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1화. 본격적인 시작
“앞으로 두 사람은 저 임현이라는 자와 원한을 맺지 않도록 조심하거라. 저 나이에 6레벨의 연금술사인 것도 모자라 투종에 투황을 끌고 다니다니……. 결코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될 자이다.”
이어지는 모천행의 말에 모어도 언짢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흑황각에서 소동을 벌인 사내가 자신의 기분을 긁은 것으로도 모자라 이번에는 그 곁에 있는 여자까지 투종이라니……. 불과 며칠 사이 그의 자존심은 완전히 땅에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자신이 마음에 들어 하는 여자가 자신의 신경을 긁어놓은 애송이와 함께 다니는 것 역시 그의 기분을 언짢게 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모천행의 말에 모어와 기문산은 약속이나 한 듯 떫은 감을 씹은 것 처럼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보리수의 점액 때문에 적지 않은 강자들이 이 곳에 몰려왔으니, 모두 준비를 단단히 하거라.”
말을 마친 모천행은 모어를 바라보며 한가지 질문을 던졌다.
“모어, 저 여자 아이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냐? 아까부터 저 아이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구나.”
“분가루나 날리는 보통 계집들과는 뭔가 달라 보여서요.”
“흐음……. 네가 정말로 저 여자 애와 잘 된다면 흑황종에게도 좋은 일 이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절대로 저 여자 애가 우리 흑황종에 안 좋은 마음을 가지게 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르던 빛 기둥이 서서히 흐려지더니 이내 사방으로 진한 약향이 퍼져 나갔다.
곧이어 지붕을 뚫고 솟아오른 수 십개의 작은 빛기둥으로 갈라졌다가 서서히 빛을 잃기 시작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 수 십 갈래로 찢어진 빛기둥이 완전히 잦아들자, 지붕 위에 있던 아라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에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던 흑각성의 강자들은 실망한 표정으로 각자의 처소로 돌아갔다.
그들 입장에서는 참으로 실망스럽게도, 6레벨 최고 수준의 연금비약을 제조한 연금술사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 *
방 안으로 돌아가자, 바깥에서 어떤 소동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이준이 지친 몸을 이끌고 밀실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준은 밀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단숨에 탁자 위에 있던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고, 이에 아라는 피식 웃으며 불평 아닌 불평을 늘어놓았다.
“벌써 이틀이 지났어. 좀 더 기다리다 안 나오면 밀실 문을 부술 뻔했다고.”
“그래도 성공했으니 됐잖아. 이틀 동안 무슨 특별한 일은 없었어?”
“할 일 없는 사람들이 몰려든 것 빼고는 별다른 일은 없었어.”
상대의 대답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한 이준은 환히 웃으며 아라에게 감사를 표했다.
“하하, 네가 아니었다면 이곳까지 뛰어 들어올 놈들이 한둘이 아닐걸? 정말 고마워.”
“아, 그리고 방금 전에 이씨 가문의 사람들을 만났어. 아마도 너의 둘째 형인 것 같았어. 그리고 그 옆에 투종으로 보이는 노인 하나가 서 있더군.”
“아마 서천우 대장로님 일거야.”
“만나볼 생각은 없어?”
아라의 질문에 이준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일단은 안 만나는 게 좋을 듯해. 내가 이씨 가문과 연관된 걸 알아챈다면 다른 강자들이 우리 가문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럼 그렇게 해. 그리고 조금 전에 그 모어라는 사람이 찾아왔었어. 흑황종의 종주인 모천행이 너를 보고 싶어 한다더군.”
“잘했어. 그 모천행이라는 사람의 실력은 어느 정도였어?”
“그 사람도 투종 강자 정도로 보였어. 아마 실력은 나랑 비슷할거야. 4성 정도.”
“4성이라…….”
“그리고 그 마염곡 사람이랑 늘 붙어 다니던 회색 망토를 두른 사람도 투종 같았어.”
자신의 예상대로였다. 진지한 표정으로 아라의 이야기를 듣던 이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그렇군. 내 생각이 맞았어. 마염곡에서 방언 한 사람만 파견했을 리가 없지. 그 노인네는 이제 겨우 투종에 발을 걸친 수준이라, 진짜 투종 강자들에 비하면 실력이 떨어지니까. 그런데 그 회색 망토를 두른 사람은 대체 정체가 뭘까?”
“글쎄……. 그건 알 수 없지. 다만 마염곡 놈들과 붙어 다니니 너랑은 자연스럽게 적이 되는 것 아니겠어?”
이어지는 아라의 말에 이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 하니 흑황성이 꽤 떠들썩해 지겠는걸. 이렇게 많은 세력들이 보리수의 점액을 노릴 줄이야……. 대충 예상은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험난한 경매가 되겠어.”
“그래, 어쨌든 지금은 일단 들어가서 좀 쉬는 게 좋겠어.”
아라가 말했다.
“알았어. 그럼 난 들어가서 경매가 시작되기 전까지 좀 쉴게.”
자리에서 일어난 이준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창문으로 저녁노을이 끼기 시작한 서쪽 하늘을 바라봤다. 이제 정말로 경매가 코앞이었다.
* * *
어느새 달만 떠 있던 밤이 물러가고, 아침을 알리는 해가 떠올랐다. 조용한 거리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열린 창문 사이로 비추는 햇빛이 이준의 눈을 사정없이 찔러댔지만, 그의 표정은 전에 없이 밝았다. 피로에 절어 창백하게 변해있던 그의 두 뺨에는 어느 새 평상시의 그것과 같은 발그레한 빛이 돌고 있었다.
이틀 동안 연금비약을 제조한 탓에 이준의 염력 회오리 안은 완전히 텅텅 비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하룻밤의 수련으로 염력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물론이고, 전보다 더 많은 양의 염력이 몸에서 넘실대는 것이 느껴졌다. 고생스럽기는 하지만, 확실히 고급 연금비약을 만드는 것은 그 자체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수련이었다.
그는 싱긋 웃으며 침대에서 내려와 세수를 한 뒤 옷을 갈아입고는 잽싸게 머리 위에 시커먼 망토를 둘렀다.
일찌감치 거실에서 이준을 기다리고 있던 아라와 보람은 온 몸을 검은 색으로 두른 이준의 모습에 흠칫 놀라며 눈치를 살폈다.
“보람아 너도 얼굴 가려. 아라는……. 할 수 없지. 그 날 밤 흑각성의 어지간한 강자들은 다 네 얼굴을 봤을 테니까.”
“싫어! 난 쓰기 싫다고.”
이준의 옷차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 챈 보람은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흑각성 강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얼굴을 가리려는 것이겠지만, 저런 망토를 둘러쓰고 다닐 것을 상상하니 생각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잠시 실랑이를 벌인 끝에 이준은 그녀의 머리 위에 시커먼 망토를 두르는데 성공했고, 결국 보람 역시 도둑놈처럼 시커먼 차림새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자, 이제 나가자.”
채비를 마친 세 사람은 곧바로 숙소를 나갔다.
하지만 흑황각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새하얀 옷차림을 한 사내 하나가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모어?”
이준 일행은 모어를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라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계속해서 추근거리는 그가 귀찮았고, 이준 역시 늑대파와의 일로 그에게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보람은 아예 대놓고 미간을 찌푸리며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상대방의 차가운 시선을 느낀 모어는 약간 멋쩍은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옥패 하나를 꺼내 이준한테 건넸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 경매의 귀빈석 자리를 하나 내어드리려고 찾아 뵈었습니다. 이걸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흑각성에선 명성이 자자한 강자들입니다. 제가 아버지한테 졸라서 겨우 얻어낸 것이니 성의를 봐서라도 꼭 받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고맙게 받겠습니다.”
이에 이준은 굳이 사양하지 않고 상대의 성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귀빈석에 앉아 누릴 수 있는 혜택을 걷어차는 짓을 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모어에게 간단한 감사 인사를 전한 뒤, 세 사람은 곧바로 경매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준 일행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짐짓 친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모어의 두 눈에 곧바로 살기가 감돌았다.
‘날 무시해…? 두고 보자 이 개자식…….’
흑황종이 주체하는 경매가 열리는 장소는 시내 중심 위치에 있는 광장이었다. 이준 일행이 그 곳에 도착했을 때는 광장 전체가 사람으로 바글바글 했다. 하지만 모어가 건넨 옥패를 내밀자, 흑황종에서 마련해 둔 특별 통로를 통해 아주 쉽게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통로 주변엔 흑황종의 병사들이 배치돼 있었고, 그들의 손에는 저마다 예리한 무기가 들려있었다. 살기등등한 그들의 태도에 외부인들은 감히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 했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세 사람이 흑황종의 귀빈 전용 통로를 통과하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보며 수근대기 시작했다.
“저 세 사람 도대체 누구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흑각성 사람들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주위의 뜨거운 반응에 문을 지키고 있던 흑황종의 장로 세 사람도 서로 눈길을 주고받더니 곧바로 웃는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허허, 임현 선생을 드디어 만나 뵙네요.”
청색 도포를 입은 흑황종 장로 한 사람이 먼저 이준을 향하여 공손한 태도로 인사를 건넸다.
온 몸을 검은 망토 안에 숨긴 이준은 노인을 향해 가볍게 머리를 끄덕여 보이곤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다소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준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 노인은 감히 불쾌감을 표현할 수 없었다. 6레벨 연금비약을 제조하는 연금술사와 투종이 한데 모여 있으니, 불만이 있다 해도 감히 그것을 드러내서는 안 됐다.
“세 분,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감사합니다.”
세 장로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이준은 아라와 보람을 데리고 곧바로 경매장 안으로 향했다.
“저 어린 여자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참으로 공포스럽군. 옆에 서 있기만 했는데도 체내의 염력이 멈춰버리는 것 같았어.”
시야에서 멀어지는 세 사람을 지긋이 바라보던 청색 도포를 입은 장로는 식은 땀을 닦아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임현이라는 사람이 아마도 그날 연금비약을 제조한 사람인 것 같군. 저렇게 어린 나이일 줄을 상상도 못했는데…….”
“저 사람들의 내력이 참으로 궁금하군. 흑각성에선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말이야.”
“이 일은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니 그만 신경을 끄는 게 좋겠군.”
청색 도포를 입은 장로는 가볍게 고개를 흔든 뒤 다시 웃는 얼굴로 귀빈들을 맞이하는데 집중했다.
* * *
이준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좌석들이 빼곡하게 들어 찬 경매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규모의 경매장 크기에 이준도 쉽게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 사람이 놀란 표정으로 경매장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아리따운 외모를 가진 시녀 하나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세 분, 혹시 귀빈석 옥패를 소지하고 오셨나요?”
이에 이준은 곧바로 저장반지에서 모어가 준 옥패를 꺼내 시녀에게 건넸다.
“환영합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시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자, 마치 작은 방처럼 꾸며진 호화로운 귀빈석이 나타났다. 그 안으로 들어가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잡음도 거의 차단되었다. 이 정도 자리라면,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아주 쾌적하게 경매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