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0화. 마염곡(魔炎谷)
검은 그림자들이 사내의 목전까지 당도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절망에 찬 눈으로 뒤에서 쫓아오는 추격병을 바라보던 사내는 눈앞에 있는 세 사람을 발견하고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도움을 청했다.
“여러분,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가 소리치기 무섭게 그의 뒤를 쫓던 검은 그림자들이 원형으로 그들을 둘러쌌다.
“흥, 괜한 일에 끼어들지 말고 가던 길이나 가거라.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말이지.”
이에 이준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연보라색 옷을 입은 소녀에게서 시선을 돌리고는 곧바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사내의 말이 이준의 귀를 잡아끌었다.
“친구! 우리는 가람 아카데미 사람입니다! 한번만 도와주신다면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가람아카데미? 당신들이 가람아카데미 사람이라고?”
이준과 보람의 시선이 일제히 사내에게로 향했다.
이준의 질문에 사내는 황급히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가한제국의 선생인 매트입니다. 이 쪽은 제 학생인 모미라고 합니다.”
사내의 대답에 이준의 얼굴에는 대번에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군요. 이쪽으로 오시죠.”
이준의 미소에 두 사람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잽싸게 이준 일행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너 이 새끼 죽고 싶어?”
그러자 검은 옷을 입은 무리 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검을 빼들었다.
“전부 죽여 버려!”
뒤이어 십여 명의 사내들이 분분히 날카로운 검을 뽑아들며 가람 아카데미의 두 사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나지막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며 두 사람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두 사람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이준이 두 사람을 안은 채 적들과 멀리 떨어진 곳까지 이동한 상태였다.
생전 처음 보는 무시무시한 속도에 매트는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볼 뿐, 고맙다는 인사조차 하지 못 했다.
“보람아.”
두 사람을 구해낸 이준이 가볍게 웃으며 보람을 바라보자, 밤톨만한 보라색 머리의 소녀가 신이 나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
“조심하세요! 저들은 모두 대투사입니다! 제일 앞에 있는 사람은 7성 투령…….”
조그마한 소녀가 신이 나서 적들을 향해 달려드는 모습에 화들짝 놀란 매트가 당부의 말을 하려던 찰나,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갑자기 공중으로 두 세 개의 그림자가 날아올랐다.
바닥에 떨어진 괴한들은 이미 의식을 잃었는지 신음 소리조차 내지 못 하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소녀가 보여준 무시무시한 실력에 놀란 매트가 눈을 깜빡이고 있는 사이, 연달아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또 다시 몇 개의 그림자가 붕하고 떠올랐다가 힘없이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저 녀석도 처리해줘야지.”
이준이 나뭇가지 위에 있던 사내를 힐끗 가리키며 피식 웃음을 짓자, 우두머리로 보이던 사내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너, 너희는 뭐 하는 놈들이냐? 우린 ‘마염곡’ 사람들이야! 지금 누굴 건드리는지 알고는 있는 거야?”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세력의 이름을 들먹여도 지루함에 지친 보람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몰라!”
보람은 짤막한 한마디와 함께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먹이를 발견한 호랑이마냥 달려드는 보람의 기세에 사내는 황급히 황금색의 염력 갑옷을 만들어 냈지만, 갑옷이 채 형성되기도 전에 밤톨만한 주먹이 그의 가슴팍을 호되게 후려쳤다.
“컥……!”
아래로 추락하는 사내의 시체를 보며 보람은 손을 탁탁 털며 이준에게로 돌아왔다.
“흥, 한 주먹거리도 안되는 게!”
보람의 기분이 조금 풀린 듯하자, 이준은 피식 웃으며 다시 매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준의 시선을 느낀 매트는 황급히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존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하하, 한 식구나 다름없으니 그렇게 예의 차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이준이라고 불러주세요. 매트 선생님.”
“한 식구요…?”
이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린 매트의 얼굴에 곧바로 화색이 돌았다.
“설마, 가람아카데미 출신이십니까?”
이준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매트의 곁에 있던 모미라는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참동안이나 이준을 바라봤다.
“설마……. 그 이준 선배님이신가요?”
“이준, 이준? 설마 자네가 본원의 그 이준인가?”
모미의 질문에 매트 역시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는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자신을 알고 있는 듯한 두 사람의 반응에 이준은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원에 있는 자신의 동상이 순간 그의 머리를 스쳤다.
“본원에 동명이인이 있는 게 아니라면, 아마도 제가 그 이준이 맞을 겁니다.”
이어지는 이준의 답변에 두 사람은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 했다. 이준이란 이름은 이미 가람아카데미의 전설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흑각성의 이씨 가문은 지금도 학생들이 흑각성에서 수련을 할 때 가장 듬직한 보호막이 되어 주는 존재였으니, 그 이름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직 절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하네요.”
이준이 어색한 표정으로 민망한 듯 웃음을 짓자, 갑자기 매트가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간곡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준, 오 장로! 오 장로를 좀 살려주게!”
“오 장로요? 무슨 일이죠?”
“얘기하자면 길어. 우리 본원은 최근 6개월 동안 많은 학생들을 밖으로 보내 수련을 시켰네. 그리고 수련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본원의 장로들과 함께 하지.”
매트는 숨 쉴 틈도 없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번에는 본원의 오 장로가 사람들을 데리고 나섰네. 모든 일이 다 순조로웠어. 그런데 우리가 학생들을 데리고 어느 산 속에 마수를 잡으러 갔을 때, 갑자기 ‘마염곡’ 놈들이 우리를 덮쳤네. 오 장로가 있는 힘을 다해 저항한 덕에 많은 학생들이 목숨을 건졌지만, 지금 작은 산속에 갇힌 상태야. 나랑 모미도 놈들에게 쫓기고 있었네!”
이어지는 매트의 말에 이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마염곡이 어떤 세력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안면도 없는 장로를 위해 다른 세력과 불화를 일으킬지도 모르는 일을 벌이자니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 그는 정화의 불꽃의 소재가 그려진 지도를 구하기 위해 경매장에 가야했고, 아라의 재난독체를 해결하기 위한 약재도 구해야 했다. 한가롭게 어느 정도 실력을 가졌는지도 모를 세력과 싸움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으음……. 오 장로요? 그런 이름을 가진 장로는 처음 들어보는 것 같은데……”
이준이 곤란하다는 듯이 말끝을 흐리자, 매트가 다시 한 번 이준의 어깨를 꼭 움켜쥐며 말했다.
“오 장로는 작년에 막 장로로 선발 된 사람이네. 원래는 본원의 학생이었지. 이름은 오하늘이야.”
“오하늘이요?”
하지만 상대방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이준의 얼굴에 대번에 살기가 돌았다.
* * *
나무 그늘이 울창한 숲속에는 이따금씩 천둥 소리와도 같은 짐승 울음소리가 울려퍼졌고, 그 때 마다 나뭇 가지위에 앉아 한가로이 쉬고 있던 새들이 화들짝 놀라 날개를 퍼덕이며 황급히 날아올랐다.
풀 숲에 가려진 산봉우리 아래로는 거대한 틈이 나 있어 멀리서 보면 산골짜기처럼 보였다.
그 산골짜기의 양 옆으로는 산양이라 해도 타고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미끄러운 석벽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곳을 지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그마한 크기의 출구 하나뿐 이었다.
산골짜기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창백한 얼굴로 꼿꼿이 서 있었다. 그들은 무기를 잡은 손에 힘을 준 채 냉랭한 눈빛으로 산골짜기 입구의 산봉우리 쪽을 훑어보고 있었다.
“오장로님, 이제 어떡할까요? 마염곡 사람들이 입구를 완전히 틀어 막았습니다. 산벽은 너무 미끄러워서 도저히 타고 올라갈 수 없고요.”
서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중년의 사내 하나가 붉은 장검을 잡고 있는 남자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에 새빨간 장검을 쥔 남자는 천천히 뒤를 돌며 싸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살기로 눈을 빛내고 있는 그 사내는 바로 비석의 창시자 중 한 명이자 이준의 친구인 오하늘이었다.
지금 오하늘은 2년 전보다 훨씬 성숙해져 있었고, 특유의 살기 역시 훨씬 누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예전보다 약해진 살기와는 달리 그의 실력은 놀랍도록 발전해 있었으니, 지금의 그는 한줌의 살기조차 밖으로 허투루 흘려 보내지 않고 모아 두었다가 그것을 일순간에 폭발시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일단 기다리시죠. 매트 쪽에서 잘 도망쳐주길 바라는 수밖에요. 그 쪽에서 무사히 가람 아카데미에 도착하면 곧 주변에 있는 아카데미 출신 강자들이 도우러 와줄 겁니다.”
“빌어먹을 마염곡 놈들. 여길 나가기만 하면 이찬 오라버니에게 연락을 취해 저놈들을 모두 쓸어버리겠어!”
오하늘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새빨간 치마를 입은 여인 하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이준의 사촌 누이인 ‘이옥’이었다.
지난 몇 년 사이, 오하늘 뿐 아니라 이옥 역시 가람 아카데미를 졸업했으며, 이제 그녀는 가람 아카데미의 학생이 아닌 교사가 되어 있었다.
“걱정되는 건 저쪽에서 그럴 기회를 안 주는 거예요.”
그 때, 오하늘이 돌연 표정을 굳히며 산골짜기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들 조심하세요. 학생들을 잘 보호해주십시오. 마염곡 놈들의 움직임이 느껴집니다.”
이를 들은 이옥을 포함한 교사들은 황급히 흩어지며 학생들을 가운데로 모았다.
“하하, 가람 아카데미의 유명인사 혈검 오하늘이라니, 오래 살고 볼 일이군.”
곧이어 산골짜기 입구 쪽에서 회색 망토를 걸친 사내 하나가 염력 날개를 펄럭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흥, 비겁한 놈들, 자신 있으면 내려와라! 나와 일대일로 붙어보자!”
오하늘이 회색 망토를 걸친 사내를 차갑게 노려보며 말했다.
“하하, 이런 이런, 무섭군 그래. 혈검 장로의 이름은 흑각성에서 워낙 명성이 자자하니까.”
그는 다시금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며 등 뒤의 염력 날개를 펄럭였다.
산골짜기 위쪽의 두 투왕 강자를 바라보던 오하늘의 표정이 더욱 어둡게 내려 앉았다. 지금 그의 실력은 4성 투왕 정도로, 일 대 일로 싸우면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두 사람을 상대로 승리할 자신은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마염곡의 투사들이 그들을 포위하고도 쉽사리 손을 쓰지 못하는 것은 오하늘의 전투 방식 때문이었다.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승산이 있었지만, 오하늘을 상대로 상처 없이 승리를 거두기는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그들은 먼저 오하늘을 설득하는 것을 선택했다.
“오장로, 지금 자네가 알아서 항복한다면 그쪽 학생들을 건들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어때?”
회색 망토를 입은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이 와 놓고는 제대로 싸울 용기도 없이 입만 나불대긴.”
하지만 오하늘의 대답은 짧고도 분명했다.
“킥킥. 오장로, 그런 식으로 우릴 자극하려 들 것 없네. 자네들은 방금 여기에서 도망간 놈들에게 희망을 품고 있겠지. 그렇지만 그리 쉽진 않을 거야. 부상당한 대투사 한 명에 쓸모없는 여자아이 하나 정도면 우리 추격대가 진작에 끝장을 냈을테니까 말이지.”
“그럼 더 말할 필요도 없군.”
말을 마치기 무섭게 오하늘의 몸에서 새빨간 염력이 폭발했다.
“네 놈들을 이 칼로 썰어 모조리 지옥으로 보내주마.”
“하하하! 자신감이 대단하군!”
오하늘의 섬뜩한 목소리에 두 투왕은 고개를 젖히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