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9화. 미행
점점 뜨거워지는 화염에 마수의 사체에서 피어오르던 선홍색의 안개도 점점 더 짙어지고, 온 방안이 붉은 색 안개로 가득 찼다.
그 안개는 한참동안 방 안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뿌연 안개 덩어리에서는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기묘한 소리까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소리가 방 안에 울릴 때마다 이준은 몸에 흐르는 피가 끓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그 순간, 갑자기 보람의 몸에서 기이한 보라색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어딘지 모르게 평소에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빛이었다.
곧이어 그녀의 눈동자가 보라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런 변화를 느끼지 못한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의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보람아…….”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이준이 다급히 그녀를 부르자, 보람의 눈빛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왜 그래 갑자기?”
어느 새 보람을 둘러싸고 있던 이상한 빛들도 다 사라진 상태였다.
이에 이준은 이 신비한 마수가 분명히 무언가 보람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이준의 머리에 이런 저런 생각이 떠돌고 있을 때, 무언가 타는 듯한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소리가 난 방향에서는 마수의 껍질이 완전히 재로 변해 흩어지고 있었다.
바닥에는 수북이 재가 쌓여 있었고, 온 방안에 가득했던 선홍색 안개는 어느새 완전히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다음 순간, 이준의 눈앞에 이상하게 생긴 작은 소용돌이 하나가 나타났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놀란 이준은 황급히 보람의 손을 잡고 뒤로 물러서며 염력을 끌어 올렸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준이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던 소용돌이가 서서히 멈춰서더니 강렬한 선홍색 빛을 한번 뿜어내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소용돌이가 사라진 바로 그 자리에는 선홍색을 띈 결정체 한 알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그 결정체가 주위의 공간은 마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 선홍색 결정체를 바라보던 이준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손바닥을 흔들자, 한줄기 부드러운 힘이 마정석을 감쌌다.
하지만 마정석을 붙잡는 순간, 돌연 이준의 눈동자에 기묘한 붉은 빛이 돌며 그의 정신이 흐려졌다.
“야!”
이준이 반쯤 정신을 잃은 듯하자, 보람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정신을 차린 이준은 선홍색의 마정석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도대체 그 마수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죽고 나서도 사람을 홀린단 말인가.
마정석을 놓아버린 이준은 저장반지에서 투명한 옥 상자를 하나 꺼내 직접 손을 대지 않고 염력으로 마정석을 조종해 그 안에 집어넣었다. 또 다시 그 물건에 닿았다가는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마정석이 얌전히 상자 안으로 들어가자, 이준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 죽어 말라비틀어진 사체 하나에 이렇게 놀라다니 창피하지도 않아?”
아직도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준을 바라보던 보람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그녀가 없었다면 이 귀중한 마수의 사체를 그냥 버릴 뻔 했으니, 지금 이준은 그녀가 마냥 고맙게만 여겨졌다.
“이제 다 끝났으니 너도 돌아가서 자. 그리고 오늘 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누구한테도 말하면 안 돼, 알았지?”
비록 그 마수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지만, 오늘 있었던 여러 가지 기이한 일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보통 마수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보통은 골치 아픈 일들이 벌어지기 마련이었다. 때문에 이준은 보람에게 이 일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보람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으니 두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이준 역시 노곤한 몸을 이끌고 침대 위로 올라가 잠을 청했다.
* * *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이준은 온 몸에서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기묘한 힘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분명 어제 밤 꽤나 많은 힘을 소모했음에도 온 몸에서 힘이 넘치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 가볍게 주먹을 휘둘러보자, 손을 내뻗을 때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나뭇잎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주먹을 내지를 때마다 전신에서 힘이 솟구쳤다. 실력이 또 다시 향상된 것이다. 어제 밤 8레벨 마수의 사체에서 나온 붉은 액체 덕분인 것 같았다.
“웅장하고 힘찬 염력이구나. 이렇게 먼 거리에 있는 내 염력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라니, 투황 강자가 확실히 다르긴 다르구나.”
“둘째 형!”
“대체 얼마나 실력이 는 거야? 아무리 봐도 투황 초입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이찬의 질문에 이준은 숨김없이 자신의 실력을 밝혔다.
“4성 투황 정도는 될 거야.”
“정말 무서울 정도로 빠르구나.”
“그러는 형도 이젠 투왕 최고 수준이잖아. 그 정도면 투기 대륙 어딜 가도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을 정도인데 뭘.”
“응. 천계의 탑 덕분이지 뭐. 가람 아카데미에서 학생도 아닌 내가 그곳에서 수련하는 걸 허락해주고 있으니까. 아참, 천계의 탑에 불꽃을 채우는 건 어떻게 할 거야? 이미 불꽃이 다 떨어져 가고 있어.”
이어지는 형의 질문에 이준 역시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이번 기회에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앞으로 갈 길이 먼데 불꽃을 충전해주기 위해 매년 천계의 탑까지 찾아올 수는 없었다.
“으음……. 알았어. 그 문제는 내가 어떻게든 해야지 뭐.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리고 형은 앞으로 거기까지 말할 필요 없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준의 손끝에서 무형의 불꽃이 피어 올랐다. 그의 손끝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작은 뱀처럼 형태를 바꿔 곧바로 이찬의 심장으로 향했다.
무형의 불꽃이 심장 안에 파고 들자, 금세 이찬의 머리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생이 자신을 해치기 위해 불꽃을 집어 넣었을 리는 없으니 그는 말없이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버텨냈다.
잠시 후, 불꽃이 잦아들며 이찬의 심장 근처에 화염 모양의 그림 하나가 생겨났다.
“이게 뭐야?”
그제야 긴장이 풀린 이찬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내며 자신의 가슴에 새겨진 그림을 바라봤다.
“응, 내가 구름 불꽃을 써서 형 몸에 불씨를 심어놨어. 수련을 할 때 그 그림에 염력을 불어넣으면, 천계의 탑에서 수련할 때랑 똑같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거야. 적어도 2년은 갈 테니까, 지금 형의 실력이라면 그 불꽃이 꺼질 때까지 충분히 투황이 될 수 있겠지.”
이찬은 신기하다는 듯 자신의 가슴에 새겨진 그림을 다시 한 번 바라보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동생은 갈수록 그가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녀석, 제법인데.”
그 때, 이씨 가문의 장로 한 사람이 마당으로 들어와 공손한 태도로 보고를 올렸다.
“가주님, 영산이라는 자가 성을 나갔다고 합니다.”
“그래? 드디어 성을 나갔다는 말이지.”
순간 이준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내려앉았다.
이찬과 이준이 대청으로 나왔을 때는 보람과 아라를 비롯해 이미 적잖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대장로님. 영산이 성을 나갔다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준이 물었다.
“그래. 나도 들었다. 그런데 뭔가 수상하구나. 몸을 숨겨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사람이 가장 많은 동문 쪽으로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고 하니…….”
“설마 진짜로 혼자 흑각성의 강자들을 모두 상대하려는 것은 아니겠죠?”
“글쎄다……. 그 미친 늙은이라면 그럴지도 모르지.”
대장로의 말에 이준은 물론이고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투종 강자라 해도 흑각성의 그 수많은 강자들을 단신으로 상대하겠다니, 완전히 제 정신이 아니었다.
“마염곡 쪽에서는 무슨 움직임이 없나요?”
“그 놈들도 이미 영산의 뒤를 쫓고 있는 것 같더구나. 바로 손을 쓰지는 않고 상황을 살피다가 적절한 시기를 봐서 움직이겠지.”
“그렇다면 우리도 움직여야겠네요. 그 자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미친 짓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움직여야 보리수의 점액을 얻을 수 있지 않겠어요?”
“으음……. 그건 그렇지. 일단 우리도 출발하자꾸나.”
* * *
이준 일행이 흑황성을 떠났다는 소식이 흑황종 내에 퍼지자, 모천행과 기문산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표정을 구겼다.
“임현이 이씨 가문과 함께 하다니……. 정말이지 예상 밖이군요.”
“흐음……. 골치가 아프게 됐구나. 2격 무투기로 이씨 가문과 사이가 틀어졌으리라 생각했는데 어째서 그들과 손을 잡았을까? 설마 그 놈들이 그 무투기를 임현에게 넘기기라도 한 건가?”
모천행과 기문산의 곁에 있던 모어 역시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면 투종의 열쇠를 얻는 것이 더 어려워진 것 아닙니까. 이를 어찌한단 말입니까.”
투종의 열쇠는 기문산의 실력으로도 만들 수 없는 것이었으니, 이번에 임현을 놓친다면 그들로써는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아무리 오랜 시간을 기다려도 다시는 투종의 열쇠를 구하지 못할지도 몰랐으니 모어가 초조해 하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어떻게든 놈들을 갈라놓아야지. 지금은 일단 조용히 기다리거라. 그보다 지금은 영산 장로에게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흑각성의 모든 세력들이 그 자를 주시하고 있으니까. 운만 조금 따라준다면 그 물건을 다시 손에 넣어 임현과 거래를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모천행의 말에 모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제와서 서두른다고 투종의 열쇠가 굴러들어오는 것도 아니었으니, 일단은 영산에게 집중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만일 보리수의 점액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그것과 투종의 열쇠를 교환하면 그만이었다.
“종주님, 하지만 그 자의 행동이 영 꺼림칙하지 않습니까? 흑각성의 강자들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보란 듯이 그 물건을 손에 들고 밖으로 나가다니요.”
그 순간, 모천행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걱정 말게. 이 때를 위해 준비한게 있지 않은가. 그 늙은이가 무슨 수를 쓰든, 결국 마지막에 웃는 것은 우리 흑황종이야.”
* * *
한편, 이준 일행은 작은 산 위에 몸을 숨긴 채 영산의 행적을 쫓고 있었다.
산속에 매복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 백발의 노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노인의 뒤로는 수 십 개의 그림자가 어수선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의 속내야 뻔했지만, 영산의 실력이 실력이다 보니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그를 쫓을 뿐 이었다. 영산 역시 이를 알면서도 굳이 먼저 손을 쓰지 않고 느긋하게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확실히 뭔가 생각이 있는 모양이구나. 날지도 않고 달리지도 않고 저리 느긋하게 이동하다니…….”
영산의 여유로운 걸음걸이를 지켜보던 서천우의 얼굴이 어둡게 내려 앉았다. 지금 영산의 행동은 마치 더 많은 강자들이 자신을 노리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마염곡 사람들은요?”
“그들도 저 노인네 뒤를 밟고 있겠지. 그들은 모두 마염곡의 정예 중 정예이니, 쉽게 눈에 띄지는 않을게다.”
서 장로의 말에 이준은 고개를 숙이고 수풀 사이로 드러난 큰 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확실히 이상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보란 듯이 대로로만 다니는 거지? 게다가 투종 강자의 속도라면 어지간한 강자들은 모두 떨궈낼 수 있을 텐데 이건 마치…….’
이준이 혼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래쪽에서 영산의 뒤를 따르던 그림자들이 돌연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시작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