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0화. 영혼 분신술
갑자기 나타난 열 명 정도의 그림자에 영산 노인의 바로 뒤에 있던 사람들도 발걸음을 멈춰 섰다.
가장 먼저 치고 나온 열 명의 투사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것은 반백의 투왕 강자였다. 나머지 사람들 역시 하나 같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물론 그들의 실력으로는 감히 영산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탐욕을 이기지 못하고 영산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들이 숲 속 곳곳으로 흩어져 영산을 포위하자, 영산을 뒤따르던 다른 무리들이 일제히 발걸음을 멈추고 상황을 살폈다.
만에 하나라도 그들이 영산의 손에서 보리수의 점액을 빼앗는데 성공한다면 그들을 죽이고 그 보물을 손에 넣으면 그만이었다. 그들이 보리수의 점액을 빼앗는데 실패한다 하더라도 영산의 염력을 갉아먹어 주기라도 한다면 고마웠고, 운 좋게 상처라도 하나 내준다면 더욱 좋았다.
그렇게 모두 몇 개나 되는지도 모를 눈들이 모두 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드디어 열 개의 그림자가 무기를 빼어들고 천천히 영산을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영산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느긋하게 발걸음 옮길 뿐 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모두의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영산의 뒤를 쫓던 자들이 갑자기 무언가에 홀린 듯 무기를 떨어뜨리며 숨이 끊어지고 만 것이다.
그들이 쓰러지기 무섭게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사방에서 화살비가 쏟아졌다. 숲 속에 또 다른 무리가 숨어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영산의 몸 근처까지 날아갔던 화살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돌연 방향을 틀어 숲속으로 되돌아갔고, 이내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죽여!”
“저 늙은이를 죽여야 보리수의 점액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보리수 점액을 찾아 투성 강자가 되면 흑각성은 우리 것이다!”
두 무리의 공격을 시작으로 온 산에 흩어져 있던 도적떼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영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보리수의 점액에 눈이 먼 그들은 이미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영산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가볍게 손을 휘둘러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투사들을 하나 둘 쳐죽였다. 그가 손을 움직일 때 마다 폭풍과도 같은 염력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갔고, 그 때마다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퍼지며 피 냄새가 퍼져 나갔다.
한편, 산 정상에 있던 이준은 가만히 사태를 관망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뭔가가 이상했다.
“아무리 투종이라도 저런 식으로 해서는 어려울 텐데…….”
이찬의 말 대로였다. 아무리 투종이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 해서는 그의 뒤를 쫓아오고 있는 수많은 강자들을 상대할 수 없었다. 지금 그의 손에 죽어나가는 자들은 대체로 투령급 강자들이었고, 더러 투왕이 끼어있기도 했지만 투왕 최고봉 수준의 강자는 없었다. 투왕 최고 수준이나 투황급, 더 나아가 투황 최고 수준이나 투종급 강자들이 나선다면 금세 염력이 바닥날 것이고, 얼마 가지 않아 수십 명의 강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죽음을 맞이할 것이 뻔했다.
“이준. 뭔가 이상해. 이건……. 투종이 아니야.”
그 때, 이준의 곁에 있던 아라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모르겠어.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고. 저 자는 분명히 투종 강자라고 했잖아. 그것도 서천우 대장로님 이상급의……. 그런 것치고는 뭔가 이상해. 그 정도 수준의 강자의 염력치고는 너무 탁하고 옅어.”
아라 역시 투종 강자였으니, 그녀의 말이 헛소리일 리가 없었다. 이에 이준은 온 정신을 집중해 다시 한 번 영산의 모습을 살펴봤다.
하지만 영혼 탐지 능력을 총동원해도 여전히 흐리멍텅한 형상만 보일 뿐, 그의 존재를 제대로 감지해낼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의 몸에 두르고 있는 투종의 강력한 염력이 탐지를 방해하는 것 같았다.
이준은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영혼 감지력을 더욱 증폭 시켰다. 영혼 에너지의 급격한 파동에 머리가 아파왔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더욱 정신을 집중했다. 영산이 보란 듯이 성을 나온 것부터 시작해서 지금의 상황까지, 무언가 이상해도 단단히 이상했다. 게다가 투종 강자인 아라가 상대에게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고 하니 그 기묘한 위화감이 그의 가슴속에서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약 2분이 흐르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아파올 무렵, 드디어 영산의 몸을 감싸고 있던 무형의 에너지를 뚫고 이준의 영혼 에너지가 그의 몸에 닿았다.
간신히 영산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무형의 장막을 뚫고 그의 실체를 확인한 순간, 이준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빌어먹을! 속았어! 저건 영산이 아니야!”
“뭐라고?”
숲 속에 누워있던 이준이 벌떡 몸을 일으키자, 서천우 대장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저기 밑에 저건 가짜예요!”
“그게 무슨 말이냐? 가짜라니?”
“빌어먹을! 어떻게 이럴 수가……. 저건 영혼의 힘과 염력을 섞어 만든 가짜라고요.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렇게 강력한 영혼을 가질 수 있지? 스승님을 제외하면 여태 이 정도로 강한 영혼의 힘은 본 적이 없어요.”
“설마…… 영혼 분신술?”
영혼과 염력을 섞어 만든 가짜라는 말에 서 장로와 아라가 동시에 이준을 바라봤다. 두 사람 투종 강자였지만, 영혼 분신술을 사용하는 것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만일 정말로 영혼 분신술을 사용할 수 있다면, 영산의 실력은 그들이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젠장! 생각도 못했어!”
“그럼 어떻게 해? 저게 가짜라면 본체는 진작에 다른 곳으로 떠났을 거 아니야?”
세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찬이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물었다.
“기다려봐!”
이준은 황급히 정신을 집중해 하늘에 대고 자신의 영혼 에너지를 날려보냈다.
영혼의 힘으로 분신을 만들게 되면, 분신이라 하더라도 상당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일반적인 분신과는 달리 한없이 실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영혼 분신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실제로 시전자 본인의 영혼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신과 본체가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거기엔 여전히 한 가닥의 연결고리가 있으니, 만약 그 무형의 연결고리만 찾아낸다면 영산 노인의 본체도 찾아낼 수 있었다.
이준은 자신의 영혼의 힘을 총동원하여 사방을 탐색했다.
보통 투황이나 투종 수준의 강자라 하더라도, 염력에 비해 영혼의 힘이 크게 부족한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준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영혼의 힘이 강한 사람이었고, 그의 영혼에너지는 약로마저도 감탄할 수준이었으니 이런 방식으로 영산의 본체를 찾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서 장로를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은 이준을 방해하지 않게 숨소리조차 죽인 채 조용히 결과를 기다렸다.
한편 숲 속에서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잠자코 기회만 엿보던 세력들이 공격에 동참하면서 점점 더 격렬한 전투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 중에는 제법 실력이 있는 강자들도 섞여 있었지만, 영산의 분신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게 몇 분이 더 지나고, 마침내 이준이 눈을 떴다.
“찾았어?”
“응. 비록 가늘긴 하지만 분명히 영산의 영혼 분신과 본체를 이어주고 있는 염력이 느껴졌어. 그런데 생각보다 멀리 가지 않았어.”
말을 마친 이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아라와 보람을 가리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아라와 보람이를 데리고 그 노인네를 찾아볼게요. 나머지 사람들은 여기서 기다려줘요.”
“셋이서만 간다고?”
다른 사람들을 대기시키고 셋이서 영산을 쫓겠다는 이준의 말에 서천우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괜찮아요. 아라도 투종이니까 쉽게 당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보다 지금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일단 인원을 나눠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쪽이 본체가 확실하다면 곧바로 연락을 드릴게요.”
이준은 그 말만을 남긴 채 황급히 날개를 펼쳐 야트막한 산봉우리를 넘어 사라졌다.
* * *
서 장로 일행이 지켜보고 있던 숲속과 달리 흑황성 동쪽의 편벽한 산길엔 적막함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적막한 산의 숲 깊은 곳에서는 백발의 노인 하나가 두 눈을 감은 채 무시무시한 영혼의 힘으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주름이 가득한 노인의 열 손가락은 별처럼 반짝였고, 그 손가락들이 움직일 때마다 주위를 맴돌던 영혼의 힘에서 더욱 강한 파동이 일어났다. 모든 것이 그의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갑자기 무언가가 자신의 주위로 다가오는 것을 느낀 노인의 입가에 쓴 웃음이 번졌다.
“거기 누군가?”
“허허, 영산 장로님의 실력은 정말 소문 그대로군요. 설마 전설의 영혼 분신술을 사용하실 줄이야.”
자리에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모천행이었다.
“모 종주님이 여기까진 어떻게 오셨는지요? 흑황종의 명성에 누가 되는 일이라도 하러 온 겁니까?”
“허허, 우리 흑각성에 명성이라는 단어가 있기는 한가요.”
모천행의 대답에 영산의 두 눈에 곧바로 살기가 돌았다.
“보리수의 점액에 뭔가 손을 써두신 모양이군요.”
“허허, 뭐……. 그렇다고 해두지요. 시간을 벌려는 모양인데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보리수의 점액을 저에게 넘기세요. 이미 영혼 분신에 많은 힘을 썼을 테니 제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영산 장로님도 잘 아실 텐데요.”
정당하게 낙찰 받은 물건을 경매를 연 장본인이 강탈할 생각이었다니, 아무리 흑각성이라 해도 너무나 비겁한 짓 이었다. 게다가 지금 보리수의 점액을 빼앗긴다면 영산 입장에서는 그 귀한 부활의 영약을 공짜로 갖다 바친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결코 물러설 수 없었다.
“모천행, 지금 내 상태가 정상은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네 놈 따위가 내 상대가 될 거라 생각했단 말이냐?”
“그거야 해보면 알지 않겠습니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사람의 몸에서 무시무시함 염력이 폭발하며 주위의 땅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하하하!”
그렇게 두 투종 강자가 막 맞붙으려는 찰나, 돌연 호탕한 웃음소리가 둘의 귓등을 때렸다.
갑작스레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모천행과 영산의 시선이 동시에 허공으로 향했다. 세 개의 그림자가 날개를 펄럭이며 그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우리 임현 선생도 이 늙은 영감탱이의 속임수를 알아챘군요. 실로 대단합니다.”
“모 종주님도 계실 줄 몰랐네요. 저도 많이 놀라고 있습니다.”
이준의 한마디에 모천행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경매의 주최자인 자신이 손님을 상대로 도적질을 했다는 소문이 난다면 흑황종은 두 번 다시 경매를 열 수 없었다. 아무리 무법천지인 흑각성이라지만, 경매에 참여한 자들이 물건을 도둑질 하는 것도 아니고 경매의 주최자가 손님의 물건을 강탈한다면 그 누가 그들을 믿고 경매에 참여하겠는가.
순간 모천행의 주먹에 핏줄이 불뚝 솟았다. 이렇게 되면 보리수의 점액을 손에 넣고 이준을 죽여 입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애써 되찾은 보리수의 점액으로 투종의 열쇠를 얻겠다는 계획은 포기해야 했다. 게다가 이준 일행과 영산이 손을 잡기라도 한다면 이 자리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자신이 될지도 몰랐다.
반면 영산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이준과 모천행이 싸움을 벌인다면 그 사이 영혼 분신을 회수하고 자리를 피할 수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허허, 임현 선생, 이 늙은이한테 좋은 제안이 있는데 들어나 보겠나?”
“얘기해 보시죠.”
“임현 선생이 여기에 온 목적이 보리수의 점액이라는 걸 이 늙은이도 알고 있다네.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는가? 우리 둘이 손을 합쳐 저 영산 늙은이한테서 보리수의 점액을 다시 가져오는 거지. 그리고 임현 선생께서 우리한테 약간의 보상을 주는 거지. 어떤가?”
“보상이요? 투종의 열쇠를 말씀하는 건가요?”
“허허허, 역시 우리 임현 선생은 말이 통한다니까.”
모천행의 제안에 이준은 말없이 아라를 바라봤다. 어떻게 생각하냐는 의미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