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9화. 투종의 열쇠
세 사람이 각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자, 세 사람의 방과 꽤 떨어진 다른 방에서 기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방 안에는 몇 사람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빨간 머리카락을 한 노인이었다. 그 곁에는 실력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노인 몇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마염곡에서 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지만, 의자에 앉은 제일 장로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몸을 바르게 하고 잔뜩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회색 망토를 걸친 그림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이번 경매에는 흑각성의 유명한 세력들이 모두 참여한다고 합니다. 보아하니 그들도 점액 때문에 온 것 같습니다.”
“주인님께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리수의 점액을 손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걱정 마십시오. 저희 마염곡에서 목숨을 걸고 그 보리수의 점액을 손에 넣겠습니다. 헌데 이번에 이씨 가문은 물론이고, 가람 아카데미에서도 강자들을 파견했다더군요. 이 두 세력은 모두 저희 마염곡과는 관계가 좋지 않으니 선생님께서 조금 도움을 주실 수 있는지요?”
“이씨 가문과 가람아카데미라……. 걱정 말아요. 한 사람도 도망치지 못할 거예요.”
상대의 단호한 한마디에 방언의 입가에는 곧바로 환한 미소가 번졌다.
“이 보리수의 점액에 관심이 있는 놈들이 정말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흑황종에서는 왜 이 귀한 보물을 경매에 부쳤을까요? 보리수의 점액은 보리심과 관련된 물건이 아닙니까.”
“그들도 스스로 찾을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고, 그럴 능력이 없었겠죠. 아무리 그 보리수의 점액과 보리심이 관계가 있다고 해도 그들은 그걸 찾아낼 자격이 못 되니까. 그러니 경매를 해서 자신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과 바꾸는 게 더 좋다고 여기는 것이겠죠. 아니면……. 그 자들이 뭔가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보리심이 진짜로 투성 강자들과 관계가 있는 것 입니까?”
“흠……. 글쎄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어떤 일은 모르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는 게 많으면 그만큼 위험도 많이 따른답니다.”
상대의 짤막한 한마디에 방언의 등줄기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죄송합니다. 그럼 시간도 늦었으니 저흰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돌아가 점액에 관한 소식을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알아보는 김에 이번에 어떤 강자들이 왔는지도 좀 알아봐 주세요. 투황 강자들은 놔두고, 투종들만. 비록 그들도 이 보리수의 점액과 관련된 소문이 진짜인지까지는 알지 못하겠지만, 투성이라는 두 글자가 갖는 무게는 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니까요.”
“네, 잘 알겠습니다.”
회색 망토를 걸친 사람이 말을 마치자, 방언은 공손한 자세로 두 손을 모아 인사를 올린 뒤 잽싸게 방을 나갔다.
잠시 후,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오늘 낮에 봤던 그림자가 왜 그렇게 익숙하게 느껴졌지? 설마 어디서 본 적 있는 사람인가?”
* * *
다음 날 아침, 몇 줄기 눈부신 아침 햇살이 대나무 사이를 뚫고 이준의 방으로 들어왔다. 조용히 눈을 감고 수련에 집중하던 이준은 천천히 두 눈을 뜨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거실로 나가자, 아라와 보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금비약은 언제부터 제조할 건데?”
“지금부터 할 거야. 잘 부탁할게. 절대로 방해를 받으면 안돼.”
“알겠어.”
간단히 세수를 마친 이준은 바로 밀실로 들어갈 채비를 시작했다.
그 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그의 귀를 자극했다.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이 흑황각에 그들을 찾아올만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잔뜩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문을 열던 이준은 문 밖에 서 있는 하얀 도포를 입은 모어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임현 동생, 나보다 나이가 어려 보이니, 동생이라 해도 괜찮겠지? 어제는 내가 실례가 많았던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에 이렇게 직접 찾아왔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내가 세 사람을 데리고 여기저기를 둘러보게 하고 싶은데.”
“죄송하지만 오늘은…….”
이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등 뒤에서 바람이 느껴졌다.
그 바람은 정확하게 문 밖에 서있는 모어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곧이어 보라색 머리의 소녀 하나가 번개처럼 날아와 모어에게 주먹을 날렸다.
갑작스런 공격에 모어는 다급히 몸을 물리며 오른팔을 휘저어 그녀의 주먹을 흘려보냈다. 아마도 이런 식의 수비가 그의 장기인 듯 했다.
보람의 주먹을 흘려보낸 모어는 곧바로 그녀의 손목을 붙잡은 채 부드러운 동작으로 그녀의 자세를 무너뜨렸다.
“흥!”
하지만 똑같은 수에 몇 번이나 당할 보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두 주먹에 힘을 주자, 양팔에서 보라색 섬광이 터져 나오며 모어의 두 손을 튕겨냈다.
“보람아! 안돼! 그만하고 돌아와.”
“흥!”
진심으로 상대를 공격하려는 듯한 보람의 기세에 당황한 이준이 황급히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안된다니까! 그만 해!”
이준이 다시 한번 자신을 나무라자, 보람은 혀를 한번 내밀고는 쿵쾅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아직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나이라……. 죄송합니다.”
이준은 멋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모어에게 사과 인사를 건넸다.
“아, 그리고, 오늘은 제가 다른 일이 있어서……. 다음에 기회가 되면 그때 구경하도록 하죠.”
말을 마친 이준은 곧바로 문을 닫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모어는 완전히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문 밖에 남겨졌다.
“임현이라고 했지……. 좋아. 내가 오늘 이 수모를 꼭 기억하지.”
너무나 황당한 나머지 잠시 멍해져있던 모어는 속으로 이를 갈면서 욕을 퍼부은 뒤 이를 악물고 발길을 돌렸다.
* * *
같은 시각, 방 안으로 돌아온 이준은 보람과 함께 배꼽이 빠져라 웃어댔다.
“아하하하! 이제 다시는 우리를 찾아오지 않겠지?”
그렇게 한참을 웃은 뒤, 이준은 다시 진지한 얼굴로 아라와 보람에게 당부했다.
“그럼 잘 부탁할게. 만약 누군가 억지로 들어온다면 절대로 가만 두지 마.”
“걱정하지 마. 아무도 방해하지 않게 잘 지키고 있을게.”
곧이어 철커덕 하는 소리와 함께 밀실로 통하는 문이 잠겼다.
이준이 밀실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아라는 또 다시 바닥을 구르며 웃고 있는 보람을 보며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준 물건은 잘 처리했지?”
“그럼. 조금 전에 내가 몰래 그 인간의 몸에 넣었어.”
“잘했어!”
* * *
한편, 밀실 안에 들어선 이준은 돌로 만든 침대 위에 앉아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 앞엔 열 몇 개의 옥으로 된 상자들이 놓여 있었고, 그 상자 안에는 짙은 약향을 풍기는 약재들이 들어 있었다.
그 약재들은 모두 반 년 사이에 세 사람이 산 속에서 찾은 약재였다. 정확히는 보람이 찾은 약재를 강탈한 것이었지만……. 어찌됐든, 하나같이 진귀한 물건들이었으니, 그 가치는 천약방에서 산 마지막 세 가지 약재들보다 낮지 않았다.
이준이 이번에 제조할 연금비약은 일명 ‘투종의 열쇠’라고 불리는 6레벨의 연금비약 이었다. 이 연금비약에는 실력을 높이는 효능은 없었지만, 투황 최고봉에 있는 강자들로 하여금 성공적으로 투종에 진입하도록 도와주는 물건이었다. 게다가 복용한 사람은 투종에 실패를 하더라도 그 전에 쌓았던 실력을 그대로 보존시킬 수 있었으니, 투황 최고봉에 이른 강자들이 눈이 시뻘개져 찾는 물건이었다.
투황에서 투종으로 진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투황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투종 단계에 진입하는데 실패하면 체내의 모든 염력이 뒤집혀 레벨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비참한 결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때문에 투황 레벨의 최상에 있는 강자들 중 상당수는 감히 투종에 도전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이 ‘투종의 열쇠’는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었다. 그리고 이준에게는 보리수의 점액을 얻기 위한 열쇠였다.
이준은 눈처럼 새하얀 옥 상자를 훑어보고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커다란 약솥 하나가 공중에 떠오르더니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지며 묵직한 쇳소리를 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머릿속으로 투종의 열쇠의 조합표를 떠올렸다. 곧이어 이준의 검은 눈동자에 청록색 불꽃이 일었다.
훅-
다음 순간,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청록색의 불길이 솟아 약솥 안으로 떨어졌다.
약솥 안에 들어간 한 줄기 작은 불길은 점점 더 활활 타오르며 새빨간 솥을 더욱 붉게 달구었다.
“약황이라는 별칭이 영 헛것은 아니었나보군. 정말 대단한 약솥이야. 스승님의 약솥과 비교해도 전혀 밀리지 않을 것 같아…….”
두 개의 천지의 불꽃을 융합시킨 자신의 불꽃에도 끄떡도 하지 않는 약솥의 견고함에 이준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약솥이 일정한 온도에 도달하자, 이준은 품에서 차가운 한기를 내뿜는 새하얀 옥 상자 하나를 꺼내들었다. 상자 안에는 얼음조각 같은 마른 나뭇가지 하나가 조용히 누워 있었다. 말라 비틀어질 대로 비틀어진 겉면과는 달리, 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농후한 약향은 연금술사라면 누구나 감탄할 만한 것이었다.
이 ‘냉기의 가지’ 라고 불리는 약재는 사실 나뭇가지가 아니라 극심한 냉기가 결집되어 만들어진 자연 에너지의 결정체와도 같은 것으로, 얼음 염력을 사용하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보물이었다.
손가락으로 그 자그마한 약재를 붙잡자, 서늘한 냉기가 손가락 끝을 타고 흘러 어깨까지 전해졌다. 그의 팔에는 어느 새 새하얀 서리가 내려 앉아 있었다.
서둘러 체내의 화염을 움직여 한기를 몰아내 이준은 곧바로 냉기의 가지를 제련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냉기의 가지는 백색의 끈적한 액체로 변화했고, 액체로 변한 약재에서는 진하디 진한 에너지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밀폐된 방 안에서 불꽃과 씨름 하기를 한참, 옥 상자 안의 약재들이 점점 줄어들고, 그 대신 진한 약향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얼굴에서는 땀이 비오듯이 쏟아져 내렸다. 본래 연금비약의 제련 작업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약재를 녹이는 것보다 그것을 융합시키는 과정이었고, 이런 고급 연금 비약을 만들 때는 아차 하는 사이에 어렵게 구한 약재가 재로 돌아가곤 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투종의 열쇠는 6레벨 연금비약 중에서도 최상품으로 손꼽히는 것으로, 그에 걸맞게 제조에 필요한 약재들 역시 하나 같이 진귀한 것들이었다. 만일 보람의 특수한 능력이 아니었다면 반 년은 커녕 몇 년이 걸릴지 몰랐다.
물론 지금 이준의 실력이라면 투종의 열쇠를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성공률은 채 절반을 넘지 못 했다. 그는 단 일 초도 눈을 떼지 않고 약솥의 움직임에 주시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마침내 약솥 안의 다양한 약재들이 하나로 응집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융화 작업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아 요란한 폭음과 함께 약솥이 뒤흔들리더니, 이내 약솥 안에서 탄내가 새어 나왔다.
“젠장…….”
시커멓게 타들어간 약재들로 가득한 약솥을 바라보던 이준은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약솥을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