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5화. 마지막 승자
메두사와 운산, 아라와 전필환 등 그간 제법 많은 투종 강자를 보아온 이준이었지만, 노인의 속도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앞의 노인에 비하면, 그 거대한 벽처럼 느껴지던 투종 강자들의 실력조차 평범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노인의 무시무시한 속도에 이준은 물론이고 자리에 있던 다른 강자들 역시 하나 같이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다.
‘흑각성에 이 정도의 강자가 있었단 말이야?’
거래를 마치고 내려오는 노인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아마도 이번 경매를 위해 들고 온 물건이 퍽 대단한 물건인 모양이었다.
다음은 마염곡의 장로인 방언의 차례였다. 화려한 귀빈석에 앉아 가만히 노인의 표정을 살피던 방언은 어두운 표정으로 들어가 밝은 표정으로 단상을 내려왔다.
보아하니 마염곡에서도 이번 경매를 위해 제법 단단히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8레벨 마수의 시체를 낙찰 받기 위해 꺼내 들었던 ‘화룡의 숨결’만 보더라도 그들이 이번 경매를 위해 얼마나 대단한 물건들을 준비해 왔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방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준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멀지 않은 곳에 앉아있던 이찬이 벌떡 일어나 곧바로 빛 안으로 들어갔다.
‘형도 보리수의 점액을 얻기 위해 이곳에 왔단 말이야……? 하지만 우리 가문에는 그런 귀한 물건과 바꿀만한 보물이 없을 텐데…….’
약 3, 4분 뒤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이찬의 얼굴에서는 단상에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실망한 기색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즐겁거나, 무언가를 기대하는 기색을 내비치는 것도 아니었다.
형의 차례가 끝나자, 이제야 자신이 나갈 때가 됐다고 생각한 이준이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8레벨 마수의 시신을 낙찰 받는 과정에서 그가 내놓은 연금비약 때문인지, 모든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몸을 날려 단상에 도착한 이준은 눈을 찌르는 강렬한 빛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때는 모천행이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곁에는 천약방에서 자신과 마찰을 빚었던 흑황종의 수석 연금술사 기문산이 서 있었다.
“허허, 임현 선생이 오기를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준을 바라보는 모천행의 얼굴에는 탐욕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이준은 속으로 쓴 웃음을 지으며 곧바로 옆에 놓여 있는 작은 수정 상자로 눈길을 돌렸다.
“이게 바로 보리수의 점액입니까?”
“그렇습니다. 임현 선생께서 이번엔 어떤 귀한 보물을 들고 오셨는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요.”
상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준은 곧바로 손가락을 튕겨 자그마한 옥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옥병 안에는 갓난아이 주먹만 한 크기의 연금비약 한 알이 들어있었다.
“6레벨 연금비약인 투종의 열쇠입니다. 종주께서도 익히 들어 보셨을 것이니 그 효능엔 대해선 굳이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투종의 열쇠……?”
이준이 꺼내든 연금비약의 이름을 듣는 순간, 모천행과 기문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지금 흑황종에 투종이라고는 오직 모천행 한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단 한 사람의 투종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흑황종은 흑각성내에서 최고의 세력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투종의 열쇠가 가진 가치를 모를 리가 없었다.
게다가 최근 몇 년 동안 흑황종에서는 두 번째 투종 강자를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모천행의 뒤를 이을 사람은 자연히 어릴 때부터 남다른 실력을 보여준 모어였다.
하지만 아무리 어린 나이에 투황이 됐다한들 투종의 벽을 넘어서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 이었다. 아무리 모어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다고는 하지만 투종이 될 가능성은 채 한줌도 되지 않았고, 모천행 역시 누구보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가까스로 투종이 되는데 성공한다 해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테니, 흑황종이 두 명의 투종을 갖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 이었다.
그러나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모천행이 살아있는 동안 모어가 투종의 경지에 오르는데 성공한다면……. 흑황종은 흑각성내의 유력 세력 중 하나가 아니라, 흑각성 전체를 지배하는 세력으로 우뚝 설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당연히 이 모든 것의 전제는 모천행이 죽기 전에 모어가 투종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어 스스로의 힘으로 단기간 내에 투종의 벽을 넘어설 가능성은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흑황종이 흑각성 전체를 아우르는 세력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급 연금비약의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꿈을 실현해 줄 유일한 수단이 바로 이준의 손에 들린 ‘투종의 열쇠’였다.
모천행은 애써 흥분한 기색을 감추며 조심스레 이준의 손에 들린 옥병을 건네받아 기문산에게 넘겼다.
“종주님, 정말로 투종의 열쇠입니다. 게다가 품질도 아주 대단합니다……. 이 정도 품질의 투종의 열쇠는 어디 가서도 찾기 힘들 것 같습니다.”
수석 연금술사가 검증을 마치자, 모천행의 입가에 또 다시 미소가 번졌다. 도저히 웃음을 찾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임현 선생이 그 날 제조했던 연금비약이 바로 이 투종의 열쇠이었군요.”
“네. 종주님께 꼭 필요한 물건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아주 훌륭합니다. 이 투종의 열쇠는 우리 흑황종에 반드시 필요한 연금비약입니다. 임현 선생께서 이미 거래할 물건을 보여 줬으니 나머지는 저희 장로들과 의논한 뒤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성급한 말일지 모르겠지만……보리수의 점액의 주인이 나타난 것 같군요.”
옥병에 든 투종의 열쇠를 다시 이준에게 건네는 모천행의 눈빛에는 아쉬운 기색이 가득했다. 이미 보리수의 점액이 자신의 손 안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옥병을 돌려받은 이준은 공손하게 인사를 올린 뒤 몸을 돌려 빛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준이 빛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자, 모천행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기 장로, 지금까지 우리가 눈독 들인 물건은 세 가지일세. 하나는 영산 장로가 갖고 온 부활의 영약이고, 두 번째는 마염곡 방언 장로가 가지고 온 영혼강화제,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바로 방금 전 임현이 가지고 온 투종의 열쇠지. 자네는 어떤 게 가장 낫다고 생각하는가?”
종주의 질문에 잠시 고민에 빠졌던 기 장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활의 영약은 7레벨 연금비약이니, 레벨로 치면 단연 이것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이 연금비약은 이름 그대로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신비의 영약이지요. 이것만 있다면 머리가 잘려 나가고, 심장이 부서져도 여전히 살아 날 수 있으니, 이 연금비약을 가진 자는 목숨이 두 개가 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만일 종주님이 이 물건을 손에 넣는다면 우리 흑황종의 지위는 거의 확고부동한 것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두번째는?”
“영혼 강화제는 확실히 대단한 물건이지만, 억지로 영혼의 힘을 키우는 것이니 후유증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지금 우리 흑황종에게 필요한 물건은 아닙니다. 종주님이 사용하신다면 득보다 실이 클 것이고, 모어 도련님이 사용하신다면 되려 앞길을 망칠 수 있는 극단적인 물건이니 이 물건은 제외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흐음, 좋아. 그럼 세 번째는?”
모천행의 물음에 기장로는 잠시 머뭇거리며 답을 피했다. 아마도 그 젊은 연금술사와 다퉜던 일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임현이라는 젊은이가 가지고 온 투종의 열쇠는 비록 6레벨 연금비약이지만 성공적으로 투종에 진입할 수 있게 도와주는 물건이지요. 다만 이 연금비약을 도련님에게 준다 해도 투종이 될 가능성은 여전히 높지 않습니다. 물론 도련님이 이 연금비약을 드시고 성공적으로 투종의 경지에 오를 수만 있다면 우리 흑황종은 흑각성 전체를 지배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부활의 영약과는 달리 그 결과가 확실한 것은 아니니, 반쯤 도박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기문산의 조리 있는 분석에 모천행도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알겠네.”
* * *
검은 망토로 온 몸을 꽁꽁 감싼 덕에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누구도 이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이준이 나온 뒤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단상으로 나갔지만, 하나 같이 실망이 가득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어떻게 됐어?”
“역시 쉽지 않네.”
아라의 질문에 이준의 얼굴에는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투종의 열쇠를 꺼냈을 때 모천행의 표정이 밝아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는 결코 냉정을 잃지 않았었다. 이는 그가 투종의 열쇠와 다른 물건을 견주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준이 어두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자, 아라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직 기회가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잖아. 아마 여기 있는 사람들은 거의 너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걸.”
따뜻한 위로에 이준의 눈에도 다시 생기가 돌았다.
“그래. 만일 다른 사람이 낙찰 받는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그 물건을 손에 넣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이건 네 목숨이 걸린 일이잖아.”
그 때, 단상을 둘러싸고 있던 빛이 서서히 사라지더니 모천행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저희도 어떤 분에게 이 물건을 넘겨야할지 참으로 고민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장로들과 오랫동안 상의를 걸친 끝에 결국 보리수의 점액의 주인이 정해졌습니다.”
넓은 경매장내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긴장과 기대가 가득한 눈빛으로 모천행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보리수의 점액을 낙찰 받으실 분은 바로……”
모천행이 손으로 귀빈석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영산 장로님입니다.”
모천행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준의 두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저 노인이 투종의 열쇠보다 더 귀한걸 내놨단 말이야?”
계속해서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던 아라의 눈동자가 순간 크게 흔들렸다. 그녀 역시 투종의 열쇠가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알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영산 장로? 한 때 그 검은 명단의 3위를 차지했던 그 영산 장로? 아직도 살아 있다고?”
“투황 최고봉 강자였는데. 꽤 오래 지났으니 이젠 투종을 돌파했겠지?”
“은거에 들어갔다더니, 결국 투종이 되는데 성공한 모양이군.”
귀빈석에 자리한 사람들은 저마다 질투 어린 시선으로 영산이 앉은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산 역시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구태여 어떤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것으로 우리 흑황종에서 진행한 이번 경매도 막을 내리겠습니다. 곧 흑황종에서 주최하는 대형 연회가 있을 테니, 끝까지 이 경매를 즐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영산은 모천행의 말이 끝나게 무섭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경매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고, 곧이어 귀빈석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 둘 몸을 일으켜 경매장 밖으로 향했다.
영산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 중 대다수의 몸에서는 숨길 수 없는 짙은 살기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