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8화. 모어
육중한 주먹에 의해 탁자가 산산조각이 났지만, 이준은 관심조차 없다는 듯 여유롭게 차를 들이킬 뿐 이었다.
“네 놈이 며칠 전에 성문에서 내 조카를 죽였다지?”
사내의 얼굴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이런. 유감이군요.”
상대의 태연자약한 반응에 사내의 얼굴에는 단번에 먹구름이 끼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토록 담담하다는 것은 어지간히 실력에 자신이 있거나, 대단한 세력을 뒤에 업고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난 규철이다. 어떤 세력을 등에 업고 있는지는 몰라도 내 이름을 기억해두는게 좋을거야.”
“네. 그런데 우리는 아무런 세력도 배후도 없이 딱 세 사람이에요. 그리고 별로 기억하고 싶은 얼굴은 아니네요.”
이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청 위에서 일제히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새파란 애송이에게 조롱당한 규철은 분을 참지 못 하고 대뜸 이준을 향해 발길질을 날렸고, 이와 동시에 강렬한 회오리 바람이 공기를 가르며 이준의 머리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이준이 가볍게 오른손을 휘두르자, 상대의 공격이 너무나도 쉽게 와해되고 말았다.
“저 녀석도 투황 레벨이라고?”
투황 레벨 강자가 흑각성엔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준처럼 어린 나이에 이런 실력을 가진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기에 이 대결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규철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가득했다. 그 역시 이준이 투황 레벨의 강자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방금 전의 공방으로 미루어보건데, 그는 자신보다 더 강한 것이 틀림없었다.
분노로 불타던 마음에 순간 서늘한 비가 내렸다.
“이 빚은 언젠가 꼭 갚도록 하지.”
규철은 그 말만을 남기고 곧바로 자신의 수하들과 함께 몸을 돌렸다. 하지만 이준은 그를 그대로 보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뭐야 이게. 갑자기 와서 발을 날려놓고 이렇게 가는거야?”
아직 경매회가 열리려면 시간이 남았으니, 그 시간을 조용하게 보내려면 자신의 실력을 보이는 것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시비를 걸 수는 없었는데, 때 마침 상대가 먼저 시비를 걸어주었으니 이번 기회에 어중이떠중이들에게 경고를 남기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준의 눈에서 살기를 느낀 규철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나는 사람을 죽이는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니까. 나 말고 이 여자의 공격을 세 번만 받아 내면 살려주지.”
이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곁에 앉아있던 조막만한 여자아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저딴 꼬맹이와 싸움을 하라고?”
“보람아 뭐해? 빨리 준비해.”
“응.”
보람은 모처럼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 것이 즐겁다는 듯 만면에 웃음을 띤 채 규철을 향해 뚜벅 뚜벅 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보람의 모습에 모욕감을 느낀 규철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파르르 떨며 이를 악물었다.
다음 순간, 보람의 주먹이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규철의 몸뚱아리로 날아들었다. 밤톨만한 주먹이 만들어낸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거대한 소리였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상대의 힘에 화들짝 놀란 규철은 반사적으로 염력을 끌어올려 이에 대적했다.
쾅!
“이, 이런…!”
마치 거대한 바위로 내려치는듯한 묵직한 감촉에 놀란 규철이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또 다시 조그마한 주먹이 그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들었다.
퍽!
자그마한 주먹이 가슴에 적중하자, 규철의 입에서 분수처럼 피가 터져 나왔다.
순간 온 장내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내려 앉았다.
곧이어 빨간 피가 공중을 수 놓고, 규철의 거대한 체구가 그대로 날아가 기둥에 부딪히며 다시 한번 굉음이 일었다.
보람은 여전히 성이 풀리지 않았는지 작은 발을 움직여 이미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규철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보람을 바라보는 규철은 순간 까닭 모를 공포를 느꼈다.
그 순간, 쩌렁쩌렁한 웃음 소리와 함께 하얀 그림자 하나가 규철의 앞에 나타나 보람을 막아섰다.
“허허, 어린 아가씨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닌가? 흑황각에서 사상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는 걸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사냥’을 방해당한 보람은 곧바로 흰색 도포를 걸친 정체불명의 사내를 향 해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흰색 도포를 입은 사내는 담담하게 웃으며 두 손을 휘둘러 가볍게 보람의 두 주먹을 잡았다가 가볍게 밀어냈고, 이에 보람의 몸이 휘청이며 균형을 잃었다.
무시무시한 괴력을 가진 보람의 공격을 역이용하여 균형을 잃게 하는 것은 맨 몸으로 굴러 떨어지는 바위의 방향을 바꾸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 이었지만, 상대는 너무나도 쉽게 그녀의 공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사내가 균형을 잃은 보람을 향해 가볍게 손을 날리려는 찰나, 이번에는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날아와 그의 앞을 막아섰다.
“힘 없는 여자에게, 그것도 이런 어린 애한테 뭐하는 짓이죠?”
흰색 도포를 입은 사내는 대략 26, 27살 정도로 보였는데, 영민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음침한 느낌을 주는 인상을 하고 있었다.
“저 사람 흑황종의 도련님인 모어잖아.”
“아직 서른도 안 됐는데, 벌써 6성 투황 레벨이래.”
“이야……. 흑황종의 미래도 밝구만.”
한편, 눈을 가늘게 뜨고 하얀색 도포를 입은 남자를 유심히 살펴보던 이준은 상대의 농밀하고도 강렬한 염력에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있었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에서는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수준의 염력이었다.
눈 앞의 상대를 보고 놀란 것은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준과 달리 그는 단순히 감탄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으며 자라왔고, 그를 투종으로 만들기 위해 흑황종에서는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왔었다. 그리고 그런 아낌없는 지원과 천부적인 재능이 만난 결과, 그는 30살 이전에 투황 강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서른 이전에 6성 투황이 되었다는 것은 그의 자부심의 근원이었다. 흑황종내의 장로들 중 제법 재능이 있다는 자들도 투황이 되려면 최소 마흔은 넘어야 했으니, 자부심을 느낄만한 재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보다 더 대단한 천재를 만남으로써 그 자부심은 상처를 입고 말았다.
눈 앞의 상대는 분명히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염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한 눈에 보기에도 자신보다 서너살은 어려 보였다.
“하하, 연약하다니요. 이 꼬마 아가씨의 어디가 연약하다는 거죠? 그리고 저는 흑황각의 관리를 맡은 사람입니다. 저 자가 아가씨를 죽이려 했다면, 저자를 막았을 겁니다. 그러니 너무 아니꼽게 생각하지는 않아주셨으면 좋겠군요.”
“그렇다면 저 사람들과 한 패거리가 아니라는 말인가요?”
“이런,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이군요. 저는 ‘흑황종’의 모어라고 합니다. 이곳은 흑황종의 귀빈들을 모시는 곳이라, 피를 봐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저 자가 소란을 피울 때 구경만 하셨는지요?”
이준의 반문에 모어의 눈이 잠시 갈 곳을 잃었다.
“흠……. 그건 죄송합니다. 그래도 이런 자질구레한 시비는 흑각성에서 자주 생기는 일이니, 내 체면을 봐서라도 눈을 감아주면 안 될까요?”
모어의 부탁에 이준은 한숨을 내쉬며 규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실력은 대단치 않았지만, 저런 인물을 살려두면 나중에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지금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흑황종의 귀빈들을 모셔둔 곳에서 흑황종의 차기 종주에게 손을 댄다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었다.
그 때, 등 뒤에서 한 가닥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머리를 돌려보니 새하얀 옷을 걸친 아라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됐어. 여기선 그만하는 게 좋겠어.”
아라의 말에 이준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아라의 성격에 이런 말을 꺼낸다는 것은, 무언가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잠시 의문스러운 눈길로 아라를 바라보던 이준은 못 마땅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이준을 말리는 아라에게 모어가 웃으며 감시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아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아, 제 이름은 임현이라고 합니다. 이제 일도 다 마무리된 것 같으니 저희는 이만…….”
말을 마친 이준은 모어의 인사도 듣지 않고 곧바로 몸을 돌려 아라와 함께 흑황각 내에 마련된 자신들의 구역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자리를 떠나자, 규철이 모어에게 다가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도련님, 저 사람들을 이렇게 그냥 보내주실 생각이십니까?”
“그럼 더 이상 어떻게 해야 되는데? 저 두 사람 다 투황 레벨의 강자들이야. 내가 아무리 흑황종 사람이라 해도 저 사람들의 배경을 알지 못하고선 섣불리 행동할 수가 없어.”
“그럼 어떻게 하실 건데요? 저 녀석은 분명 도련님을 기억하고 있을 텐데.”
“급할 거 없어. 먼저 어떤 배경을 가진 자들인지 알아보고 움직여도 돼.”
* * *
한편, 이미 대청을 떠난 이준 일행은 느긋하게 자신들의 숙소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도 성이 차지 않아?”
“흥. 왜 그 인간을 죽이지 못하게 했어? 채린 언니라면 그런 인간은 진작에 죽였을 거야.”
“걱정 마. 그 인간 삼 일을 버티지 못하고 네 소원대로 비참하게 죽을 거야.”
아라의 의미심장한 한마디에 이준의 이마에 순간 식은 땀이 맺혔다.
“너 설마 독을……?”
이에 아라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시녀가 알려 준 길을 따라 자신들의 휴식 공간에 도착했다. 조용하면서도 은은한 대나무 향이 가득히 느껴지는 것이 퍽 분위기가 좋은 곳 이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넓은 방에는 거실 외에도 몇 개의 객실은 물론이고 수련을 할 수 있는 밀실까지 있었다.
“잠깐 여기 모여 줄래?”
방 여기 저기를 둘러보던 이준과 보람은 아라의 말에 잽싸게 거실 가운데 있는 탁자로 모였다. 주위를 살피던 아라는 저장반지에서 파란색의 꽃송이를 꺼내 꽃병에 꽂은 뒤 곧바로 저장반지에서 알약 두 개를 꺼내 이준과 보람에게 건넸다.
“이 꽃의 향기는 사람을 기절시키는 효능이 있어. 하지만 이걸 먹으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거든. 미리 먹어둬.”
“어떨 때보면 연금술사보다 네가 더 대단한 거 같아. 이런 눈에 띄지 않는 꽃에 그런 독이 들어있다니……. 이런건 대체 어떻게 아는거야?”
이준은 아라의 치밀함과 독에 대한 지식에 감탄사를 내뱉으며 그녀의 손에 있던 알약을 집어삼켰다.
한편, 아라는 여전히 기분이 상한 듯 입술을 잔뜩 내민 채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너 설마 모어 때문에 그래? 그래봤자 6, 7성 투황이야. 조금 전엔 네가 준비를 안 한 상태에서 당했으니 그렇지. 다음에 다시 싸울 기회가 있다면 만반의 준비를 하고 독하게 날려. 그러면 되잖아.”
이준의 말에 조금 기분이 풀렸는지, 평소보다 세 배는 부풀어 있던 그녀의 볼이 조금 가라 앉았다.
“좋아. 다음에 그놈을 만나면 그놈은 내꺼야. 약속해.”
“그래, 약속할게.”
순간 이준의 머릿속에 모어라는 자와의 만남이 오늘 한번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스쳤다.
“오늘 우리에게 시비를 걸었던 그 규철이라는 인간, 혹시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건 아닐까?”
그 때, 아라가 조심스럽게 한 가지 추측을 내놓았다.
“설마 그 기문산이라는 영감탱이?”
이에 보람은 생각만 해도 화가 난다는 듯 주먹을 붕붕 휘둘러댔다.
“잘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우리 다 조심하는 게 좋겠어. 어차피 여긴 흑황종의 뱃속이나 다름없으니까. 우선은 아라 말대로 조심하자. 보리수의 점액을 노리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고, 여기에는 흑각성의 유명 인사들이 줄줄이 모여 있으니까, 괜한 싸움에 휘말리지 않는 편이 좋겠어.”
이준의 말에 아라와 보람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각자 자기 방으로 들어가 쉬자고. 내일 난 연금비약을 제조해야 해. 그리고 그 때는 너희 둘이 나를 지켜줘. 만드는 도중에는 절대로 방해를 받으면 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