘의 눈빛에는 감출 수 없는 살기가 가득했다. 이준만 아니었다면 그는 계속해서 흑각성의 약황으로 군림할 수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구름 불꽃을 손에 넣어 스승인 약로보다도 더 대단한 존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결국 그는 이준에게 패했고, 이로 인해 자신의 지위를 잃었을 뿐 아니라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고 말았다. 영혼의 궁전이 그를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영혼마저 소멸해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영혼의 궁전에게 도움을 받기 위해 그는 자신의 보물인 ‘바다의 불꽃’을 바쳐야 했고, 그 대가로 투존 강자의 몸을 받아 연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받은 투존 강자의 몸은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니, 영혼과 육체가 서로 거부반응을 일으켜 십년 뒤면 육체가 붕괴되고 영혼이 소멸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준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은 그는 자신에게 남은 십 년을 오로지 이준에게 복수하는데 쓰기로 결정했다. 마염곡과 손을 잡은 것도 오로지 이씨 가문을 멸망시켜 원한을 풀기 위함이었다.
만일 보리수의 점액이 아니었다면 흑황성에 들를 일도 없이 곧장 이씨 가문으로 향해 이준과 관련된 모든 이를 죽였을 것이다.
그런데 보리수의 점액을 찾는 과정에서 뜻밖에도 이준을 만나게 되었으니, 그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이준 역시 스승을 영혼의 궁전에 끌려가게 만든 장본인이 살아있는 것을 보자,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배신자 자식. 아직 살아 있을 줄 몰랐는데 말이야.”
“흥, 이번에는 내가 네 영혼을 뽑아내주지.”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동자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현재 이준은 4성 투황으로, 몇 년간 투종 강자들과 사투를 벌이며 급격하게 실력을 성장시켜 왔다. 한편 한샘 역시 투존의 육체를 손에 넣음으로써 살아있을 때 보다 더욱 강한 힘을 손에 넣었으니, 두 사람 중 누가 더 강한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직접 겨뤄보는 수밖에 없었다.
“큭큭, 이번에는 매번 널 감싸고돌던 그 늙은이도 없으니 마음 놓고 네 놈을 죽여 버릴 수 있겠군.”
화륵!
한샘의 입에서 약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이준의 몸에서 청록색 불꽃이 터져 나오며 주위의 공기가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한샘의 말에 이준은 완전히 이성의 끈을 놓아 버린 듯했다. 스승이 끌려가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 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자,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약로는 지금의 그를 만든 두 번째 아버지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약로가 영혼의 궁전에게 잡혀 가고, 한샘이 이준의 상처를 헤집자, 하루 빨리 실력을 길러 아버지와 스승을 되찾아야겠다는 생각이 새삼스레 더욱 강해졌다.
힘이 있어야 영혼의 궁전 손에서 아버지와 약로를 구해올 수 있었고, 힘이 있어야 은이를 곁에 붙잡아 둘 수 있었다.
이준의 힘의 근원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그의 힘의 원천은 ‘천지의 불꽃’이었다. 더욱 강해져 영혼의 궁전마저 벌벌 떨 정도의 힘을 얻기 위해서는 더욱 미친 듯이 새로운 불꽃을 찾아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천지의 불꽃을 얻어야 해. 내 앞길을 막는 사람들은 모두 죽여 버리겠어.’
이준은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며 싸늘한 눈으로 한샘을 노려보았다.
“살아나줘서 고맙다. 널 다시 죽일 수 있어서 다행이야. 아직 분이 안 풀렸거든.”
마치 미친 사람처럼 살기를 폭발시키는 이준의 모습에 제법 긴 시간 그를 알고 지내던 아라와 보람마저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토록 분노하는 이준을 보는 것은 그녀들에게도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네 놈 실력으로 나를? 사제, 주제 파악이라는걸 좀 하게나.”
한샘이 이준을 비웃자, 아라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입을 열었다.
“네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몰라도 투종 강자를 상대로도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을까?”
아라의 회보라빛 눈동자가 기이한 빛을 발하며 그녀의 손에서 회색 염력이 피어오르자, 한샘의 얼굴에 대번이 일그러졌다.
“큭큭, 사제, 지난번에도 그렇고 언제까지 다른 사람 힘에 의지해서 싸울 셈인가?”
“뭐, 지금 사형도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이건 뭐 시체도 아니고 그렇다고 산 사람도 아니고……. 예전보다 강해진 것 같기는 한데, 죽어서 실력이 나아졌으니 나한테 고마워 할 일 아닌가?”
이준의 조롱에 한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말재주는 여전하군.”
한샘과 이준의 살벌한 대화에 모천행도 짐짓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됐든 갑자기 나타난 두 강자가 이토록 원한이 깊다는 것은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호재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열심히 싸우다 둘 다 죽어버리면 그것만큼 바람직한 것도 없었다.
“뭐, 어찌됐든 우리 사제가 워낙에 인기가 많은 것 같아서 나도 이번에는 나를 도와줄 친구들을 좀 데리고 왔지. 지난번과는 많이 다를 거야.”
한샘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의 뒤에 서있는 방언과 마염곡 장로들이 앞으로 나섰다. 반쯤 투종 계급에 발을 걸치고 있는 방언과 마염곡의 다른 장로들이 힘을 합친다면 어지간한 투종 강자 한명쯤은 상대할 수 있었다.
“어디 지난번과 얼마나 다른지 한번 볼까?”
바로 그 때, 천둥과도 같은 목소리가 하늘 위에 울려 퍼지더니 이내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산 위로 내려앉았다.
갑자기 등장한 노인의 모습에 한샘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공중에 나타난 백발의 노인에게서 뿜어지는 무시무시한 기세에 마염곡 장로들의 얼굴에도 긴장한 기색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 어떻게 네 놈이 살아있는 것이지? 게다가 실력까지 늘었군.”
“당신들 덕이지.”
서천우 대장로의 등장에 한샘의 마음이 무겁게 내려 앉았다. 투종 강자 둘에 투왕 시절부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정도의 실력을 가졌었고, 이제는 투황이 된 이준까지……. 마염곡의 장로들만 데리고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역시 오래 살고 볼 일 이군. 이 나이 먹도록 같은 사람을 두 번 죽여 본 경험은 없었는데, 오늘 신기한 경험을 하게 생겼군.”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영산 장로의 얼굴에도 그늘이 드리웠다. 투종 강자 둘에 제법 만만찮은 힘을 가진 투황 둘까지……. 그에게는 어느 쪽이 됐든 새로운 강자가 가세하는 것 자체가 달갑지 않은 일 이었다.
“대장로님, 어떻게 오셨어요? 그쪽 일은요?”
“영혼의 분신이 사라져버려서 네가 남긴 흔적을 따라 온 거란다. 네 형과 이씨 가문 사람들도 이쪽으로 오고 있다.”
서천우가 영산 노인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사라졌다고요?”
이에 이준이 멈칫하며 시선을 영산에게로 돌렸다.
그 순간, 무형의 영혼 에너지가 번개처럼 날아와 영산의 몸속으로 흡수됐다. 영혼 에너지가 돌아오자, 영산의 기운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치솟기 시작했다.
현재 그의 전투력은 자리에 있는 그 누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 때, 돌연 모천행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모두 보리수의 점액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같이 연합해서 저 물건을 빼앗아 오는 게 어떻습니까? 이렇게 저희끼리 싸우다가는 영산 장로가 보리수의 점액을 가지고 달아나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 물건을 어떻게 나눌지에 대해서는 천천히 해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천행의 제안에 그 동안 서로 잡아먹을 듯 살기를 피워대던 이준과 한샘 사이에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한샘이었다.
“너와 내 문제는 나중에 해결해도 되지만, 보리수의 점액은 지금 놓치면 다시 구할 수 없으니 우선 이 문제부터 해결하지. 어때?”
이준은 잠시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가 아라와 서천우를 바라봤다.
“그렇게 하거라. 다만 저 음흉한 놈이 속으로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을지 모르니 절대 안심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