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8화. 영혼의 궁전
지금까지 이준이 봐왔던 불꽃 중 가장 등급이 높은 것은 그의 스승이 가진 ‘얼음불꽃의 정수’였다. 스승의 불꽃은 이준이 가진 두 불꽃보다 훨씬 더 강력해 두 불꽃이 합쳐진 청연의 불꽃과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대단한 ‘얼음 불꽃의 정수’조차 11위에 불과했으니, 그보다 윗 순위인 ‘정화의 불꽃’ 이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스승의 말에 따르면, 정화의 불꽃은 약로 본인도 본 적이 없는 천지의 불꽃으로, 누군가가 그 불꽃을 손에 넣었다는 이야기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며 그 불꽃이 정말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럽다고 언급했었다.
그는 그 말에 이어 천지의 불꽃 중 가장 강력하다고 전해지는 다섯 개의 불꽃은 그 이름만 전해질 뿐, 그것을 제련하기는커녕 찾아낸 자 조차 없다고 말했었다.
게다가 그 대단한 약로조차 11위인 얼음 불꽃의 정수를 손에 넣으며 목숨을 잃을 뻔 했으니, 그 이상의 힘을 가진 불꽃이라면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이준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가 탁자 옆에 있던 누리끼리한 지도 조각을 조심스레 맞춰가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가 가진 지도 조각만으로는 아무리 애써도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이 지도는 본래 네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는 듯 했다.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 세 개이니, 나머지 하나만 찾는다면 정화의 불꽃의 행방을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는 절대로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넓은 투기 대륙에서 지도 조각을 찾는 것은 그야말로 사막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이 없었다.
게다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며 찾아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이준의 손에 정화의 불꽃을 찾을 수 있는 단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뒤로 벌어질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을 지경이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세 개의 지도 조각을 얻은 것도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아……. 대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지? 채린이나 아라는 믿을 수는 있지만 정보가 적을 테고…….”
한참동안이나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던 이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때, 그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 하나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서천우 장로님을 왜 잊고 있었지! 무려 가람 아카데미의 대장로잖아! 게다가 원장님도 스승님과 비슷한 수준의 투존 강자라고 했으니, 기회만 된다면 만나 뵐 수 있을지도 몰라. 어쩌면 악마의 반점에 대해서도 도움을 주실 지도 모르고…….”
게다가 천지의 불꽃을 찾기 위해서도 대륙 끄트머리에 위치한 가한제국보다는 대륙의 중심에 가까운 흑각성이나 가람 아카데미 주위로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이번 기회에 흑각성에도 한번 들러봐야겠는걸.”
생각을 마친 이준은 조심스레 탁자 위의 지도를 다시 자신의 저장 반지 안으로 집어넣은 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흑각성에 가겠다고?”
이준의 계획을 들은 메두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응. 본원의 원장님도 투존 강자라고 들었거든. 혹시라도 마주친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 노인네는 내가 본원에 있는 내내 한 번도 안 나타났어. 네가 간다고 해서 만나줄 것 같지는 않은데.”
그 때, 곁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보람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야 낫잖아. 그리고 만나지 못한다 해도 대장로님에게 천지의 불꽃에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천지의 불꽃을 하나 더 얻을 수 있다면 투존의 도움 없이 내 힘으로 반점을 없앨 수 있을지도 몰라. 여러모로 가람아카데미에 가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야.”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메두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확실히 그건 그렇지. 천지의 불꽃을 찾든, 투존을 찾든, 흑각성이 가한제국보다 나을거야. 나도 같이 가야 하나?”
“네가 같이 가면 확실히 든든하긴 하겠지만, 너와 내가 둘 다 자리를 비우면 불의 연맹도 뱀 인간도 지킬 수 없게 돼. 그러니 번거롭겠지만 네가 남아서 불의 연맹과 이씨 가문을 지켜줘. 게다가 불의 연맹과 뱀인간들의 관계가 안정되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으니까.”
자신과 메두사가 모두 자리를 비운다면 언제 다시 영혼의 궁전의 마수가 뻗칠지 알 수 없었다. 천지의 불꽃도, 투존도 좋지만, 불의 연맹이 무너져서야 말이 안됐다.
이준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메두사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이준의 말도 틀린 얘기가 아니었다. 현재 불의 연맹에는 반드시 투종 강자가 필요했다.
“그럼 내가 같이 가줄까? 네 덕에 구름 제국은 완전히 독종이 평정했으니,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큰 일이 나지는 않을 거야.”
그 때, 아라가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이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지 못 하고 잠시 망설이며 말을 잇지 못 했다. 그의 입장에서야 투종 강자가 함께 해준다면 더 없이 좋았지만, 어찌되었거나 그녀는 독종의 종주가 아니던가. 한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세력의 수장을 개인적인 이유로 끌고 다닐 수는 없었다.
“내 재난독체가 언제 폭발할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네가 너무 오래 떠나 있으면 약재를 다 찾아도 만들어줄 사람이 없으니까, 차라리 내가 널 따라 가는 편이 서로에게 좋을 것 같은데.”
이준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아라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좋아. 고마워.”
이에 이준도 더는 망설이지 않고 아라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보람이도 내가 데려갈게. 가람 아카데미에 데려가서 내가 보람이를 괴롭히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장로님들께 보여줘야지.”
세 사람이 함께 한다는 말에 메두사의 얼굴에서도 걱정스러운 기색이 사라졌다. 보람과 아라라면 자신이 동행하는 것 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언제 출발할 생각이야?”
“내일 바로 움직이려고. 지금은……”
이준이 웃으며 손가락을 튕기자, 무형의 불꽃을 봉인한 옥병 하나가 그의 손에 나타났다.
“이 녀석한테 정보를 좀 캐내야지.”
이준이 옥병을 꺼내자, 메두사와 아라가 얼굴을 굳힌 채 방문을 막아섰다. 중상을 입었다고는 해도 투종은 투종이니 한 치도 방심할 수 없었다.
곧이어 무형의 불꽃이 사라지더니, 이내 흐릿한 영혼체 하나가 천장을 향해 날아올랐다.
하지만 이준이 손가락을 튕기자, 또 다시 무형의 불꽃이 천장을 뒤덮으며 처절한 신음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이준은 고통에 겨운 표정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는 영혼체를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가 가볍게 손가락을 움직이자, 무형의 불꽃이 마치 사슬처럼 영혼체의 몸을 옥죄였다.
“하하, 그렇게 도망가실 게 뭐가 있나요?”
“대체 뭘 어쩔 셈이지? 영혼의 궁전의 영혼에는 모두 영혼의 표식이 새겨져 있다! 내가 죽으면 영혼의 궁전에서 곧바로 네 놈을 찾아올 거야!”
상대의 협박에 이준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영혼의 궁전에 대해 묻고 싶은 게 좀 있을 뿐입니다. 사실대로만 얘기 해준다면 목숨을 살려드리죠.”
“영혼의 궁전에 대해서…?”
천영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넋이 나간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봤다.
“참 겁도 없는 새끼군. 투종 강자 둘이 곁에 있으니 눈에 뵈는 게 없구나. 좋은 말로 할 때 지금 당장 날 풀어 놓는 게 좋을 거야. 그게 아니면… 아악!”
천영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무형의 불꽃이 그를 옭아매며 또 다시 그의 입에서 처절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좋게 나가니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맘대로 해. 대답하지 않는다면 그냥 죽여주지. 하지만 절대로 곱게 죽이지는 않을 거야.”
“너 이 자식……. 감히…….”
그는 살기에 찬 눈빛으로 이준을 노려봤지만 무형의 불꽃의 무시무시한 온도 앞에 차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 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마침내 천영호의 입이 열렸다.
“무슨 정보가 필요하지?”
“영혼의 궁전의 실력은 어느 정도나 되지?”
영혼의 궁전은 투기 대륙 전체에서도 가장 베일에 싸여 있는 조직 중 하나로, 그 실력은 약로조차 정확히 알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에게 대적해 아버지와 약로를 구출하려면 그들의 실력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이에 천영호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저었다.
“끌끌……. 안다고 해서 네 놈이 뭘 어찌할 수 있겠느냐. 그래, 설명해주마. 영혼의 궁전에서는 엄격한 등급제가 실시된다. ‘영호’라는 직위만 해도 1부터 3까지의 세 등급으로 나뉘지. 나는 겨우 3급의 영호일 뿐이고. 그리고 영호 위로는 ‘영존’ 등급이 있지.”
천영호의 이야기에 이준의 표정이 빠른 속도로 굳어갔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영혼의 궁전에서는 투종 계급의 강자가 가장 실력이 낮은 존재라는 의미였다.
“도영호라는 자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도웅? 그 자를 만났다고?”
“정확히 말하면 겨뤄봤지.”
이준이 담담하게 한마디를 내뱉자, 천영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앞에 서있는 청년을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자도 영혼의 궁전 영호 중 하나다. 하지만 나보다 높은 2급 영호지……”
‘2급 영호란 말이지……’
이준은 속으로 그의 말을 되뇌며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영혼의 궁전 궁주의 실력은 어느 정도나 되지?”
상대의 질문에 천영호의 얼굴이 순간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큭큭……. 궁주님의 실력은 아무도 모른다. 영혼의 궁전 전체를 통틀어 몇 명의 영존님들과 소수의 강자들만이 그 분의 힘을 알고 있지. 하지만 투종 강자들을 조직의 하수인으로 부릴 정도라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은 가겠지? 그 분은 감히 너희 같은……”
“묻는 말에만 대답해. 아니면 다시 한 번 지져줄까?”
계속되는 상대의 협박에 이준은 지겹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곧바로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됐고, 영혼의 궁전에서는 왜 영혼을 모으는 거지?”
“그건 나도 모른다. 우리의 임무는 영혼을 잡는 게 다니까. 영혼들을 잡아서 궁전으로 돌아가는 게 전부야. 궁전 내에서 그 영혼을 어떻게 처리 하는지는 몰라. 정말이다. 네가 믿지 않는다 해도 방법은 없겠지만.”
“그럼 네 놈들의 본부는 어디에 있지?”
“그건 모른다.”
“그럼 영혼을 잡아서 어디로 돌아가는 거지?”
“우리는 정해진 기간 동안 정해진 영혼을 잡아 그것을 바친다. 하지만 본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야. 영혼의 궁전은 대륙 곳곳에 지부를 두고 있으니까. 우리가 찾아가는 곳은 본부가 아니라 지부다.”
“위치를 알고 있는 지부가 몇 개지?”
알아봤자 투종도 되지 못하는 실력으로 뭘 어찌하겠나 싶었는지, 천영호는 이준의 질문에 대해 순순히 답변을 이어나갔다.
“한 곳이야. 3급 영호는 하나의 지부만을 알 수 있다. 2급은 2곳, 1급은 3곳을 갈 수 있고.”
“그래? 그럼 그 지부는 어디에 있지?”
순간 방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천영호는 이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답을 할 수 없다는 듯 이를 갈며 이준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말할 수 없다. 네 놈이 날 어떻게 죽이든, 영혼의 궁전의 처벌보다 고통스럽지는 않겠지.”
상대의 답변에 이준의 두 눈에는 곧바로 살기가 어렸다. 그가 손가락을 가볍게 까딱이자, 이내 참혹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좋아. 맘대로 해. 이렇게 고통스럽게 타 죽든지, 나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들키지 않게 조심하든지.”
“으아아아악! 너, 이 개 같은, 아악……! 알겠어, 알겠다고!”
결국 고통을 참지 못한 천영호가 항복을 선언하자,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불꽃이 서서히 흩어졌다.
“내가 알고 있는 지부는 구름제국과 아주 멀리에 있다. 대륙 중심과 서북지역의 접경에 있는 천심제국에 있어. 이름은 ‘무덤골’이다.”
천영호가 몸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천심제국의 무덤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