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5화. 연금비약 교환
빨간 옷을 입은 여인 역시 덩달아 이준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천약방의 주인입니다. 도연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존함을 여쭤보아도 될까요?”
“임현이라 불러주십시오. 정말 이곳에서 제가 원하는 재료들을 구할 수 있는 겁니까?”
이준의 질문에 도연의 입가에 매혹적인 미소가 걸렸다.
“호호, 찾으시는 물건은 모두 2층에 있습니다. 하지만 워낙 값진 물건들이라서요. 2층의 규정에 대해서는 이미 안내를 받으셨겠지요?”
“네. 들었습니다.”
“호호, 알겠습니다. 저희 천약방은 희귀한 연금비약을 찾아 모으고 있답니다. 그리고 매달 수많은 연금술사 분들께서 연금비약을 바꾸겠다고 모이지요. 마침 오늘이 거래가 진행되는 날이니, 아주 좋은 시기에 천약방을 찾아주셨군요.”
‘바꾸겠다고 모인다.’라……. 단박에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이준이 못 마땅한 표정으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
“설마 연금술사들끼리 약재를 가지고 경쟁한다는 말입니까?”
“일종의 경매인 거죠. 단지 골드가 아니라 저희에게 필요한 연금비약을 대신 받는 겁니다. 현 장로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연금비약 교환회를 시작하죠.”
“그러지.”
도연의 말이 끝나게 무섭게 노인이 대청의 높은 누대로 걸어가 종을 쳤다. 맑은 종소리가 대청 가득 울려 퍼졌다.
“가지고 오거라.”
잠시 후, 노인의 명에 따라 십 여 명의 어여쁜 시녀들이 공손하게 은쟁반을 들고 걸어왔다. 은쟁반 위에는 꽉 닫힌 옥 상자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뒤이어 몇 개의 옥 상자가 순서대로 탁자 위로 올라갔다. 상자 뚜껑을 열자 진한 약 향기가 솟구쳤다. 냄새를 맡은 연금술사들의 얼굴에 일제히 미소가 번졌다.
“하하, 여러분 이 약재들은 저희 천약방에서 아주 어렵사리 구한 것들입니다. 감히 단언컨대, 어디에 가서도 이 정도 품질의 약재는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도연이 천천히 탁자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그렇다면 연금비약 교환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규칙은 같습니다. 고품질일수록 뒤에 남겨 놓겠습니다.”
교환회가 시작되자, 연금술사들이 벌떼처럼 몰려 들어 자신에게 필요한 약재를 찾기 시작했다.
“하하, 주인장! 조금만 기다려주시지 벌써 시작하셨군요! 제가 제 값을 지불을 못 할 까봐요?”
한창 사람들이 약재를 고르고 있던 그 때, 계단 쪽에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연한 황토색 도복을 입은 노인의 등장에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 되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가장 놀란 것은 이준이었다. 방금 온 노인 역시 연금술사였고, 조금 전 백발의 노인보다 더 강한 실력자였기 때문이다.
‘괜히 흑각성이 아니야……. 이 정도 수준의 연금술사를 하루에 둘씩이나 보다니. 찾아온 보람이 있군.’
황토색 도복을 입은 노인의 등장에 조금 전까지 떠들썩하던 연금술사들이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단상 위에 있던 여인은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단상 밑으로 내려와 노인에게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기 장로님까지 오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정말 귀한 손님이 오셨군요.”
“허허, 아무리 바빠도 여기엔 꼭 와야지. 천약방의 약재들은 하나 같이 진귀한 것들이 아닌가.”
‘기 장로’라고 불리는 늙은이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불쾌하다는 기색을 보였지만, 누구 하나 대놓고 티를 내지는 않았다. 분위기로 미루어 보건데, 흑각성 내에서 제법 명성이 있는 인물임이 분명했다.
“호호, 오늘 경매회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성공적이군요.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아직 경매회가 정식으로 시작되지 않았으니 장로님도 자리에 앉으시지요.”
도연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기 장로는 가장 앞줄에 떡하니 자리를 잡더니 담담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늙은이의 표정을 살피던 도 방주는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매번 올 때마다 자신의 든든한 뒷배를 이용해 다른 경매자들이 가격조차 부르지 못 하게 했으니, 그들 입장으로써는 여간 골치가 아픈 것이 아니었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그는 이미 6레벨에 도달해 있었다. 하지만 그 뛰어난 연금술 실력보다는 흑황종의 수석 연금술사라는 지위를 이용해 매번 경매를 망치는 것으로 이름을 날리는 사내였다.
‘이 빌어먹을 노친네가 대체 무슨 약재를 노리고 우리 가게에 온거지?’
도연은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흑황종의 수석 연금술사를 상대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쓰린 속을 달래며 경매를 시작하는 것 뿐 이었다.
약간 구석진 곳에 자리하고 있던 이준 일행은 먼저 나왔던 약재들보다 노인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현재까지 나온 약재들이 자신들이 찾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대체 그 노인이 누구길래 자리에 있는 연금술사들이 하나 같이 그의 눈치를 살피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영혼 탐지 능력으로 그를 훑어본 준은 그가 단왕 고하와 견줄만한 수준의 연금술사임을 알아차리고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가한 제국에서는 고하와 해길이 왕이었지만, 이 곳에서는 그들과 비슷한 수준의 연금술사를 벌써 둘이나 만났으니, 투기 대륙이 넓다는 말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준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경매가 정식으로 시작했다. 자리에 모인 연금술사들은 하나 같이 자신들이 마음에 드는 약재가 있는지 살피는데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준은 이 경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약재의 가격은 대략 자신이 그 약재의 레벨보다 한 단계 낮은 등급의 연금비약으로 치르면 되는 것 같았다. 즉, 4레벨 약재를 손에 넣으려면, 3레벨 연금비약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 3레벨 연금비약이 어떤 종류인지는 천약방 측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미리 준비가 됐다면 바로 약재와 연금비약을 교환할 수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한쪽 켠의 돌로 만든 단상에 놓인 솥에서 직접 제조를 해야 했다.
경매 초반에는 그의 눈에 드는 약재가 올라오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고급 약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3,4레벨의 약재가 연달아 올라오고, 연금비약과 약재의 교환이 이루어지며 현장의 분위기는 점점 더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준은 3,4레벨의 약재에도, 연금술사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금 그의 실력으로는 그 정도 레벨의 약재나 연금술사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이상한 일 이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마침내 이준이 원하는 수준의 약재에 가까운 질 높은 약재들이 하나 둘 경매에 올랐다. 이에 따라 그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던 4레벨 이상의 연금술사들도 서서히 경매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늘 경매에서 가장 대단한 실력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기장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마도 특별히 노리고 온 약재가 있는 모양이었다.
어느 덧 돌 위에 놓인 약재들의 가지 수는 이미 10개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아직까지도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이준과 기장로 뿐 이었다.
이준 일행의 거동을 살피던 늙은이는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이준을 바라봤다. 상대가 자신과 같은 약재를 원하는지 살피는 것 같았다.
계속되는 따가운 시선에 이준은 노인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준의 그런 담담한 태도에 노인은 다소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이준을 노려봤다. 감히 흑황성에서 자신을 이렇게 대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한 태도였다.
“여러분, 이제부터 저희 천약방 최고의 약재들을 선보이겠습니다.”
그 때, 도연이 웃으며 다섯 개의 옥상자를 경매대 위에 올렸다.
그러자 시종일관 의자에 기댄 채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던 노인과 이준이 약속이나 한 듯 자세를 바로 잡으며 다섯 개의 옥 상자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이 약재들에 관심이 있다면 가격을 말해 주십시오.”
이준의 시선은 그 중 세 개의 옥 상자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심호흡을 한 이준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이에 주위의 연금술사들은 하나 같이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약재들을 손에 넣으려면 적어도 4레벨이거나 5레벨 이상의 연금술사여야 했기 때문이다. 헌데 이제 갓 스물이나 넘어 보이는 새파란 애송이가 몸을 일으켰으니, 그들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이준은 모두의 시선 따위엔 관심도 없다는 듯 무표정하게 앞으로 걸어 나가 경매대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도 방주님, 이 세 가지 약재들을 가지려면 어떤 연금비약이 필요하지요?”
하지만 이준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의 등 뒤에서 커다란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세 개의 약재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 옥골열매는 내 것일세.”
기 장로의 한마디에 자리에 있던 연금술사들은 안타까움과 짜증이 섞인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봤다.
이준은 남몰래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
머리를 돌려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노인과 눈을 마주친 이준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에 도연은 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곤란하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기 장로님, 이 분이 먼저인데 이러시면…….”
“여긴 경매 현장이 아니던가? 그럼 선착순이 아니라 가격을 많이 부르는 사람이 물건을 가져가야지.”
노인의 말에 도방주의 입가에는 절로 쓴 웃음이 번졌다. ‘정말로 가격을 쳐주기만 한다면 말이지.’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다.
“이보게, 젊은 친구. 나는 기문산이라고 하네. 내가 지금 이 ‘옥골열매’가 꼭 필요해서 말이지. 자네가 이 늙은이에게 양보를 하는 게 어떤가?”
노인은 짐짓 예의바르게 부탁을 하는 척 말을 하면서도 옥골열매가 든 상자가 이미 자신의 것이라도 되는 냥 그것을 품 안에 넣고 있었다.
‘양보’라는 단어가 떨어지기 무섭게 다른 연금술사들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매번 있는 일 이었다. 그는 매번 흑황성 내의 이런 저런 약방을 돌아다니며 이런 식으로 정당한 값을 지불하지 않고 약재를 갈취해 갔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상대는 곧바로 손을 뻗어 옥 상자를 손에 넣으려는 상대의 팔목을 낚아챘다.
“어르신, 죄송하지만 저도 이 옥골열매가 꼭 필요해서 양보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예상 밖의 대답에 기문산은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허허, 젊은이, 내가 누군지 몰라서 이러나?”
하지만 이준은 그딴 것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대꾸조차 하지 않고 도연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죄송한데 이 세 가지 약재들을 교환하려면 어떤 연금비약이 필요한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저기요, 진짜로 그렇게 하시려고요? 이 한 알의 옥골열매 때문에 흑황종의 수석 6레벨 연금술사의 노여움을 살 필요는 없잖아요.”
너무나 당돌한 이준의 태도에 도연이 더 당황한 듯 식은 땀을 흘려댔다.
“저를 위해서 하는 말씀인 건 알겠지만, 저는 이 열매가 꼭 필요해요. 그러니까 도 방주께서는 어떤 연금비약이 필요한지만 알아봐 주세요.”
이준의 단호한 태도에 도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곁에 서있던 백발의 노인에게 신호를 보내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 가지 약재는 우리 천약방에서 품질이 최상인 약재인 것만큼 그 가격도 만만치 않습니다. 만약 선생께서 이 약재를 가져가려면 저희에게 5레벨 연금비약 하나를 제공하셔야 합니다.”
“5레벨이요?”
속으로 계산을 해 보니 그다지 비싼 가격도 아니었다. 이 세 가지 약재들로 연금비약을 제조하면 6레벨 언저리의 연금비약은 나올 것이니 5레벨 연금비약이라면 결코 바가지라고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