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6화. 영산 장로
“역시 흑각성이구만…….”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한 이준 역시 옅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허허, 이 봐요, 젊은 친구.”
바로 그 때, 누군가가 이준을 불러 세웠다. 마염곡 사람들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허허, 이 늙은이는 마염곡에서 온 방언이라고 하는데 혹시 성함이 어찌 되십니까?”
“네. 임현이라고 합니다만, 저에게 무슨 볼 일이라도 있으신지?
“아마도 이 흑각성에서 가장 뛰어난 연금술사는 임 선생인 듯 한데…….”
상대의 태도에서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준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물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설마하니 그 말을 하시려고 저를 부르신 것은 아닐테고, 본론을 말씀해 보실까요?”
“하하, 연금술 실력만 대단한 줄 알았더니, 머리까지 좋으시군요. 만약 임현 선생도 보리점액에 관심이 있다면 저희와 손을 잡으실 의향은 없습니까? 저 늙은이는 은거하기 전부터 흑각성 내에서 손에 꼽는 강자였으니, 아무리 옆에 있는 저 아가씨가 돕는다 해도 보리수의 점액을 뺏는 것은 쉽지 않을 것 입니다.”
“아쉽군요. 죄송하지만 그런 일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단칼에 상대의 제안을 거절한 이준은 곧바로 발길을 돌려 방언의 앞에서 사라졌다.
“젊은 친구가 참 건방지군.”
멀어져 가는 이준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염곡의 몇 몇 장로들이 분노를 표했다.
방언 역시 잔뜩 굳은 얼굴로 한참동안이나 이준을 바라보았지만, 그렇다고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잠시 후, 방언이 머리를 돌려 뒤에 있는 회색 망토를 두른 사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모두가 다 보리수의 점액을 탐내고 있으니, 누군가와 손을 잡자고 한들 그리 쉽게 될 리가 없지요. 우선 남은 이틀간 사람을 파견하여 영산을 감시하고, 그가 흑황성을 벗어나면 바로 움직이도록 합시다.”
“가람 아카데미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지금은 그들과 싸워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우선은 보리수의 점액에 집중하세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물건을 손에 넣어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방언은 공손한 태도로 머리를 끄덕인 뒤 곧바로 마염곡의 장로들과 함께 경매장을 벗어났다.
* * *
경매가 끝난 뒤에는 흑황종에서 주관하는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하지만 웃고 떠들며 연회를 즐기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진심으로 연회를 즐기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못 즐거운 척 웃음을 터뜨려 대면서도 시종일관 영산의 행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경매가 끝난 다음 날, 이준 일행은 날이 밝자마자 흑황종의 본부로 향했다. 모천행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공손한 태도로 이준 일행을 맞이했다.
“자, 임현 선생께서 낙찰한 물건입니다. 한번 점검을 하시죠.”
거대한 마수의 시체를 유심히 살핀 이준은 곧바로 저장반지에서 연금비약을 꺼내 탁자에 올려 두었다.
“약속했던 연금비약입니다. 종주님도 한번 살펴보시지요.”
“아닙니다. 임현 선생님이 저희에게 가짜 연금비약을 건네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냥 믿겠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거래가 끝났으니 저희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물물교환을 마치자, 이준은 곧바로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했다.
하지만 용건을 끝마치기 무섭게 자리를 뜨려는 이준과 달리, 모천행의 얼굴에는 아쉬운 기색이 가득했다. 아직 무언가 할 얘기가 남은 듯한 표정이었다.
“잠깐만요.”
“무슨 일이라도?”
“임현 선생이 가지고 있는 그 투종의 열쇠와 이 늙은이가 가지고 있는 다른 물건과 바꾸는 것은 어떠신지요?”
이준의 입가에 순간 냉소가 어렸다. 이 능구렁이 같은 영감은 아직도 투종의 열쇠를 탐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 투종의 열쇠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아니십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런 일은 보통 장로들과 협의해 결정된다는 것 정도는 선생도 아시지 않습니까. 장로들의 결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영산 장로에게 낙찰된 것 뿐입니다. 저는 투종의 열쇠로 하자고 주장했지만, 장로들의 의견이 워낙 완고한지라……. 저도 아쉽습니다.”
뻔한 거짓말이었다. 모천행의 지위로 봤을 때, 장로회가 아니라 그 누구라 해도 그의 의견을 거스를 수 없었다. 하지만 이준은 굳이 그런 사소한 것을 따지고 들지 않았다. 지금 이준에게 중요한 것은, 상대가 무엇을 들고 있느냐 하는 것 뿐 이었다.
“설마 보리수의 점액이 또 있으신 겁니까?”
이준의 이 말에 모천행이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랬다면 진작 임현 선생님의 투종의 열쇠와 교환을 했을 것입니다.”
“그럼 됐습니다. 저는 다른 물건엔 별로…….”
“허허, 그러지 마시고, 일단 천천히 얘기를 나눠보시지요. 아니면 저희 흑황종에서 필요한 약재를 제공하고, 임현 선생께서 투종의 열쇠 한 알을 만들어 주실 수는 없으신지……. 성공률은 얼마나 되든지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노인은 계속해서 이준의 눈치를 살피며 비굴한 태도로 말을 이어나갔다.
“죄송하지만 제가 여기에 일부러 남아 연금비약을 제조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준은 눈 하나 까딱 않고 보란 듯이 아라와 보람에게 손짓을 해보였다.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으니 나가겠다는 의미였다.
씩씩거리며 멀어져 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모천행은 화를 참지 못하고 애먼 탁자를 손바닥으로 내리쳤고, 이에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단단한 탁자가 ‘쿵’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저 자가 종주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탁자가 부서지는 소리에 방 안에 있던 모어와 기문산이 다급히 달려 나왔다.
“어린 녀석이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군.”
“아버지, 저 자가 거래에 응하지 않으니, 다른 수단을 써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됐다. 그렇다고 억지로 뺏을 수는 없어. 옆에 붙어 다니는 그 계집애가 보통이 아니야. 내 실력으로도 쉽지 않을게다.”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기문산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질문을 던지자, 모천행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먼저 상황이 어떻게 흐르는지 좀 지켜봐야지. 저들의 목표가 보리수점액인 건 확실하니 조만간 영산 장로와 충돌이 있지 않겠나?”
* * *
한편, 흑황종을 나선 이준 역시 보기 드물게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 탐욕스러운 늙은이군. 원하는 건 모두 손에 넣으려고 하면서, 자신은 털끝만큼도 손해를 보려 하지 않다니. 아마 아라 네가 없었으면 힘으로라도 투종의 열쇠를 빼앗으려 했을거야. 투종 강자인 영산보다는 내가 만만하니 그 자와는 거래를 하고, 나를 어르고 달래서 원하는 물건을 모두 손에 넣으려 했겠지. 빌어먹을 영감탱이, 그 속을 누가 모를 줄 알고? 그렇게 투종의 열쇠가 탐났으면 처음부터 나에게 보리수의 점액을 넘겼으면 됐잖아.”
이준이 잔뜩 성난 표정으로 투덜대자, 곁에 있던 아라가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괜찮아. 이미 지나간 일이야. 지금은 어떻게 그 영감한테서 보리수의 점액을 빼앗아 올지에 대해서만 생각하자. 어차피 보리수의 점액에 눈독을 들인 사람들이 많으니 늦든 빠르든 누군가는 그 영감을 치지 않겠어? 일단 그 때를 노려 보는거야.”
이준 일행이 대화를 나누며 막 흑황종의 대문을 나서는 순간, 익숙한 얼굴 하나가 흑황종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영산이었다.
“보리수의 점액을 가지러 왔군.”
“저 자를 쫓아온 자들이 한 둘이 아니야. 흑황성을 나가자마자 전쟁이 벌어질 것 같아.”
투종 강자 특유의 예민한 감지 능력으로 주위를 한번 훑어본 아라가 이준에게 다가가 말했다.
“우리는 일단 둘째 형과 대장로님에게 가보자. 우리만으로는 어려워.”
“좋은 생각이야.”
대화를 마친 이준과 아라는 곧바로 이씨 가문의 임시 거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같은 시각, 이씨 가문 사람들은 흑황각 내의 거처가 아닌 성내에서 찾은 임시 거처에 머무르고 있었다.
“마염곡 쪽의 움직임은?”
이찬의 질문에 검은 옷을 입은 이씨 가문의 투사 하나가 보고를 올렸다.
“이미 흑황성을 벗어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멀리까지 가지는 않았다고 하니, 영산이라는 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듯합니다.”
“역시…….”
그 때, 돌연 서천우 대장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누구냐!”
서 장로의 갑작스런 행동에 이찬을 비롯한 이씨 가문의 투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빼들었다.
자리에 나타난 것은 어제 경매장에서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던 젊은 연금술사와 그 곁을 지키던 정체불명의 투종 강자였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인지를 발견하자, 노인의 얼굴에 가득했던 살기가 한결 누그러졌다. 아무리 서천우라 해도, 6레벨 연금술사와 투종 강자를 적으로 돌리기는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가람 아카데미의 부원장 서천우라고 합니다. 혹시 경매장에서 있었던 불쾌한 일이 있어서 찾아 왔다면, 이 늙은이의 체면을 봐서라도 넘어가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아마도 이찬이 낙찰받은 2격 무투기 때문에 화가 난 상대가 자신들을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에 이준은 멋쩍은 표정으로 얼굴을 꽁꽁 싸매고 있던 복면을 걷어내며 서천우를 향해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장로님, 저 이준입니다.”
“이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서천우 대장로와 형의 모습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 정말 너무하네요. 아무리 얼굴을 감췄다고는 해도 어떻게 저를 못 알아볼 수 있는 거예요!”
익숙한 목소리와 말투에 이찬과 주위 사람들의 얼굴에도 환한 웃음이 피어났다.
“6레벨 연금술사가 너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 그새 또 실력이 늘었구나!”
또 다시 크게 성장한 동생의 모습에 이찬은 기쁨을 감추지 못 하고 달려와 이준을 와락 끌어 안았다.
“흑황성 분위기도 영 험악하고, 마염곡 하고도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 일부러 정체를 감췄지. 그렇다고 해서 형이 나를 못 알아볼 줄은 몰랐어. 정말 너무한걸.”
“하하, 미안하다 미안해. 그래도 아주 잘했어. 마염곡 놈들은 네 얼굴을 알고 있으니, 정체를 감추지 않았더라면 곧바로 공격을 받았을 거야.”
“근데 옆에 아가씨는…….”
반가운 마음에 연신 웃어대던 이찬의 눈길이 이준의 곁에 서 있는 아라에게로 향했다. 분명히 흑황각에서 만났던 그 여인이었다.
“아, 내 친구야. 아라라고 부르면 돼.”
“안녕하세요.”
“아, 예……. 안녕하십니까.”
아라를 바라보는 이찬의 시선에는 어색함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 날 흑각성의 강자들을 쫓아내던 공포스러운 모습이 뇌리에서 잊혀 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너 이 녀석, 흑각성으로 돌아올 것이면 연락이라도 할 것이지!”
이찬과 아라가 어색한 말투로 인사를 나누며 쭈뼛대고 있을 때, 갑자기 서장로의 노기어린 목소리가 귓등을 때렸다.
“죄송합니다 대장로님. 그 사이에 일이 좀 많아서……. 그래도 이제 투황이 됐으니 천계의 탑에 더 많은 불꽃을 남겨둘 수 있을 겁니다. 그걸로 좀 넘어가 주세요.”
“투황?”
“뭐라고? 정말이냐?”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이찬과 서장로가 약속이나 한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이준을 위 아래로 훑어봤다. 수많은 천재들의 성장 과정을 지켜봐 온 서장로였지만, 이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는 학생은 처음이었다.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하하, 정말 대단하다. 아버지가 알면 기뻐하실 거야. 우리 집에서 투황이 나오다니! 역시 아버지가 안목이 있으시다니까!”
동생이 투황이 됐다는 이야기에 잔뜩 흥분한 이찬은 입이 찢어져라 웃어대며 연신 이준의 어깨를 두드려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