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2화. 이씨 가문과 이준
갑작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 것을 느낀 이준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피해 오하늘에게로 다가갔다.
“역시 대단해. 그 사이에 투왕이 됐군.”
“너 이 자식은 어디 갔다 하면 2년씩은 걸리더라…….”
상대의 천연덕스러운 말투에 오하늘은 입가의 핏자국을 닦아내며 씨익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준도 그를 따라 살며시 웃음을 지은 뒤 연금비약 한 알을 꺼내 그것을 상대에게 건넸다.
“빨리 먹어. 옆에서 조금만 쉬고 있어. 이 일은 내가 해결할게.”
다음으로 이준은 자리에 주저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사촌 누이를 향해 다정한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잘 지냈지?”
이준의 따뜻한 눈빛에 이옥은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 놈들이 우리 학생을 셋이나 죽였어. 절대로 그냥 보내지 마.”
“걱정 마. 한 놈도 살려둘 생각 없으니까.”
“크하하하! 새파란 애송이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이야!”
멀지 않은 곳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석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준은 상대가 웃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다는 듯 가만히 그를 한번 바라보고는 땅에 박힌 검은 송곳을 뽑아들 뿐 이었다.
너무나 담담한 이준의 행동에 석진의 눈빛이 더욱 싸늘하게 굳었다.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나, 지금의 담대한 행동으로 보나 상대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던 것이다.
곧이어 석진의 몸 속에서 백색의 염력이 폭발하며 풀숲에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오하늘과 맞붙었을 때와는 비교 할 수 없는 수준의 염력이었다.
그러나 이준은 4성 투황의 염력을 눈 앞에서 보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천천히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음 순간, 석진의 날카로운 손톱이 이준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에 이준은 가볍게 몸을 옆으로 틀었고, 얼음 칼날 같은 서늘한 칼날이 그의 가슴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속도는 봐줄만한 수준이군.”
자신의 공격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빗나가자, 석진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상대가 자신의 공격을 이토록 쉽게 피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더욱 매서운 기세로 이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석진의 공격을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이준은 두 번 정도 더 그의 손톱을 가볍게 피한 뒤 곧바로 주먹을 들어 그의 손톱과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펑!
청록색의 염력과 백색의 염력이 뒤엉키자, 묵직한 소리와 함께 석진의 몸이 저만치 뒤로 밀려났다.
반면 이준은 마치 바위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주먹을 맞부딪히는 순간 느껴진 뜨거운 열기에 당황한 석진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상대의 열기는 투황 강자인 자신의 얼음 속성 염력을 제압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단번에 그의 온 몸을 파고들고 있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수준의 열기였다.
4성 투황을 상대로 단숨에 우위를 점하는 이준의 모습에 가람 아카데미의 교사들과 학생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어휴……. 역시 저 녀석한테는 도저히 안 되겠군.”
두 사람의 싸움을 보던 오하늘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편, 산골짜기 위쪽에서는 아라를 비롯한 세 사람이 아래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치켜보고 있었다.
태연하게 이준을 바라보고 있는 아라와 보람과는 달리, 매트와 모미는 완전히 혼이 나간 상태였다. 아카데미 창립 이래 최고의 천재라느니, 투왕 시절에 이미 투황을 죽였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스무 살 남짓한 사람이 온 흑각성에 명성이 자자한 ‘독수리 발톱’을 상대로 이토록 압도적인 실력을 보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이준이 가볍게 다섯 손가락을 움직이며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치 염력을 지휘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홀린 듯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난 다섯 달 동안 숲 속에서 마수들과 끊임없이 전투를 벌이며 흑각성으로 이동한 덕에 더욱 순도가 높아진 그의 염력은 마치 거대한 강처럼 막힘없이 그의 전신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이준이 천천히 눈을 뜨며 가볍게 발을 구르자, 갑자기 발바닥에서 은빛 섬광이 터져 나오며 그의 몸이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눈 앞에 있던 상대가 연기처럼 사라지는 모습에 석진은 생각할 틈도 없이 뒤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가 막 뒤로 몸을 빼려는 찰나, 검은 그림자 하나가 귀신처럼 그의 등 뒤에 나타나 뜨거운 열기에 휩싸인 주먹을 휘둘렀다.
“이런!”
주먹이 막 자신의 등 허리에 닿으려는 순간, 석진은 번개처럼 몸을 돌려 주먹을 내질렀고, 이내 두 개의 주먹이 허공에서 교차되며 둔탁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그 때, 돌연 이준의 주먹에서 청록색 불꽃이 폭발했다.
퍼엉—!
예기치 못한 공격에 석진의 손목 뼈 부근에서 갑자기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새빨간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고, 그의 앙상한 몸이 바닥에 처참하게 내동댕이쳐졌다.
“으윽……. 네 놈은 대체 누구냐!”
“이씨 가문의 이준이다.”
서늘한 한마디와 함께 또 다시 청록색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씨 가문의 이준?”
이준의 한마디에 석진의 표정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이준이라면 바로 흑각성에서 이씨 가문을 세우며 이름을 떨친 어린 강자가 아니던가.
이미 2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흑각성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마염곡 사람들 중 이준에게 당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기에 석진의 머릿속에는 그 이름이 더욱 똑똑히 새겨져 있었다.
‘분명 흑각성을 떠났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된 일이지’
석진은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불안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려댔다. 이준이 다시 흑각성에 돌아왔다는 소식이 마염곡에 퍼진다면 커다란 소란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이준은 2년 전 흑각성의 최강자 중 하나인 한샘을 꺾은 전력이 있었다. 게다가 2년이 지난 지금은 더욱 강해졌을 것이니, 그 혼자만의 힘으로 이준을 막아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제길……!’
전의를 상실한 석진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하늘 위로 날아올라 이옥과 가람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모여있는 쪽을 향해 돌진했다.
갑작스런 상대의 행동에 가람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멍한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봤다.
그 순간, 검은 송곳에서 열기가 솟구치더니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석진의 머리를 향해 청록색의 염력이 날아들었다.
갑자기 날아온 강렬한 염력에 석진의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 그는 황급히 몸을 비틀어 이준의 염력을 피하며 곧바로 자신의 수하들을 향해 큰 소리로 명을 내렸다.
“다들 움직여, 싸워!”
석진이 소리치자 투왕 강자 두 명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서로 눈치를 보다가 이를 갈며 무기를 뽑아 들고는 이준을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뒤로 물러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두 명의 투왕을 바라보던 이준은 자세를 고쳐잡으며 이옥의 앞을 막아섰다.
이에 이옥은 학생들을 데리고 잽싸게 뒤로 몸을 물렸다.
이옥을 비롯한 학생들이 뒤로 물러나자, 이준의 발바닥에서 다시 한번 휘황찬란한 은빛 섬광이 폭발했다. 곧이어 그의 몸이 파르르 떨리더니 순식간에 잔상만을 남기며 산골짜기 위로 이동했다.
갑작스레 눈 앞에 나타난 이준을 보며 두 사람의 투왕 강자는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챙!
하지만 검은 색 송곳이 장검과 맞부딪히기 무섭게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지며 상대의 장검이 연약한 나뭇가지마냥 부러졌다.
“쿨럭!”
이준의 강렬한 일격에 그와 검을 맞댄 투왕 강자는 곧바로 피를 토하며 날아가 절벽에 쳐박히고 말았다.
일격에 투왕 강자 하나의 목숨을 빼앗아버린 이준의 실력을 목격한 나머지 투왕 강자 한명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돌려 달아났다.
그러나 그가 뒤로 돌아서는 것과 거의 동시에 주위의 공기가 급격히 뜨거워지더니, 이내 청록색 화염 덩어리가 그의 몸을 감쌌다.
“으악!”
결국 그 투왕 강자는 처량한 비명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투왕 강자 하나가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지자, 평소 사람 목숨을 파리처럼 생각하던 마염곡의 정예 병사들마저 겁에 질려 사방으로 뿔뿔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준은 허둥지둥 도망가는 검은 옷 입은 자들을 보며 곧바로 무형의 불꽃을 소환했다.
펑! 펑!
형태 없는 무형의 불꽃이 사방으로 날아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산골짜기 곳곳에서 열기가 피어오르며 수 십 명의 사람이 하나 둘 재가 되어 쓰러졌다.
이옥을 비롯한 가람아카데미의 학생들은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완전히 넋을 잃고 말았다.
하지만 수 십명의 적을 일순간에 재로 만들어버린 당사자는 가볍게 손을 털고는 오하늘 쪽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 자식은 도망갔군. 부하들에게 이준을 맡겨 놓고 자신은 도망을 치다니……. 마염곡 장로라는 이름이 울겠어.”
잠시 후, 이준이 다가와 씨익 웃음을 지으며 오하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괜찮아?”
“괜찮아, 네가 준 연금비약 덕에 며칠만 쉬면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보다 저 자를 도망가게 둬도 되겠어?”
오하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석진이 도망간 방향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지자, 이준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글쎄, 내가 늑대라면 저 쪽에는 호랑이가 있거든. 신경 쓰지마.”
“뭐?”
“야, 괜찮아?”
그 때, 보람이 매트와 모미 두 사람을 데리고 하늘에서 내려와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
오하늘은 보람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과거 가람아카데미의 양대산맥이었던 류지안과 임수혁마저 덜덜 떨게 만들었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두 눈에 선했다.
“보람 선배도 데리고 온거야? 대장로님이 선배 소식을 궁금해 하던데…….”
“흥, 그 영감탱이가 왜 나를 찾아?”
대장로의 이야기가 나오자, 보람은 곧장 못 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보다, 벌써 투황이 된거야?”
괜히 보람의 성미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는지, 오하늘은 곧바로 이준을 바라보며 화제를 돌렸다.
오하늘의 물음에 주위의 시선이 또 한 번 이준에게 집중됐다.
바로 그 때, 산골짜기 밖에서부터 한줄기 섬광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왔다.
빛줄기의 정체는 바로 조금 전 도망갔던 석진이었다. 그의 얼굴은 마치 썩어가는 시체마냥 검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
잠시 후, 새하얀 옷을 입은 여자 하나가 허공에서 내려와 피식 웃으며 이준에게 다가왔다.
“미안. 산 채로 잡아오려 했는데 이놈이 생각보다 너무 약하네.”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강자의 모습에 오하늘은 온 몸의 털이 거꾸로 서는 것을 느꼈다.
이준도 이준이지만, 흑각성 전체에서 명성이 자자한 근접전의 대가를 닭모가지 비틀 듯 죽여 버리는 강자라니,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이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오하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염곡은 대체 어떤 세력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