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9화. 흑각성으로
“천심제국의 무덤골이라……”
이준은 천천히 그 이름을 되뇌며 아라와 메두사를 바라봤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지역이었다. 이에 아라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심제국이란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어……. 그런데 무덤골 이라는 이름은 아예 금시초문인걸?”
이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파르르 떨고 있는 천영호를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말해준 것들이 모두 사실이길 바라지. 만일 그 말이 거짓말이라면 아주 천천히 구워주겠어.”
“뭐라고? 날 풀어주지 않겠다는 거냐?”
피식 웃음을 지으며 답하는 이준의 모습에 천영호는 분통을 터뜨리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설마 이대로 풀어줄 거라고 생각한 거야?”
다음 순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형의 불꽃과 함께 천영호의 몸이 빠른 속도로 약병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래야만 천영호가 힘을 되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천영호를 다시 봉인한 이준의 얼굴은 전에 없이 어둡게 내려 앉아 있었다. 상대에게서 얻은 정보는 충분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계획이지?”
메두사가 물었다.
“후우……. 먼저 흑각성으로 가야겠어. 천지의 불꽃을 찾으면서 영혼의 궁전에 대해 조금 더 조사를 해보려고.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불의 연맹을 총 동원한다 해도 1급 영호 하나 잡을까 말까 할 테니까. 먼저 내 실력부터 끌어 올려야 해.”
* * *
다음 날 새벽, 천동성 밖의 한 산봉우리 위로 여러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준은 발아래에 펼쳐진 거대한 성을 보며 한숨을 내쉰 뒤 고개를 돌려 아라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정말 나랑 같이 갈 생각이야?”
“걱정 하지마, 독종 내부의 일은 이미 다 해결하고 왔으니까.”
아라의 답변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이준은 곧바로 메두사를 보며 진지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불의 연맹을 잘 부탁해.”
“걱정 마라. 내가 살아있는 한 누구도 불의 연맹을 건드리지 못 할테니까.”
“정말 고마워. 혹시라도 2년 안에 못 돌아오게 된다면 꼭 사람을 보내 약속한 연금비약을 보내줄게.”
이준은 메두사를 향해 다시 한 번 깊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돌아보면 약로만큼이나 그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이 바로 그녀였다.
“건방지긴. 네가 직접 가져와라. 꼭.”
이어지는 메두사의 말에 이준은 잠시 멈칫 거리다가 이내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말투는 차갑기 짝이 없었지만, 무사히 돌아오라는 그녀 나름의 격려이리라.
“꼭 그렇게 할게.”
“그래.”
메두사와 마지막 인사를 마친 이준은 곧바로 청록색 날개를 펼쳤다.
“채린 언니, 몸 조심해. 나중에 다시 만나!”
이준이 날개를 펼치자, 보람 역시 하늘로 날아오르며 메두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마지막으로 아라가 허공으로 날아오르려는 순간, 메두사가 잠시 머뭇거리다 조그마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잘 지켜줘.”
싸늘한 표정과는 달리 이준을 걱정하는 듯한 메두사의 목소리에 아라는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을 짓고 말았다.
“내 친구야. 목숨을 걸고 지킬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럼 고맙고.”
“갑자기 재난독체를 잘 제어할 수 있게 된다면 너와도 잘 지내고 싶은 마음이 드네.”
아라는 그 말을 끝으로 곧바로 한줄기 빛이 되어 자리에서 사라졌다.
외로이 산봉우리 위에 남은 메두사는 이준을 비롯한 세 사람이 사라진 장소를 멍하니 응시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언젠가 이준이 다시 돌아오면 자신보다 강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 * *
머나먼 하늘, 세 갈래의 빛이 별똥별 같이 구름 제국의 시커먼 밤하늘에 긴 꼬리를 남겼다. 세 사람의 놀라운 속도에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구름제국 강자들은 저마다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번에 흑각성으로 돌아갈 사람은 세 명뿐이었기에 굳이 비행 마수를 탑승하지 않았다. 이준과 보람, 아라의 실력이라면 직접 날아 움직이는 게 훨씬 빠르기도 했으니 함께 가야할 사람들이 있지 않다면 굳이 비행마수를 탈 필요가 없었다.
세 사람은 구름제국 국경지대 바깥쪽에 잠깐 멈춰 선 뒤 지도를 펼쳐 방향을 확인하고는 다시 머나먼 흑각성을 향했다.
구름제국과 흑각성까지 아주 먼 길이었지만, 이준과 보람은 투황 강자였고, 연금비약을 복용하면서 날아가면 염력이 부족할 일도 없었다. 아라는 이미 투종이었기 때문에 염력 날개를 사용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녀는 자연에 존재하는 천지 에너지를 이용해 두 사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더 적은 에너지를 이용해 얼마든지 날 수 있었다.
흑각성으로 가는 길에 보람이 무언가를 느끼면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염력을 회복할 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약재를 찾기도 했다.
아쉽게도 아라에게 필요한 약재들을 찾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보람이 갖고 있는 능력으로 적잖은 약재들을 구할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산맥에 살고 있는 강한 마수들과 부딪히기도 했지만, 투황 둘에 투종까지 있는 판에 마수 따위가 위협이 될 수는 없었다.
이준의 계산대로라면 구름제국을 떠난 후로 벌써 서너 달은 지난 것 같았다. 이 산 저 산을 드나들며 이동한 탓에 생각보다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물론 산 속에서 시간을 보낸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그 동안 마수들과 죽자 살자 싸우며 이준의 염력은 더욱 강해졌고, 염력 통제 능력 역시 이전과는 몰라볼 정도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준의 실력은 어느새 3성 투황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그렇게 보물찾기와 비행을 반복한지 어언 다섯 달……. 마침내 새까만 평원 지대가 세 사람의 눈앞에 펼쳐졌다.
거대한 검은색 평원을 바라보며 이준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번쩍 들며 소리를 질렀다.
“흑각성, 가람 아카데미! 내가 돌아왔다!”
생전 처음 서북 지역을 벗어나 그 유명한 흑각성까지 와보았기 때문인지, 아라의 표정 역시 완전히 여행을 온 여자 아이의 그것이 되어 있었다.
“여기가 흑각성이란 말이지?”
목적지가 점점 가까워지자 이준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는 아라와 보람을 불러 두세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 사람의 속도로는 흑각성 평원을 지나는 데 불과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예전에는 이삼일이 걸렸던 평원을 두 시간 만에 지나자, 자신의 실력이 얼마나 크게 늘었는지 실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흑각성 평원을 지난 뒤, 이준은 기억 속의 길을 더듬어가면서 아라와 보람을 데리고 전진했다.
가람아카데미로 가는 도중 세 사람은 흑각성 구역 내의 도시에 들어가 경매장을 들러봤다
도시 이곳저곳에서는 이씨 가문에 대한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흑각성이 워낙 넓은 탓에, 최근 몇 년 사이에 갑자기 부흥하기 시작한 신흥세력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사람들은 드물었지만, 그래도 별다른 문제없이 잘 운영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 후 그는 아라와 보람을 데리고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재난독체를 억제하기 위해 필요한 약재의 정보를 수소문했다. 그리고 또 하나, 그가 경매장을 돌아다니는 것은 혹여나 ‘정화의 불꽃’이 그려진 지도 조각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예전에도 흑각성의 경매장에서 지도 조각을 구했으니, 운만 따라준다면 마지막 지도 조각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곳에서 지도를 구할 방도가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이 도시 저 도시의 경매장을 기웃거리는 사이 또 다시 열흘이 넘는 시간이 지나갔고, 그들은 어느새 흑각성 구역의 중심부에 도달해 있었다.
때 마침 흑각성의 주요 세력들이 연합해 경매를 연다는 소식이 이준의 관심을 끌었다. 이준이 ‘번개의 춤’과 ‘지도 조각’을 얻었던 바로 그 경매였다.
이준이 얻은 정보에 따르면 이번 경매는 흑각성 중심부에서 조금 서쪽에 치우친 ‘흑황’에서 열린다고 했으며, 그 곳의 통치자는 ‘황현종’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황현종은 흑각성 내에서 엄청난 명성을 자랑하는 강자였지만, 흑각성 내에서 보기 드물게 조용한 성품을 가진 것으로 유명했다. 실제로 그는 괜한 싸움을 벌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으로, 덕분에 그 명성에 걸맞지 않게 ‘검은 명단’에는 이름조차 올리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황현종이 소유한 토지에 누군가가 침입하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김씨 형제조차 이 조용한 종주를 은근히 피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황현종이 대형 경매를 주최한다는 소식에 이준은 곧바로 흑황으로 향해야겠다고 결심을 굳혔다. 그 곳이라면 지도 조각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고, 지도에 관한 정보를 얻지 못한다 해도 도처에서 강자들이 모여드는 곳이니 아라를 위한 약재를 구할 수 있을 가능성도 높았기 때문이다.
흑황에 가기로 마음을 먹은 준은 거금을 들여 흑각성의 지도를 구매한 뒤, 아라와 보람을 데리고 곧바로 흑각성 구역 내의 더욱 깊은 곳으로 향했다.
* * *
흑각성은 가한제국과 구름 제국 전체를 더한 것보다도 더 광활한 면적을 자랑했으니, 숨어있는 투황 강자나 투종 강자도 그만큼 많았다.
물론 투황 둘에 투종 하나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을테지만, 괜한 분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준은 걸어서 흑황으로 가는 것을 택했다.
“이준, 그 빌어먹을 성은 아직 멀었어?”
하지만 보람은 일일이 걸어서 이동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연신 볼멘 소리를 해댔다.
“거의 다 왔어.”
“그 말만 열 번째야!”
반복되는 이준의 무성의한 대답에 결국 보람의 성질머리가 폭발하고 말았다. 그녀는 이준에게로 달려가 그의 몸에 매달리더니 그의 어깨 죽지를 깨물어댔다.
하지만 이준은 그런 보람을 보며 화내기는커녕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 이었다.
“꼬맹아, 이렇게 걷는 것도 수련의 일부야. 맨날 날아다닐 생각만 하지 말고 가끔은 걷기도 해야지.”
“누가 이렇게 지루한 수련을 하려 드냐고. 내가 찾은 약재로 네가 약을 만들어주면 그게 제일 좋은 수련이라고!”
그러나 보람은 아직도 분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씩씩대며 콧김을 내뱉었다.
이에 또 다시 웃으며 보람을 달래려던 이준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멀리 떨어진 숲을 응시했다.
“왜 그래?”
이준이 갑자기 멈춰 서자, 보람의 눈이 반짝 반짝 빛을 발했다. 아마도 재미있는 일이 생기기를 기대하는 모양이었다.
“앞에 누군가가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어. 누군가에게 쫓기는 중인가 봐.”
반면 아라는 시끄러운 일은 질색이라는 듯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신경 쓰지 말자. 우린 우리 갈 길만 가자고.”
사실 흑각성 안에서 목숨 걸고 쫓고 쫓기는 일은 항상 있는 일이었기에 이준 역시 누군가를 구해주는 것 따위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 때, 오솔길 끝에서 두 사람이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그들과 멀지 않은 곳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두 사람 중 한 명은 남자, 한 명은 여자로, 남자는 서른 정도로 보였고, 여자는 아직 어린 소녀였다.
사내의 몸에는 혈흔이 가득했지만, 연보라색 치마를 입은 소녀는 큰 부상을 입은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사내가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휘청대자, 소녀는 재빨리 그를 부축하며 눈물을 떨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