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7화. 대책
“형, 진정해. 축하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아. 지금 형의 도움이 꼭 필요해. 가능하다면 장로님의 도움도.”
이준이 돌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도움을 요청하자, 서장로와 이찬 역시 곧바로 웃음기를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의 성격상 직접 찾아와 도움을 요청할 정도라면 상당히 중요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뭔데? 어차피 우리 가문의 가주는 너야. 도움이라니, 당연히 네 명에 따라야지.”
이에 이찬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 뒤 대청에 모여 있던 이씨 가문의 투사들에게 그들의 가주를 소개했다.
“자, 이 사람이 바로 너희의 가주인 이준이다.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니 정식으로 예를 갖춰서 인사를 올리도록.”
“안녕하십니까 가주님. 처음 뵙겠습니다.”
이찬의 명에 따라 이씨 가문의 강자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그들은 말로만 들어오던 이씨 가문의 가주가 경매장에서 보았던 그 6레벨 연금술사라는 사실에 몹시 흥분한 듯 이준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 했다.
“흠흠……. 다 같은 식구끼리 부담스럽게……. 어서 일어나세요.”
자신을 향해 깍듯하게 예를 갖추는 사람들의 태도에 이준은 다소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해댔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새로이 이씨 가문에 합류한 투사들이 몸을 일으켜 의자에 앉자, 아라와 이준도 회의실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곧이어 이준의 뒤에 있던 조그마한 여자 아이가 망토를 홱 벗어던지더니 서장로를 향해 삐죽 혀를 내밀었다.
“이 계집애도 따라온 게냐?”
“보람도 지금은 투황이에요. 아마 비슷한 수준의 투황들 중에서는 거의 최강이라고 봐도 무방할걸요.”
“저 계집애가 투황이라고?”
“흥, 빌어먹을 노친네. 너희들이 나를 내원에 가둬두지만 않았어도 진작 투종이 됐을걸!”
서천우 대장로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보람이 또 다시 혀를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어휴……. 정말이지 저 계집애를 감당할 사람은 너 밖에 없구나. 저 애물단지가 없어지고 나니 약재를 도둑질 하는 놈도 없고, 아주 속이 다 후련하구나. 그리고 온 김에 천계의 탑에도 좀 들러주면 고맙겠구나.”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천방지축 날뛰는 보람의 모습에 서천우 대장로마저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댔다.
이에 이준은 가만히 손을 들어 보람에게 주의를 준 뒤 예의 바른 말투로 대장로의 요청을 수락했다.
“네, 알겠습니다.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바로 내원으로 가겠습니다.”
잠시 후, 서 장로가 저장반지에서 빨간색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이준에게 내밀었다.
“자, 네 형이 지난 번 경매에서 얻은 무투기다.”
붉은 색 두루마리를 건네받은 이준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6레벨 연금술사와 시비가 붙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던 형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왜 쓸데없이 감동을 하고 그래? 우리 집안의 기둥은 너야. 빨리 강해져서 아버지를 구하자고. 자, 우선 오늘은 그 부탁이라는 게 뭔지나 말해봐.”
“보리수의 점액. 그게 필요해. 꼭.”
이준의 단호한 태도에 이찬과 서 장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던 일 이었다.
“너도 그 물건에 관심이 있다고?”
“응, 이 친구의 목숨이 걸린 문제야.”
이준의 말에 두 사람의 시선이 곧바로 아라에게로 향했다.
“무슨 일인지 구체적으로 얘기해 봐.”
이찬의 짤막한 한마디에 이준은 잠시 멈칫하며 아라의 눈치를 살폈다. 재난 독체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 가볍게 떠들어 대서는 안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아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준은 그제서야 그녀의 몸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재난독체?”
설명을 마치기 무섭게 서 장로의 얼굴이 어둡게 내려 앉았다.
기나긴 투기 대륙의 역사 속에서 재난 독체를 가진 강자의 출현이 의미하는 바는 언제나 똑같았다. 재앙. 그 두 글자가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재난 독체였다. 재난 독체를 가진 강자의 최후는 언제나 비참했고, 그 저주받은 체질의 소유자가 죽음을 맞이할 때는 언제나 수 천, 수 만명의 사람이 덩달아 목숨을 잃어야 했다.
“흐음……재난독체라니, 그런 어린 나이에 투종 강자가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군…….”
“그 보리수의 점액이 저 분에게 무슨 도움을 주는데?”
“아, 그 점액만 얻으면 재난독체를 완전히 제어할 수 있거든.”
이준의 대답에 대해 이찬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서천우 대장로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듯 했다.
“정말이냐? 내가 알기로는 투기 대륙의 역사 상 재난독체의 제어에 성공한 사례는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통제하기 어렵고, 실력이 강할수록 더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는 게 재난 독체의 숙명이야.”
하지만 이준의 태도는 단호했다. 이대로 아라를 죽게 만들 수는 없었다.
“장로님, 걱정하지 마세요. 재료만 다 모아지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방법이 있어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 보리수의 점액이 꼭 필요합니다.”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서 장로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휴우…… 하지만 영산 그 늙은이에게서 보리수의 점액을 빼앗는다니……. 절대로 쉽지 않을게다. 그간 흑각성의 수많은 강자들이 그 자의 손에 죽음을 맞았다. 나도 그 늙은이의 상대가 되지 못 하기는 마찬가지이고.”
“혹시 그 노인네 뒤에 다른 배경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요?”
“아니, 그건 아니다. 그 자는 성격이 괴팍해서 늘 혼자 움직여.”
“늘 혼자 움직인다고요?”
“그래. 늘 혼자지. 그게 그 자의 유일한 약점이다. 만일 나와 저 아가씨가 손을 잡는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그 보리수의 점액을 뺏는데 성공한다 해도, 흑각성의 강자들이 호시탐탐 그 물건을 노릴텐데, 그건 어찌하려고 하느냐?”
서 장로가 미간에 잔뜩 힘을 준 채 말을 이어나갔다.
“마염곡의 방언이란 놈만 해도 투종에 발을 걸친 실력자다. 마염곡의 다른 장로들이 합세한다면 투종이라 해도 상대하기가 쉽지 않을게야. 그리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마염곡 장로들과 함께 다니는 자가 하나있는데, 그 자의 실력 역시 만만치 않아. 최소한 4성 투종 정도는 되어 보이더구나.”
회색 망토를 두른 자에 대해 떠올리자, 이준의 얼굴이 대번이 어둡게 내려 앉았다. 그가 이번 일을 꾸미면서 가장 걱정했던 것도 바로 그 의문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혹시 마염곡의 곡주일까요?”
“아니야. 마염곡의 곡주는 지금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
“그럼 그 사람은 도대체 어디서 온 사람이죠?”
“글쎄다. 전에 마염곡이랑 붙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자다. 아마 최근에 마염곡 놈들과 손을 잡은 것 같구나.”
대장로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이준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하지만 절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보리수의 점액을 꼭 손에 넣어야 해요. 영산이라는 사람이 그걸 들고 사라져 버린다면 언제 또 이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있겠어요.”
“흐음……. 꼭 그 물건을 손에 넣고 싶다면, 한 가지만 명심하거라. 설사 영산 그 인간에게서 그 물건을 뺏는다 해도, 그 물건을 지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거야. 그러니 결코 성급하게 굴지 말거라.”
“네. 무슨 얘기인지 잘 알겠습니다.”
계획이 얼추 정리된 듯 하자, 이찬이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영산 쪽에는 내가 바로 사람을 붙일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을 줄테니 조급하게 굴지 말고 얌전히 기다려.”
“고마워 형.”
“아참, 그보다 가한제국 일은 다 해결된 거야? 지난번에 큰 형이 보낸 서신을 받았는데, 서북 지역의 삼대세력이 불의 연맹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면서. 이쪽도 마염곡과 전쟁이 한창이라 도와줄 수가 없어서 애만 태우고 있었는데, 네가 이쪽에 나타난걸 보니 상황이 정리된 거야?”
이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순간 이준과 아라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어어, 그거는 이미 다 해결됐어. 그보다 며칠 내내 잠을 못 자서 좀 피곤한데 숙소 좀 마련해주면 안될까?”
“흐음……. 그래, 뭐 정리됐다니 다행이네. 그럼 오늘은 그만 쉬도록 하고 내일 다른 소식 들리면 바로 연락 줄게.”
말을 마친 이찬은 곧바로 시녀에게 이준 일행이 묵을 장소를 안내하게 했다.
* * *
“너무 마음 쓰지 마.”
숙소에 도착하자, 이준이 곧바로 아라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녀를 위로했다. 그녀가 불의 연맹과 전쟁을 벌인 장본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아직까지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마워. 그만 들어가 쉬고 내일 다시 얘기하자.”
“응, 너도 얼른 들어가 쉬어.”
어느 새 늦은 시간이 된지라, 세 사람은 곧장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 * *
어둠이 깃든 흑황성의 하늘에는 가녀린 초승달 하나만이 총총이 떠 있었다. 별마저도 보이지 않는 밤이었다.
방으로 들어선 이준은 곧바로 눈을 감고 침대 위에 앉아 정신을 집중했다.
수련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천지의 기운이 주위를 맴돌다가 그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감았던 두 눈을 뜨고 천지의 기운이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드는 것을 확인한 이준은 가만히 손을 흔들어 저장반지 안에 담겨있던 물건을 꺼냈다.
쭈그린 석상처럼 방 중앙에 놓인 그 물체에서는 반딧불이처럼 은은한 형광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방 한 가운데 놓인 마수의 사체를 보던 이준은 미소를 지으면서 침대에서 내려와 천천히 마수 사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수의 사체는 이미 온 몸이 마를 대로 말라비틀어진 상태로, 도저히 그 원형을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마수의 본래 모습이 어땠는지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마정석도, 마수의 에너지도 아닌 오직 날개 뿐 이었기 때문이다.
무릎을 꿇은 채 조심스레 마수의 날개를 만져보자, 서늘한 냉기와 함께 은은한 온기가 느껴졌다. 이미 오래 전 죽은 마수의 사체에서 아직도 이런 온기가 느껴진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신비한 빛을 뿜어내는 날개 뼈에서는 은은한 에너지가 계속해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려보자, 청명한 소리가 방안 가득 울려 퍼졌다.
이준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감촉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눈을 감고 손가락을 통해 날개 뼈 안쪽에 영혼의 힘을 불어넣어 보았다.
잠시 후, 투명한 빛을 발하던 날개 뼈가 가볍게 흔들리더니 이내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며 영혼의 힘을 밀어냈다. 빛과 함께 터져 나온 날카로운 바람 에너지에 이준은 화들짝 놀라 손을 움츠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바람 속성 에너지에 마치 불속성 에너지의 그것과 같은 묘한 열기가 섞여있다는 점이었다.
“설마 두 가지 에너지가 날개 하나에 다 담겨 있는 건가……. 게다가 죽은 지 그렇게 오래 됐는데도 이렇게 강한 에너지를 담고 있다니.”
이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손을 흔들어 예리한 장검 하나를 꺼내든 뒤 그 안에 자신의 염력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청록색의 옅은 불빛이 칼끝에 덧씌워지며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 뒤 날개와 마수의 등이 연결된 부위에 깊숙이 칼을 찔러 넣었다.
푹.
생전에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이미 죽은 지 오래돼서인지 생각보다 부드럽게 칼이 들어갔다. 힘차게 손을 놀려 날개뼈 아랫부분의 껍질을 벗겨내자, 그 아래 있던 하얀 살점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