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4화. 천약방(千藥坊)
성문과 이어지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 밖으로 나오자, 눈부신 태양빛이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이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봤다. 거대한 성 내부의 넓은 길바닥은 발 디딜 틈 없이 사람으로 가득했고, 사방에는 온갖 진귀한 물건들이 널려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아라가 물었다,
“먼저 성 내부의 대형 약재상을 돌아보자. 흑각성 안에는 제법 희귀한 약재들이 많으니까, 운이 좋으면 필요한 것들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좋아.”
아라는 고개를 끄덕이자, 이준이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맞다, 다음에 또 그런 경우 없는 놈들을 만나면 참지 말고 그냥 혼쭐을 내줘. 흑각성에서는 흔한 일이니까 너에게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 거야. 그리고 그런 놈들을 가만히 두면 결국 시비를 걸어온다고. 이곳에서 귀찮은 일을 피하려면 그런 얼간이들에게 누가 위인지 확실히 알려주는 게 좋아.”
이준의 설명에 아라는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음부터는 그렇게 할게.”
* * *
경매장 근처의 길가에서는 욕 소리, 고함 소리가 난무했다. 거리 양쪽으로는 크기가 제각각인 점포가 줄줄이 서 있었으며, 그 근처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이준을 포함한 세 사람은 가벼운 걸음으로 거리를 누비면서 양측 점포를 쉬지 않고 훑어봤다. 잠깐 살펴본 것만으로도 상당한 규모라는 것을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이라면 이준이 찾는 약재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까지는 수확이 없었지만 이준은 그리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가 필요로 하는 약재들은 하나 같이 무척이나 희귀한 것들이기 때문에, 흑각성 전체를 뒤집어도 몇 개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잠시 후, 한 거대한 점포 앞에서 이준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약 판매점의 이름은 ‘천약방(千藥坊)’으로, 성안에 들어와 본 점포 중 가장 거대한 크기를 자랑했다. ‘천약방’의 대문에는 인파들이 쉴 새 없이 오가면서 서로 밀리고 치이며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잠시 망설이던 이준은 결심을 굳힌 듯 보람과 아라를 이끌고 인파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준이 몸속에 있던 염력을 방출하자, 사람들이 두 갈래의 냇물처럼 갈려 세 사람이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났다.
막상 천약방 안으로 들어가니 시끄러운 말소리는 한결 줄어들었다. 천약방의 내부에는 진한 약향이 가득해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드넓은 공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유리 수납장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줄줄이 늘어선 약재를 구매하기 위해 약재 못지 않게 많은 사람들이 그 앞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대청은 약재 구역과 연금비약 구역으로 구분 되어 있었으며, 연금비약 구역에 월등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흑각성에서 매일 같이 목숨을 건 싸움을 하는 사람들에게 연금비약은 생명줄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준 같은 연금술사들은 약재에 더 관심이 많았다. 연금술사들은 약재만 있으면 연금비약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 굳이 연금비약에 관심을 둘 이유가 없었다.
이준은 코를 찌르는 약향에 연신 재채기를 해대는 보람을 끌고 수정으로 만들어진 매대로 걸어갔다.
“청풍초에……. 불사과…….”
하지만 판매대에 전시된 약재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이 약재들도 평범한 건 아니었지만, 이준이 필요로 하는 약재에 비하자면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맹이나 다름이 없었다.
“흑각성에 이렇게 많은 외부인이 모여드는 데에 다 이유가 있었군. 이런 약재만 해도 밖에 가져가면 엄청난 보물이라고 날개 돋친 듯 팔릴 텐데. 이렇게 별 것도 아닌 것처럼 꺼내놓다니…….”
독술사인 아라도 약재에 대해 잘 아는 편이었으니, 그 곳에 놓인 약재를 보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때, 누군가가 웃으며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손님, 혹시 필요한 약재라도 있으신가요? 저희 천약방은 흑황성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유명한 약방입니다. 이곳에서는 거의 모든 약재를 다 구할 수 있지요.”
고개를 들어보니 노인 하나가 매대 쪽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입은 복장으로 미루어 보아, 이 약방의 점원인 듯했다.
이준은 말없이 저장반지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그것을 노인에게 내밀었다. 그가 내민 종이에는 메두사에게 필요한 ‘이무기의 정수’를 만드는데 필요한 약재가 적혀 있었다.
노인은 양 손으로 종이를 받아 들고 유심히 읽어보더니 깜짝 놀란 표정으로 이준을 위 아래로 훑어봤다.
“연금술사시군요?”
“왜요? 연금술사는 여기 오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하하, 오해십니다. 저도 2레벨 연금술사라 약재 목록 정리하는 방식이 익숙해서 물었습니다.”
노인의 입가에는 흑각성 사람답지 않게 사람 좋은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렇군요. 그보다, 이 약재들을 구할 수 있나요?”
“하하. 여기 모두 여덟 개의 약재가 적혀 있군요. 다섯 개는 저희 약방에 있습니다만, 상당히 고가의 재료라 적어도 200만 골드는 필요할 겁니다. 그런데 나머지 세 종류, 그러니까 천령삼, 마수의 풀, 옥골열매는……. 조금 어려울 듯 하군요.”
노인의 답변에 이준의 얼굴에는 금세 실망한 기색이 떠올랐다.
처음 언급한 다섯 종류는 희귀하지만 시간만 들이면 충분히 찾을 수 있는 재료였기 때문이다. 그 정도 재료는 자신도 찾을 수 있었다.
“그럼 다섯 개 먼저 주시죠. 나머지는 제가 다른 곳에 가서 찾아보겠습니다.”
이준은 고개를 저으며 저장반지 속에서 골드가 들어 있는 수정카드를 꺼냈다. 그것은 이씨 가문에서 연금비약 경매를 열어 벌어들인 수익의 일부가 들어있는 카드로, 그 안에는 지금 필요한 약재를 사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의 돈이 들어 있었다.
“하하, 혹시 나머지 세 약재도 꼭 필요하신 건가요?”
이준이 선뜻 카드를 내밀며 몸을 돌리자, 노인이 또 다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구해주실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노인의 질문에 이준의 얼굴에 곧장 화색이 돌았다.
“하하하. 아주 귀한 약재라 어려울 것 같다 말씀드린 것이지, 없다고 하진 않았습니다. 다만 그렇게 희귀한 약재는 꺼내어 놓고 팔지 않지요…….”
“이런 얘기나 하려고 말을 꺼낸 건 아닐 테고,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노인의 말에서 무언가를 느낀 이준은 곧바로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를 물었다.
“성격이 시원시원하시군요. 그럼 저도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 약재가 필요하시다면 저희 천약방의 2층으로 올라가시죠. 그곳은 1층보다 더 값비싼 물건들을 모아 놓고 판매합니다. 그렇지만 골드로는 약재를 살 수 없습니다. 약재랑 같은 등급의 연금비약을 만들어 주셔야 하지요. 다시 말해 2층은 연금술사만이 출입할 수 있는 곳인 셈입니다.”
“음…….”
천약방의 독특한 규정에 이준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서는 특정 물건이 일정 수준을 뛰어넘는 가치를 지녔을 때, 비슷한 가치를 갖고 있는 물건으로 교환하는 모양이었다. 이는 돈 따위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상급 연금술사들의 거래 방식이었다. 하지만 약방에서 이런 거래 방식을 취한다는 것은 처음인지라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어떠신가요? 관심이 있다면 2층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위층의 약재는 여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귀한 것들입니다. 찾으시는 것들도 위에 있을 테고요.”
노인의 제안에 이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 약재를 혼자 찾으려면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한지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여기서 찾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안내해주시죠.”
“하하, 먼저 한 가지 말씀을 드리자면 찾으시는 약재의 가치가 4레벨에서 5레벨 연금비약 수준입니다. 그러니 그 정도 레벨의 연금비약을 만드셔야만…….”
노인은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조심스레 이준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이준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데려가 주세요.”
시원스런 이준의 답변에 노인은 곧장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공손한 자세로 앞장서서 2층으로 향했다.
“가자. 2층에 우리가 찾는 게 있는지 한 번 보자고.”
이준은 아라와 보람을 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은 뒤 노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천약방의 2층은 이준의 상상처럼 화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단촐하고 소박한 느낌이었다. 주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는 구조였다.
2층의 대청에는 여러 개의 수정 수납장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수납장 안에 는 여러 개의 옥 상자가 늘어서 있었다. 옥 상자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으로 보아 하나 같이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연금술사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귀한 약재를 구하러 이 곳에 올라온 것이 틀림없었다.
이준 일행이 위층에 올라가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가 연금술사 도복을 입고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들의 시선이 거둬졌다.
“편하게 둘러보시죠.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내를 마친 노인은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이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라와 보람을 데리고 대청을 걸어 다니며 수정 수납장에 든 약재들을 유심히 살폈다.
“푸른 암석나무, 영혼의 즙, 골수의 뿌리…….”
외부에서는 구경하기도 어려운 진귀한 재료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연금술사라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정말 대단한 걸.”
아라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보람은 아예 매대 앞에 엎드리다시피 한 채 약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준은 눈이 뒤집힌 보람의 모습에 황급히 그녀를 떼내며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안돼!”
“내가 찾아낸 약재들은 다 네가 빼앗아 놓고 내가 먹긴 뭘 먹었다고!”
보람의 눈에는 감출 길 없는 원망이 가득했다. 마치 가족을 죽인 원수라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네가 마구잡이로 먹어대니까 위험할까봐 내가 보관하고 있는 거라니까?”
이에 이준은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이미 수차례 같은 대답을 들어온 보람이 더는 속을 리가 없었다. 원망의 눈빛은 더욱 깊어졌다.
두 사람이 약재를 놓고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아라는 저도 모르게 빙긋 웃음을 짓고 말았다.
“호호, 거기 신사분이 약재를 찾으러 오신 분인가요?”
그렇게 보람과 이준이 한창 투닥거리고 있을 때, 한 여인의 온화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네, 그렇습니다만.”
그녀의 뒤에는 질박한 모습을 한 백발의 노인 하나가 서 있었다. 이준은 6레벨 연금술사 못지않은 영혼탐지능력으로 상대가 해길과 어깨를 견줄만한 수준의 연금술사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백발의 노인 역시 이준을 보자마자 흥미롭다는 듯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왜 그러시죠. 현 장로님?”
노인의 반응에 빨간 옷을 입은 여인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던졌다.
“아무 것도 아니다.”
현 장로라 불리는 백발노인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