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7화. 투존
이준이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그의 사지로 흘러가던 검은 독기가 더욱 옅어지며 그 안에서 액체 형태의 끈적한 염력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기껏해야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크기의 독에서 흘러나오는 염력은 실로 놀라울 정도였다. 이준은 저도 모르게 나지막하게 탄성을 내지르며 다시 한 번 정신을 집중했다.
그렇게 얼마나 오랫동안 불을 피웠을까……. 갑자기 그의 몸 위에서 티 없이 맑은 염력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독기가 완벽하게 제거된 순수한 에너지 체는 마치 순한 어린양처럼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준은 혹여나 독기가 남아있을까 한참동안이나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 그 염력을 자신의 몸 안으로 끌어들였다.
다행히도 에너지는 아무런 저항 없이 그에게 흡수 됐고, 이에 이준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잽싸게 그것을 ‘불개’의 수련 경로를 따라 이동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필환의 염력은 마치 처음부터 이준의 것이었던 양 부드럽게 그의 몸속 곳곳을 파고들었고, 에너지가 닿는 곳 마다 편안하고 시원한 느낌이 퍼져 나갔다.
* * *
연못 가운데 있던 그가 두 눈을 떴을 때는 어느새 어깨까지 오던 호수물이 허리춤까지 줄어들어 있었다. 시커먼 독 연 못은 이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용암처럼 끓어오르며 연신 물방울을 터뜨리며 독 안개를 내뿜었다.
연못 주위에는 아라가 가만히 서서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특제 독 연못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줄어들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 한 듯한 표정이었다.
이준이 두 눈을 뜨자, 조금 전보다 훨씬 더 강한 기운이 쏟아져 나오며 파도를 일으켰다.
하지만 사방으로 퍼져 나가던 에너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화롭게 흐르며 다시 이준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침내 이준이 연못을 박차고 나오자, 아라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그래, 투종의 염력은 어때?”
아라의 질문에 이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대단하긴 하지만, 만족할 만큼은 아니야.”
이에 정신을 집중해 이준의 몸 곳곳을 뜯어보던 아라가 못 당하겠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 너 정말 욕심이 많구나? 1성 투황에서 2성 투황까지 단번에 뛰어 올랐는데, 그게 부족 하다는 거야?”
“하하, 이 독을 완전히 제련하고 나면 나도 투종이 될 수 있으려나?”
“뭐? 이거 순 날강도 아니야?”
말을 마친 아라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고, 이준 역시 머리를 긁적이며 웃음을 지었다.
한참동안이나 아라를 보며 웃음을 짓던 이준은 가만히 옷을 들어 가슴에 새겨진 불길한 검은 반점을 바라봤다. 검은색 반점 주위로는 아라가 만들어낸 기이한 문양이 가득 덮여 있었다. 마치 그 문양이 검은 반점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아주는 것 같았다.
“이건 <칠색독경>에서 보고 배운 거야. 이게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거기에 네가 갖고 있는 천지의 불꽃이 더해지면 2년은 버틸 수 있을 거야.”
아라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꼭 2년 안에 투존 강자를 찾아 해독을 부탁하도록 해. 아니면 봉인이 풀리면서 반점의 독이 폭발하고 말거야.”
“알겠어.”
이준은 세 번째 천지의 불꽃을 찾겠다는 생각을 굳이 입 밖에 내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투존 강자를 찾아나서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란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휴……. 나도 최선을 다해서 찾아볼게. 하지만 쉽지는 않을 거야. 내가 독종의 제자들을 풀어서 수소문 해봤는데, 서북 지역 안에는 투존이 없는 것 같아.”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라의 얼굴에 또 다시 짙은 그늘이 내려앉았다. 사실 그녀도, 이준도, 아니 그 누구라 해도 2년 안에 투존을 찾아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투존은 투기대륙의 먹이 사슬 꼭대기에 있는 존재나 다름이 없었고, 투기대륙 전체를 놓고 봐도 손에 꼽을 정도로 숫자가 적었다.
그리고 그런 초거물급 강자가 소속되어 있는 곳은 독종이나 불의 연맹 같은 세력 열 개를 합쳐도 감히 눈길 한번 줄 수 없을만큼 강대한 세력이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조급해 말자. 아직 2년이나 남았으니까……”
이준은 아라에게 기운을 복돋아 주려는 듯 피식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순간, 문득 이준의 머릿속에 약로와 가람아카데미 서천우 장로의 입을 통해 들었던 이름 하나가 번뜩 떠올랐다.
풍존!
투기대륙에서 자신의 성 뒤에 ‘존’자를 붙일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투존뿐이었으니, 스승과 서천우 대장로가 이야기 했던 그 자 역시 투존 강자임이 틀림없었다.
만일 스승과 풍존이 막역한 사이라면…….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이준의 입가에 곧바로 미소가 번져나갔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투존을 만날 일도 없었을 뿐 아니라, 천운이 따라 투존을 만난다 해도 감히 말조차 붙일 수 없었다.
그러니 아라와 자신이 합심해 투존을 찾는데 성공해도, 상대가 악마의 반점을 제거해줄 가능성은 거의 전무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풍존’은 약로와 막역한 친구라 하지 않았던가! 적어도 서천우 대장로의 말에 따르면, 풍존과 약로는 피붙이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로, 약로가 사라진지 이렇게나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그는 자신의 친구를 찾아 온 대륙을 방랑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풍존을 찾는 것만이 유일한 해답이었다.
“휴…….”
순간 이준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말이야 좋지만, 이 끝도 없이 넓은 투기 대륙 어디에서 풍존을 찾는단 말인가. 자신이 약로의 제자라는 소문이 퍼졌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재수가 없다면 풍존의 귀에 그 소문이 들어가기도 전에 영혼의 궁전이나 다른 곳에서 자신을 찾아와 갈기갈기 찢어 놓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이준이 혼자서 웃었다 울었다를 반복하고 있을 때, 아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친구들은?”
“밖에 있어.”
이준의 답변에 아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숲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자. 악마의 반점도 완전히 봉인 됐으니 남아 있어서 좋을 게 없어.”
* * *
이준과 아라가 숲 밖으로 걸어 나오자 입구 쪽을 지키고 있던 메두사와 보람이 부리나케 달려와 이준의 안색을 살폈다.
“해결된 건가?”
메두사가 이준을 위아래로 쓸어보며 물었다.
“아라가 익힌 봉인술 덕분이야. 아니었으면 이거 처리하는 데 애 좀 먹었을 것 같아.”
이준의 말은 조금의 과장도 없는 사실이었다. 검은 반점에서 새어나온 티끌 같은 독기를 제거하는데 얼마나 많은 힘이 필요했던가. 만일 아라의 도움이 없었다면 천지의 불꽃이 있다 해도 목숨을 잃는 것은 시간 문제였을 것이다.
이준의 한마디에 메두사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이준이 그 미소를 채 발견하기도 전에 그녀의 얼굴은 다시 평소대로 돌아가고 말았다.
“봉인하고 나서 폭발 시기를 얼마나 늦출 수 있는 거지?”
“2년이야.”
곁에 있던 아라가 대신 대답했다.
“2년이라고? 그러니까 2년 안에 투존 강자를 찾아서 해독을 하지 않으면 결국 독이 폭발한다는 거네?”
“맞아.”
“2년 후에 다시 봉인을 하는 건?”
“그건 불가능해……. 이렇게 독을 봉인하는 방법은 딱 한 번밖에 안 먹혀. 두 번째부터는 별 효과가 없을 거야.”
“뭐가 어째?”
또 다시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이준이 곧바로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됐어. 지금 그런 얘기 해봤자 뭐해. 앞으로 어떻게 하면 투존 강자를 찾을지 고민하는 게 낫지. 그보다, 우리 숙소 좀 마련해줄 수 있을까? 채린이랑 보람이도 좀 쉬어야 할 것 같고, 나도 너무 힘들고…….”
이준의 중재에 아라는 메두사를 한번 흘깃 노려보고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아마도 그들이 머물 곳을 직접 마련해주려는 듯했다.
그녀가 저 멀리 사라지자, 이준이 쓴 웃음을 지으며 메두사를 달랬다.
“아라도 충분히 많이 도와줬잖아. 너무 뭐라 하지 마.”
이준의 반응에 메두사는 입술을 삐죽이며 못 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곧바로 말꼬리를 돌렸다.
“그딴 것 보다, 반지 속에 가둬둔 놈은 어떻게 할 셈이지?”
“으음……. 글쎄, 일단 하루만 쉬고 생각하자. 반지에 갇힌 놈이 뭘 어쩌겠어.”
이준이 한쪽 손으로 자신의 저장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가 이번에 구름제국까지 온 목적은 바로 영혼 사냥꾼을 붙잡기 위해서였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스승의 정보를 알아내야 했다.
* * *
넓은 방에는 은은한 향이 가득 풍기고 있었다. 따뜻한 조명이 방을 밝게 비추며 어둠을 몰아냈지만, 눈을 찌를 정도로 강한 빛은 아니었다.
이준이 침대에 앉아 두 눈을 감고 조용히 정신을 집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천지의 에너지가 휘몰아치며 그의 몸속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강자가 되기 위해서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처럼 계속해서 노를 저어야 했다. 잠시라도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되려 뒤로 밀려났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나자 이준의 몸 안으로 흡수되던 농밀한 에너지가 서서히 옅어졌다.
잠시 후, 이준의 입에서 탁한 공기가 새어나왔다.
이에 이준은 착잡한 표정으로 옷을 풀어 헤쳐 가슴에 붙어 있는 악마의 문양을 응시했다.
“투존 강자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이준은 저도 모르게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도와줄지 아닐지, 아니,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투존에 희망을 거는 것보다 차라리 세 번째 천지의 불꽃을 찾아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천지의 불꽃이라…….”
그는 손가락으로 연신 무릎을 두드리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저장반지 안에서 오래된 지도 몇 장을 꺼내들었다.
지도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한 쪽이 찢어진 지도의 귀퉁이에는 흐릿한 그림이 있었고, 그림이 이어지는 길을 쭉 따라 가면 그 끝에는 검은색의 불꽃 모양이 있었다.
그 도안에 시선이 닿는 순간, 이준의 가슴이 미친 망아지마냥 날뛰기 시작했다. 지금의 이준은 무지한 소년이 아니었고, 그 문양이 얼마나 대단하고 무서운 것을 상징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투기 대륙 사람이라면 누구나 천지의 불꽃에 대해 알고 있었다. 현재까지 밝혀진 천지의 불꽃은 총 23 종류로, 천지의 불꽃에 나타났다는 정보가 조금이라도 돌게 된다면 엄청난 소란이 일어났다.
23종류의 이화는 저마다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그 위력에도 차이가 있었다.
이준이 손에 넣은 첫 번째 천지의 불꽃인 대지의 불꽃은 23개의 불꽃 중 19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광폭한 고온과 더불어 화산 폭발을 이끌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물론, 아직 확인해 본적이 없어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었다.
한편, 이준의 두 번째 불꽃인 구름 불꽃은 대지의 불꽃보다 다섯 단계 높은 순위를 가진 불꽃이었다. 이 무형의 불꽃은 파괴력 면에서는 대지의 불꽃과 비슷한 수준에 불과했지만, 담금질을 통해 염력을 정화하고, 이를 통해 보다 빠른 수련이 가능하게 해주는 특수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