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2화. 육합자의 무투기
자리에 앉은 이준은 몸을 숙여 주위의 다른 귀빈석들을 훑어봤다.
정체불명의 젊은이 하나가 공포스러운 기운을 풍기는 여인과 함께 나타나자, 귀빈석에 있는 다른 강자들도 무언가를 눈치챈 듯 이준이 앉아있는 자리 쪽으로 하나 둘 시선을 던졌다.
“저 중간에 검은 망토를 두른 사람이 아마도 그 날 그 연금비약을 제조하던 자인 것 같군. 헌데 대체 누구지? 흑각성에 만약 저런 레벨의 연금술사가 있었다면 진작에 소문이 났을 텐데……. 저 자의 정체를 아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으니 원.”
이준과 조금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은 방언은 양미간을 찌푸린 채 검은 망토를 두른 이준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주위에 있던 마염곡의 다른 장로들 역시 이준 일행에게서 눈을 떼지 못 했다.
“설마 우리 일을 방해하지는 않겠지?”
회색 망토를 두른 사람이 음험한 눈길로 이준 일행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준은 방언 일행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귀빈석 자리가 완전히 들어차고, 경매장의 좌석도 거의 만석이 되었다.
“보아하니 여기에 온 강자들은 다 그 보리수의 점액 때문에 온 것 같은데?”
이준의 말에 아라도 머리를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몰려든 사람들의 머릿수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오늘 경매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어려울 것 같았다.
어느 새 경매장내에는 경매 물품을 지키기 위해 배치된 흑황종의 강자들이 주위를 물 샐 틈 없이 포위하고 있었다.
잠시 후, 금속으로 되어 있던 바닥이 갈라지면서 계단식으로 된 통로 하나가 나타났다. 통로에서는 금색 도포를 입은 노인이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노인의 등장에 눈에 안 보이는 묵직한 기운이 장내를 휩쓸며 조금 전까지 시끌벅적하던 장내가 순간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기세를 봐선 저 사람이 아마도 흑황종의 종주인 모천행인 것 같군.”
실눈을 뜬 채 금색 도포를 입은 노인을 유심히 바라보던 이준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투종 강자의 기운이란 언제 봐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허허, 여기에 오신 여러분들이 아마 저 모천행을 익히 잘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우리 흑황종에서 진행하는 경매회에 참석해 준 여러 분들에게 이 늙은이가 먼저 고맙다는 말을 전하겠습니다.”
모천행은 천천히 좌석 아래를 굽어보다가 이준 일행이 앉은 위치에 꽤 오랫동안 시선을 멈췄다. 이에 이준도 머리를 들어 상대의 눈을 응시했다. 상대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노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허허, 다들 경매가 시작되기를 기다리시는 듯하니 쓸데없는 말은 줄이고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이번 경매회에서 누군가 우리 흑황종 구역에서 행패를 부린다면 이 늙은이가 가만있지 않을 테니 안심하고 경매에 임해 주십시오.”
투종 강자의 엄포에 자리에 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집어삼켰다.
“그럼 이제부터 정식으로 흑황종의 경매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모천행은 공손한 자세로 두 손을 모아 인사를 한 뒤 천천히 단상에서 물러섰다. 그가 내려가자, 조금 전 열렸던 바닥이 다시 열리며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 하나가 걸어 나왔다. 그의 뒤편에는 공손한 자세로 두 손에 은쟁반을 든 시녀 몇 명이 서 있었다.
“자 그럼 가볍게 무투기 하나로 경매를 시작해 볼까요?”
흰 머리를 한 노인은 은쟁반 위에 있는 두루마리 하나를 가리키며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3격 무투기인 ‘바람의 깃’은 수련이 어렵긴 하지만 대결에서 그 기술을 선보인다면 기대 이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죠. 본래 가격은 30만 골드가 넘지만, 종주님이 오늘 경매에선 15만 골드부터 시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최고 가격은 80만 골드입니다. 만약 누군가 이 최고 가격을 부른다면 그 뒤에 아무리 높은 가격을 얘기한다 해도 이 바람의 깃은 먼저 최고 가격을 내놓은 사람에게 가게 될 것 입니다.”
노인은 경매 경험이 꽤 풍부해 보였고, 덕분에 금세 여기저기에서 3격 무투기를 낙찰받기 위해 가격을 외쳐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말로 귀한 물건은 뒤에 있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귀빈석에서는 누구도 가격을 부르지 않았다.
의자에 기댄 채 지긋이 눈을 감고 있던 이준은 주위에서 목청 높여 외쳐대는 소리를 들으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가격은 이미 50만 골드까지 올라가 있었지만, 전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첫 경매치고는 분위기가 너무 달아올라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첫 번째 경매는 50분 가량 진행됐고, 결국 최고 가격인 80만 골드에 낙찰이 이루어졌다. 흰 머리의 노인은 은 망치로 탁자를 세 번 두드려 이 3격 무투기의 주인이 나타났음을 알렸다.
첫 경매가 끝나자, 그 뜨거운 분위기를 이어줄만한 괜찮은 물건들이 줄줄이 모습을 드러냈다.
확실히 이번 경매는 이준이 그간 참여했던 어떤 경매보다도 더 괜찮은 물건들을 다루고 있었고, 참여하는 사람들의 열의 역시 대단했다. 하지만 이준을 비롯한 진정한 강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물건은 아직 단 한 개도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경매회 단상에 신비한 얼굴을 한 시녀가 적색 두루마리가 놓인 은쟁반을 들고 나와 설명을 시작하는 순간, 이준의 얼굴에 처음으로 흥분한 기색이 떠올랐다.
붉은색의 두루마리에서는 한 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백발의 노인은 조심스레 두루마리를 들어 올리며 소개를 시작했다.
“이 무투기는 몇 백 년 전 대륙의 절대 강자였던 육합 존자가 만들어낸 2격 검술형 무투기로, 그 위력이 실로 막강하지요.”
시종일관 의자에 기댄 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이준이 갑자기 의자에서 등을 떼자, 곁에 있던 아라가 피식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왜? 마음이 있어?”
아라의 질문에 이준은 가볍게 머리를 끄덕인 뒤 다시 경매대로 시선을 돌렸다. 태양검을 제외하면 그에게는 아직 검술형 무투기가 단 하나도 없었다. 물론 제왕의 권이나 태초의 힘 같은 제법 괜찮은 무투기도 가지고 있었지만 이것들은 모두 검을 버려야 쓸 수 있는 무투기였다. 게다가 제왕의 권은 그 위력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한번 쓸 때마다 녹초가 되어버렸으니, 앞으로 더욱 강력한 투사들과 대결을 벌이려면 태양검 말고도 실전에서 쓸 수 있는 강력한 검술용 무투기가 필요했다.
“이 무투기의 가격은 180만 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매번 추가되는 금액은 적어도 만 골드 이상이어야 합니다. 자, 가격을 내 놓으시죠.”
하얀 머리 노인의 말은 끝나자, 장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180만 골드라는 가격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상당히 거금이었고, 그 가격을 흔쾌히 내놓을만한 세력들은 조금 더 가격이 오르고 나면 참가하기 위해 초반부터 가격을 불러대지는 않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썰렁한 분위기가 유지되자, 마침내 검은 망토를 두른 정체불명의 연금술사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250만 골드.”
갑자기 훅 치솟은 가격에 경매회 장내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히 앞쪽 귀빈석 자리에 검은 망토를 두른 젊은이에게 향했다. 현재까지 가장 높은 가격이었다.
“255만 골드요.”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바로 누군가 더 높은 가격을 외쳤다.
“300만 골드.”
이에 이준은 망설임 없이 가격을 크게 올린 뒤 여유로운 표정으로 255만 골드를 부른 상대를 바라봤다. 이준이 단숨에 50만 골드 가까이 가격을 높인 덕인지 조금 전 255만 골드를 외쳤던 중년의 사내는 몹시 자존심이 상한 듯 잔뜩 굳은 얼굴로 또 다시 높은 가격을 외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옆에 있던 사람이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정체불명의 연금술사와 낙찰 경쟁을 해서 이로울 것이 없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300만 골드, 그 이상은 없습니까?”
노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경매장에 또 다시 정적이 내려 앉았다. 두 번씩이나 가격을 크게 올린 것으로 봐서는 이준이 이 무투기를 원하는 것이 분명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경쟁할 수도 있겠지만, 6레벨 연금술사와 투종 강자가 함께 있으니 어지간한 사람들은 돈이 있어도 감히 더 높은 가격을 부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흑각성내에서 제법 이름난 세력들이야 굳이 원한다면 이준과 더 경쟁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의 최종 목적은 보리수의 점액이니 2격 무투기를 구하기 위해 힘을 빼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정리되자, 경매사는 은망치로 탁자를 두드리 낙찰을 알리려 했다. 하지만 노인의 손이 움직이려는 찰나, 돌연 누군가가 번쩍 손을 치켜들었다.
“310만 골드.”
감히 6레벨 연금술사와 투종에게 대항해 끝까지 경매를 하려들다니……. 경매장 곳곳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누구길래 감히 이 신비한 연금술사와 가격 경쟁을 한단 말인가.
이준 역시 불쾌하다는 듯 미간에 힘을 준 채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310만 골드를 부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이준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자신과 가격 경쟁을 벌인 것은 다름 아닌 그의 둘째 형, 이찬이었다.
310만 골드는 이씨 가문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가격이었지만, 이찬은 망설임 없이 정체 불명의 6레벨 연금술사와 경쟁에 들어갔다. 게다가 이찬은 창술사이니, 그 무투기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2격의 검술형 무투기를 보고나니 동생을 위해 그것을 꼭 차지하고 싶다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높은 가격을 외치고 말았던 것이다.
앞으로 투황을 넘어 투종이 될지도 모르는 동생에게 태양검을 제외한 2격 무투기가 꼭 필요할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그는 기꺼이 6레벨 연금술사와 경쟁하는 것을 선택했다.
평소라면 서천우가 그를 말렸겠지만, 그 역시 이찬이 왜 6레벨 연금술사를 언짢게 할 만한 행동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구태여 이찬을 말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준은 이찬이 왜 이 2격 무투기를 손에 넣으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 순간,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고 올라오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에 이준은 마치 경매를 포기한 사람처럼 가볍게 고개를 저은 뒤 더 이상 가격을 높여 부르지 않았다.
이준의 이런 행동에 귀빈석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한편, 이씨 가문과 사이가 좋지 않은 다른 세력들은 모두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들 입장에서 보자면, 6레벨 연금술사와 이씨 가문이 등을 돌리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호재였기 때문이다.
신비한 연금술사가 바로 포기를 하자, 가격을 부른 이찬도 다소 놀란 듯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2격 무투기는 그렇게 다소 허무하게 이찬의 손에 들어갔다.
* * *
경매장의 분위기는 점점 최고조를 향해 치달았다. 경매대 위에는 귀중하고 값진 보물들이 속속 올라왔으며, 그 가격 역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2격 무투기 이후로는 진귀한 약재들이 몇 가지 올라왔고, 이준은 수중에 있는 300만 골드를 모두 털어 넣어 그 약재들을 사들였다.
보통 그런 귀한 약재들은 연금술사의 손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큰 쓸모가 없었다.
게다가 고급 약재일수록 저레벨의 연금술사들에게는 그림의 떡 이었으니, 주머니에 있는 300만 골드가 바닥날 때 즈음엔 이미 적지 않은 약재들이 이준의 수중에 들어와 있었다.
사실 이준이 이번 경매에서 가장 구하고 싶었던 것은 7레벨 전갈 이무기의 마정석과 보리수의 점액이었다. 그 두 가지만 있다면 아라의 재난 독체를 해결할 맹독의 결정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7레벨 전갈 이무기를 찾는 것만도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이 없었으니, 이번 경매에서도 그 마정석이 경매대에 오르는 일은 없었다.
“괜찮아. 그래도 일단 보리수의 점액에 관한 소식은 얻었잖아. 전갈 이무기의 마정석도 곧 찾을 수 있을 거야.”
아쉬움을 감추지 못 하고 연신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이준의 모습에 되려 아라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