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0화. 움직임
첫 번째 실패가 있은 뒤 다시 대여섯 시간이 흘렀을 무렵, 준은 또 다시 약재의 융화 작업에 돌입했다. 이번에는 제법 성공적으로 융화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융화작업을 끝마치고 연금비약을 다듬는 과정에서 또 다시 자그마한 실수가 벌어졌고, 결국 또 다시 진귀한 약재들이 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미 못 쓰게 된 약재들을 보면서 이준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이 약재들은 돈이 있어도 살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으니 더욱 마음이 쓰릴 수 밖에 없었다.
“제기랄, 또 망했어.”
가까스로 심신을 안정시킨 이준은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약재를 꺼냈다. 이번에 실패한다면 약재를 모으는데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장담할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숨을 고른 이준은 신중한 표정으로 청록색의 불꽃을 피워냈다.
마지막 약재를 던져 넣는 이준의 손길은 전에 없이 진지했고, 그의 이마에는 어느 새 땀이 비오듯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온 신경을 약솥에 집중한 채 액체가 되어버린 약재들을 바라봤다. 다행히 이번엔 아무런 문제도 없이 융화 작업이 끝났고, 약솥 안에는 밤송이만한 액체 덩어리가 굴러 다니고 있었다.
다음으로는 액체 상태의 약재를 고체로 만드는 작업이었다. 그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서서히 불꽃의 온도를 조절했다. 약솥의 온도가 점점 낮아지자, 동글동글한 액체 덩어리가 딱딱하게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까지 화력을 잘 유지해 고체가 된 연금비약을 다듬는 것 뿐이었다.
* * *
한편, 밀실 밖에선 아라와 보람이 접대실 탁자 앞에 앉아 이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이틀째인데 왜 아직도 안 나오지?”
“연금비약을 만들 때는 절대로 마음을 급하게 먹어서는 안돼. 조금만 더 기다려 봐. 아마 거의 다 끝나 갈 거야.”
“그 말은 이미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들었어.”
보람이 입을 삐죽이며 다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려는 순간, 갑자기 방 전체가 미세하기 떨리기 시작했다. 이에 아라와 보람은 약속이나 한 듯 밀실 쪽으로 눈을 돌렸다.
“성공했나본데?”
아라는 연금술사가 아니었지만, 독종의 종주로 몇 년 동안 보고 들은 것이 있었기에 고급 연금비약이 완성되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바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아는 바에 따르면, 이런 반응은 고급 연금비약을 제조하는데 거의 성공했을 때 벌어지는 일 이었다.
“마무리 단계일수록 더 조심해야 해. 절대로 약간의 방해도 있어서는 안 돼.”
아라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밀실 안에서 무시무시한 에너지가 치솟으며 ‘펑’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을 뚫고 청명한 빛 줄기가 솟구쳤다.
“도대체 무슨 연금비약이길래 이렇게 큰 반응을 보이지? 이 정도라면 밖에 있는 놈들이 연금비약을 노리고 몰려올지도 모르겠는데……. 보람아, 넌 잠깐만 혼자 여기를 지키고 있어. 누가 들어오거든 바로 죽여버려. 연금비약을 훔치러 온 놈일테니까.”
“그럼 넌?”
“난 바깥에서 이곳으로 몰려드는 놈들을 막아야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라의 몸이 방 안에서 자취를 감췄다.
잠시 후, 그녀의 몸이 세 사람이 머무는 숙소의 지붕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아라의 예상대로, 고작 일 분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 만에 이준 일행의 숙소 주위로 연금비약을 노리고 온 흑각성의 강자들이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누군가 저 방 안에서 연금비약을 제조하는 게 분명하군.”
“이건 7레벨 연금비약 정도의 에너진데.”
“7레벨 연금비약은 이것보다 더 큰 파동이지. 아마도 6레벨 연금비약 중 보기 드문 걸 제조하는 모양이야.”
“누가 이런 연금비약을 만드는지 궁금하군. 설마 흑황종의 기문산은 아니겠지?”
“설마. 그 양반은 6레벨이 된지도 얼마 되지 않았어.”
“어떤 연금술사가 이런 약을 제조하는지 참으로 궁금하군.”
연금비약이 제조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빛 기둥을 보고 모여든 강자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추측을 늘어놓으며 서서히 이준의 숙소 주위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준의 형인 이찬과 가람 아카데미의 대장로 서천우 역시 이준의 연금비약이 만들어 낸 빛에 이끌려 그 곳에 당도해 있었다. 또, 그들의 건너 편에는 마염곡의 장로인 방언과 정체 불명의 회색 망토를 두른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마염곡의 사람들도 올 줄은 몰랐네.”
“마염곡 놈들을 만나셨습니까?”
서 장로의 눈길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마염곡의 첫째 장로인 방언의 모습이 보였다.
“이번엔 절대로 쉽게 보내서는 안 되겠어요.”
이찬이 마염곡의 사람들을 발견했을 무렵, 상대방 역시 이찬과 서천우를 발견하고는 살기 등등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영감탱이가 오다니……. 이거 일이 꼬이는군.”
“저 영감탱이도 같이 보내 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보다 지금 궁금한 것은, 대체 저 연금비약을 만든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 입니다. 이 정도의 연금비약을 만들 수 있는 자라면 흑황종의 기문산보다 더 대단한 사람일텐데……. 흑각성에 언제 이런 연금술사가 나타났단 말입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이번에 흑황성에 적지 않은 강자들이 모였으니 아마도 그 중 한 사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곳에서 연금비약을 만들다니, 어리석군. 보아하니 지금쯤 마무리 단계인 것 같은데……. 이럴 때 방해를 받으면 상당히 곤란할텐데 말이야.”
방언의 옆에 서 있던 회색 도포를 입은 남자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어떤 결과를 보고 싶은 건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이런 레벨의 연금술사라면 응당 그 영혼도 대단할텐데 말이죠.”
그 때, 지붕에 서있던 백발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는 자는 모두 적으로 간주하겠다.”
“투종 강자?”
적지 않은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그 하얀 그림자에게서 차가운 살기를 느끼고는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정말로 투종 강자라고? 저 어린 여자 애가? 그럴 리 없어.”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심상찮은 기운에 방언도 두 눈을 치켜 떴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언제 저렇게 어린 투종 강자가 나타났단 말인가.
“지금부터 열을 세겠다. 그 안에 사라지지 않으면……. 뒷일은 상상에 맡기지.”
아라의 살기등등한 태도에 방언 역시 흠칫 놀란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이면서 손을 흔들어 데리고 온 사람들을 뒤로 물렸다. 한 눈에 보기에도 상대의 실력은 자기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찬과 서천우 대장로 역시 막 등을 돌려 자리를 뜨려던 순간, 두 사람을 발견한 아라가 잠시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돌연 딴 사람처럼 온화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혹시 이씨 가문 사람들인가요?”
백의의 여인이 자신에 대해 아는 듯 하자, 이찬은 잠시 망설이다가 앞으로 나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씨 가문의 부가주인 이찬이라고 합니다.”
이찬의 곁에 있던 서천우는 긴장한 표정으로 눈 앞의 여인을 훑어보고 있었다. 이 젊은 투종이 이씨 가문과 어떤 관계이냐에 따라 오늘 가람 아카데미와 이씨 가문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녀가 이씨 가문에게 호의적이라면 마염곡은 감히 이씨 가문을 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씨 가문에게 적대적이라면, 이씨 가문과 가람 아카데미가 힘을 합쳐도 마염곡을 막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이찬의 대답을 듣고 나자, 아라의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 뒤 정중한 목소리로 상대에게 물러나줄 것을 요청했다.
“그렇다면 뒤로 좀 물러서 주시겠습니까? 안에서 연금비약을 제조하는 사람을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방언의 얼굴은 완전히 돌처럼 굳어있었다. 만약 저 투종이 이씨 가문의 사람이라면, 이씨 가문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마염곡에게는 결고 좋은 일이 아니었으니, 방언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도 당연했다.
“저렇게 젊은 나이의 여자 투종 강자가 있다는 소문은 여태 들은 적이 없는데……. 갑자기 왜 이곳에 나타난 거지? 이씨 가문과 연이 있다면 어째서 이씨 가문의 사람이 저 자를 못 알아본단 말이냐?”
방언이 그렇게 혼잣말을 하고 있는 동안, 이찬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눈 앞의 상대에 대해 짚이는 바가 없었다.
아라의 말에 따라 이찬 일행까지 물러서자, 이준이 머무는 집 주위는 다시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 집과 멀리 떨어진 곳에는 여전히 많은 인파들이 모여들어 있었다.
“하하하, 우리 흑황종에서 진행하는 경매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실 줄이야. 이 늙은이의 체면이 한결 올라간 것 같아 기분이 좋군요.”
이찬 일행이 물러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흑황각 구석진 곳에서 그림자 몇 개가 나타났다.
황금색 망토를 두른 노인 하나가 웃는 얼굴로 허공을 가르고 걸어오자, 장내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 같이 놀라움을 금치 못 했다. 노인의 망토에는 황금빛 구렁이가 그려져 있었으며,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부드럽게 꿀렁이며 기이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노인의 뒤로는 하얀색 도포를 입은 모어와 연금술사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인물 중에는 천약방에서 이준과 약재를 두고 싸움을 벌였던 기문산도 있었다.
“이럴수가, 흑황종의 종주인 모천행이잖아!”
“듣자 하니 모천행은 이미 10년 전에 투종의 경지에 올랐다던데…….”
“잠깐, 저 양반은 은거 중 이었던 것 아닌가? 대체 왜 여기 나타난거지?”
모천행의 등장에 그 곳에 모여든 흑각성의 강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한편, 지붕 위에 서 있는 여인에게서 투종의 기운을 감지한 모천행은 어두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저, 저 사람이 어째서 여기에?”
그 때, 모천행의 뒤에 서있던 모어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 여인을 알고 있느냐?”
“본 적은 있지만 잘 알지는 못합니다.”
노인의 질문에 모어는 약간 뜸을 들이더니 자신이 겪었던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가 설명을 마치자, 모천행의 얼굴이 더욱 어둡게 내려 앉았다.
“그렇다면 저 안에 있는 연금술사가 바로 기 장로가 말하던 그 젊은이인 모양이군. 그 나이에 벌써 저 정도 경지에 이르다니……. 실로 장래가 두려운 젊은이가 아닌가. 휴……. 헌데 왜 굳이 이곳에서 연금비약을 제련한단 말이냐. 그것도 6레벨 이상의 연금비약을……. 덕분에 우리만 난처하게 됐구나.”
모천행의 뒤편에 서있던 기문산은 지붕 사이로 새어나오는 빛 기둥을 바라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모어의 말에 따르면, 지금 6레벨 연금비약을 만들고 있는 것은 분명 자신과 시비가 붙었던 그 애송이가 틀림없었다. 그 날도 나이에 걸맞지 않은 상대의 실력을 보고 적잖이 놀랐지만, 지금 느끼는 감정에 비하면 천약방에서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기문산의 기분을 더욱 언짢게 만든 것은, 상대의 실력보다도 상대의 ‘나이’였다. 자신의 반만큼도 살지 못한 새파란 애송이가 자신보다 높은 경지에 이른 연금술사라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