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6화. 독의 연못
말없이 아라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이준은 곧바로 고개를 돌려 메두사를 달랬다.
“너무 그러지마. 아직 시간이 있잖아.”
이준의 진지한 표정을 보며 메두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불편하거나 아픈 데는 없고?”
“응. 아마 독이 폭발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나봐.”
“앞으로 어쩔 셈이야?”
하지만 투존 강자는 말처럼 그리 쉽게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게다가 찾는다고 해도 그가 순순히 해독을 도와줄 리도 없었으니, 메두사의 얼굴은 도통 밝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은 여기 일부터 해결한 다음 다시 얘기하자.”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메두사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으며 전갈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라가 땅으로 내려가기 무섭게 전갈문의 강자들이 속속들이 무릎을 꿇으며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이것으로 구름제국은 완전히 독종의 손아귀에 떨어진 것이다.
* * *
천독성에 위치한 독종의 총본부는 투황 계급의 강자라 해도 잠입할 수 없을 정도로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하고 있었다.
독종의 본부 깊은 곳에 있는 푸르른 돌산은 독종의 금단 구역 중 하나로, 아라를 제외한 그 누구도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는 곳 이었다. 돌산 주위로는 수많은 눈이 숨어 있어 그녀의 허락이 없다면 파리 한 마리도 침입할 수 없었다.
돌산 안에는 기괴한 돌이 가득했고, 산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독풀에서 코를 찌르는 독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곳에서 새어나오는 독은 투왕 강자라 해도 함부로 들이마셔서는 안 되는 위험한 것들이었다.
바위틈으로는 맹독을 가진 희귀한 독사들이 돌아다니며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돌 숲 한가운데에 위치한 작은 연못과 주변에는 네 개의 뱀 머리뼈가 놓여 있었다. 커다란 뱀 머리는 모두 입을 쩍 벌리고 있었고, 그 입에서는 검은 액체가 새어나와 연못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연못 안의 물은 몹시 까맣고 탁해 눈이 뚫어져라 바라봐도 바닥을 확인할 수 없었다. 영혼의 힘을 사용해 안을 들여다보려 해도 알 수 없는 기운이 영혼의 힘을 튕겨냈다.
연못 위에는 옅은 안개가 감돌고 있었고, 안개가 피어오르며 비릿한 향을 풍겨댔다. 이로 미루어보아, 독성을 가진 연못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 그 불길한 검은 연못에는 상의를 벗은 이준이 앉아 있었다.
“이 독극물이 이준한테 해가 안 된다는 건 확실하고?”
바위 위에 앉아 이준을 바라보던 메두사는 못 미덥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아라를 바라봤다.
“이 연못은 내가 백 가지 이상의 독풀과 독벌레를 배합해서 만들어낸 거야. 이 안에 앉아서 수련을 하면 빠른 속도로 염력을 키울 수 있어. 물론 독극물이니까, 독성이 있는 건 사실이지. 하지만 지금 이준에게 필요한건 바로 독이야. 이 안에서 수련을 해야 해. 그럼 악마의 반점이 폭발하는 시기를 늦출 수 있어. 본래 외부인은커녕 독종의 장로들조차 들어올 수 없는 곳이야. 그런 곳까지 데려와서 허튼 짓을 할 리가 없잖아.”
아라의 답변에 메두사는 그제서야 안심했다는 듯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아라는 천천히 연못 옆으로 걸어가 이준의 가슴에 피어 오른 검은 반점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못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검은 반점 주위로 보라색의 작은 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상황을 확인한 아라는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준의 머리 위에서 피어오르는 새하얀 연기를 바라봤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조금 낫네. 천지의 불꽃 덕분에 내가 생각한 것 보다 더 오래 독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냥 이렇게만 두면 되는 거야?”
메두사의 질문에 아라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 내가 이준의 독을 통제해줘야 악마의 반점을 완전히 억제할 수 있어.”
“그럼 뭘 꾸물거려? 빨리 그걸 해야 할 거 아니야.”
이에 메두사는 인상을 찡그리며 곧바로 아라를 노려봤다. 하지만 아라는 평소와 달리 그녀의 말을 곧바로 받아치지 않고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재촉 하지마. 서두르면 일을 망치니까. 적당한 시기가 오면 시작할거야.”
“그래서 그 시기는 언제 오는 거지?”
메두사의 그칠 줄 모르는 재촉에 아라의 얼굴이 순간 돌처럼 굳었다. 아무리 일이 이렇게 된 것이 자신 탓이라지만, 계속되는 상대의 짜증을 받아주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후……. 너희는 먼저 나가서 돌 숲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이를 들은 메두사와 보람은 약속이나 한 듯 눈을 치켜뜨며 아라를 노려봤다. 메두사는 아예 팔짱까지 단단히 낀 채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생각이 없다는 뜻을 전달했다.
“우리가 보면 안 될 거라도 있어? 난 이준의 안전을 위해서 꼭 붙어 있을 거야. 네가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알고?”
“너 진짜…….”
계속되는 메두사의 공격적인 언사에 아라 역시 더 이상 화를 참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연못 안에서 눈을 감고 있는 이준의 가슴에 새겨 진 검은 반점을 보면 도저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후……. 알았어. 그럼 절대로 방해하지 마. 말도 걸지 말고, 기웃거리지도 말고, 입도 뻥끗 하지 마.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게 되면 이준은 이 자리에서 죽을지도 모르니까.”
말을 마친 아라는 검은 독 연못 안으로 미끄러지듯 걸어 들어갔고, 무언가 말을 하려던 메두사와 보람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조용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연못 안으로 들어간 아라는 얼굴을 제외한 전신을 연못에 담근 채 천천히 이준에게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갑작스레 아라가 연못 안에 뛰어들자, 이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긴. 악마의 반점을 제어하는 걸 도와주러 온거지.”
“고마워.”
“후……. 고맙긴, 전부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씁쓸한 표정을 짓는 아라의 모습에 이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난 약속을 지키러 온거니까. 네 탓은 아니지. 이건 약속을 지키는 과정에서 생긴 가벼운 사고 같은거야. 이제 난 어떻게든 재난독체 억제에 필요한 재료들을 구해볼게. 네가 재난 독체만 잘 통제할 수 있게 되면 나머지 문제들도 다 해결될 거야.”
이어지는 이준의 말에 아라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그의 앞으로 다가가 진지한 표정으로 악마의 반점을 관찰했다.
“악마의 반점이 퍼지는 속도가 확연히 느려졌어. 이상하다. 독극물만으로는 별 효과가 없을 텐데?”
“아아, 내 몸에는 천지의 불꽃이 있으니까. 그래서 독에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는거 아닐까?”
“천지의 불꽃이 대단하긴 대단하네. 어느 정도 독을 막아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생각 이상이야. 투종 강자가 남긴 악마의 반점까지 억제할 수 있다니.”
말을 마친 아라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해. 지금부터 독소를 내 몸 속으로 흡수 시킨 다음 네 몸으로 흘려 보내서 반점을 통제할 거야. 그럼 네가 해독약을 찾을 때까지는 버텨주겠지.”
이에 이준은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하는 거구나. 번거롭겠지만 부탁 좀 할게!”
“됐어, 뭐 이런 걸 가지고. 이제 눈을 감고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는 절대 움직이지 마.”
아라의 지시에 따라 이준은 말없이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가 몇 차례 호흡을 가다듬은 뒤 손가락을 움직이자, 아라의 몸 중앙에서 작은 소용돌이가 나타나 새까만 독극물을 흡수하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그녀의 손가락 끝으로 다시 독극물을 흘려 보냈다.
곧이어 그녀의 새하얀 손가락이 점점 새까맣게 물들었다. 손끝이 숯덩이처럼 까맣게 변해버리자, 그녀는 잽싸게 자신의 손톱으로 손 끝에 상처를 낸 뒤 흑색으로 변한 손가락을 이준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재난독혈이 묻은 검은 손가락이 닿는 순간, 악마의 반점이 무언가를 감지한 듯 격렬하게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흥.”
아라는 악마의 반점이 보이는 움직임에 콧방귀를 뀌며 손가락을 더욱 빠르게 움직였고, 이에 악마의 반점은 마치 뱀을 만난 개구리 마냥 화들짝 놀라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녀의 피와 독으로 만들어 진 문양이 막 완성 되려던 그 때, 악마의 반점에서 엄지 손가락만한 크기의 맹독이 뿜어져 나왔다.
악마의 반점의 맹공격에 아라는 정색하며 더욱 빨리 문양을 그려나갔다.
또 다시 두 독성이 충돌했고, 이번에는 악마의 반점이 튕겨져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아라가 손가락을 튕겨 손 끝에 있던 재난독혈의 힘을 문양 속으로 불어 넣자, 문양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무수히 많은 검은 선이 번개처럼 그물 모양을 이루었다.
그 때, 갑자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또 다시 악마의 반점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악마의 반점 주변에 있던 문양에서 순간 붉은 빛이 터져 나오며 악마의 반점을 가뒀다.
반점을 완전히 가두는데 성공한 아라의 이마에서는 식은 땀이 비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곧이어 아라가 그려낸 검붉은 문양 주위로 청록색 불꽃이 피어나며 아라가 문양을 완성하기 전에 이준의 전신으로 퍼져나갔던 새카만 독들이 ‘치익’거리는 소리를 내며 증발됐다.
이 장면을 발견한 아라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고 말았다. 본체에서 떨어져 나왔다고는 하나 투종 강자가 만들어 낸 독을 제어하다니, 이준의 실력이 자신이 상상한 것 이상으로 대단했다. 도저히 투황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실력이었다.
청록색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며 사방으로 내뿜어 이준의 몸 전체를 감쌌다. 미칠 듯한 열기에 악마의 반점을 빠져 나온 검은 독기들이 살아있는 뱀 마냥 요동치다가 서서히 빛을 잃었다.
천지의 불꽃을 이용해 독을 태우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만, 검은 독기가 완전히 사라질 때 마다 투종의 염력이 흡수되었기 때문에 시간 따위는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투종의 마지막 선물답게, 이준의 가슴에 새겨진 악마의 반점은 천지의 불꽃의 고온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온 힘을 다해 염력을 짜내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아라의 봉인을 피해 달아난 독의 편린들을 제거하는 것 뿐 이었다.
그 때, 이준의 머릿속에 청연의 불꽃에 또 다른 천지의 불꽃을 섞을 수만 있다면, 악마의 반점을 제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새로운 천지의 불꽃을 하나 더 찾는 것은 투존 강자를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 이었다. 아니, 어쩌면 천지의 불꽃을 찾는 것이 더 어려운 일 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천지의 불꽃을 제련하는데 드는 수고까지 생각하면, 어느 쪽이 더 가능성이 높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어디 그 뿐이던가. 천지의 불꽃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면 투기 대륙 곳곳에서 내로라하는 강자들이 눈이 벌게져서 달려올 것이 불 보듯 뻔 했다. 구름 불꽃을 찾을 때만 해도 가람 학원에서 무려 일 년을 기다렸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흑각성의 강자들과 목숨을 건 사투 끝에 간신히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물론 천지의 불꽃을 찾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이준의 이마에 새겨진 불꽃 문양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약로가 남겨놓은 그 문양이 사라지면, 이준은 곧바로 주인을 잃은 천지의 불꽃을 제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준은 천지의 불꽃이 아니라 그 무엇을 준다 해도 절대로 그 불꽃이 꺼지기 않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