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5화. 악마의 반점
두 사람 모두 살아있는 것이 용할 정도의 부상을 입었지만, 아라보다는 전필환의 기운이 한층 더 쇠약해져 있었다.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아래쪽의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준이 천영호를 처리했으니, 이제 전갈문의 운명은 오로지 전필환 한 사람에게 달려 있었다.
“그렇게 피 흘리는 모습 보니 생각만큼 강한 상대가 아니었단 생각이 드는군.”
아라가 입가의 핏자국을 쓱 닦으며 말했다.
“재난독체의 힘에 의지하는 주제에 건방지군. 재난독체만 아니었다면 네 년이 감히 나와 맞설 수 있었겠느냐? 그렇지만 그렇게 까부는 것도 여기까지다. 일단 재난독체가 한 번 폭발한 이상, 네 년이 죽는 것도 시간문제야.”
“뭐 하러 저런 쓸데없는 얘길 들어주고 있어. 그냥 끝내버려.”
바로 그 때, 세 개의 그림자가 그녀의 곁으로 날아왔다. 그림자의 정체에 이준, 보람 그리고 메두사였다.
갑자기 날아온 세 강자를 발견하자, 아라의 얼굴에 곧바로 화색이 돌았다. 반면 전필환의 얼굴은 마치 송장처럼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그 녀석은 처리한 거야?”
아라의 질문에 메두사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물었다.
“상황을 보니 저 자식을 처리할 능력이 안 되는 것 같은데, 내가 도와줄까?”
“어차피 저 놈 몸에 내 피가 흘러 들어갔어. 오늘 안에 목숨을 잃을거야.”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전필환의 목구멍에서 섬뜩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큭큭……. 그 사람이 이렇게 쉽게 나가 떨어지다니……. 하지만 너희도 무사하지는 못 할 거다. 영혼의 궁전이 영원히 너희를 쫓아다닐 거야.”
“걱정도 팔자군. 우리보다는 이미 시체가 된 전갈문의 문주나 걱정해주지 그래?”
이준의 말에 전필환의 얼굴이 순간 돌처럼 굳었다.
“네 놈 짓이냐?”
상대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눈이 더욱 붉게 물들었다.
“감히!”
그 때, 아라가 더 이상 못 들어주겠다는 듯 인상을 쓰며 가볍게 손을 움직여 인을 맺었다.
아라의 손이 인을 완성하자, 전필환의 몸 곳곳에 스며든 독기가 폭발하며 그의 혈관 곳곳으로 파고들었다. 전필환의 온 몸이 보라색으로 변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에 전필환은 마지막 남은 염력을 모두 끌어내 혈관 안으로 파고드는 독을 몰아내려 애썼지만, 아무리 염력을 쥐어짜내도 독은 더욱 빠른 속도로 그의 온 몸을 헤집어 놓을 뿐 이었다.
“전갈 괴물, 당신의 실력으로 재난독혈의 침투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절대 불가능이야. 미안하지만 당신은 끝났어.”
“큭큭! 재난독체는 역시 강력하군. 콜록……!”
아라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전필환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끔찍할 정도로 갈라져 듣고만 있어도 털이 삐쭉 설 지경이었다.
“오늘 도망가기는 틀린 것 같군. 하지만 나 혼자는 억울해서 못 가지.”
전필환은 이준 쪽을 바라보며 갑자기 섬뜩한 웃음을 짓더니 마지막 힘을 다해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그 순간, 무시무시한 에너지가 솟구치며 그의 피부 위에 송골송골 핏방울이 맺히더니 이내 거대한 피 바다가 펼쳐졌다.
피로 만들어진 강이 솟구치며 물결을 일으키는 모습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조심해, 저 녀석 자폭할 생각이야!”
메두사가 소리를 지르기 무섭게 전필환의 몸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이 더욱 더 크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라가 막 몸을 피하려는 순간, 갑자기 전필환의 입에서 검은 색 빛 덩어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전필환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아라와 메두사조차 어찌할 바를 모르고 빠르게 염력을 끌어내 방어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전필환이 마지막 힘을 다해 쥐어짜 낸 공격이 아라를 향해 날아가던 도중 돌연 방향을 틀었다.
“안돼! 이준!”
순간 메두사의 목구멍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의 마지막 공격이 향한 곳은 아라가 아니라 이준이었다.
예고 없이 발사된 검은 빛에 순간 이준은 넋을 잃고 말았다. 검은 빛에 실린 강력한 에너지에 절로 소름이 끼쳤다.
급박한 상황에 이준의 몸에서는 반사적으로 염력이 치솟아 올랐다.
이에 검은 빛은 더욱 무서운 기세로 돌진하더니 그의 염력과 세차게 충돌했다.
두 에너지가 부딪히자, 뜨거운 청록색 빛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검은 빛이 이준의 몸을 덮쳤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검은 빛은 폭발하지 않고 조용히 이준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고, 이내 그의 몸에 검은 반점 하나가 생겨났다.
“무슨 짓을 한 거지?”
“킬킬……”
검정빛을 뱉어낸 뒤 전필환의 얼굴은 잠깐 사이에 몇 년은 더 늙은 듯했다. 하얗게 새어버린 그의 머리카락은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해 방금 전 검은 빛을 뱉어낸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네가 죽인 전갈문 사람이 몇 명인데, 널 가만히 둘 줄 알았더냐?”
전필환의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메두사와 아라가 이준의 곁으로 날아왔다.
“괜찮아?”
메두사가 이준을 살펴보며 다급히 물었다. 투종 강자의 목숨을 건 마지막 한 수였다.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이상했지만, 결코 안심할 수 없었다.
아라 역시 심각해진 표정으로 이준을 이리저리 관찰했다. 곧이어 이준의 망토를 뒤로 젖힌 그녀는 상대의 가슴에 피어난 검은 반점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게 뭐야?”
메두사의 질문에 아라가 이를 갈며 욕설을 내뱉었다.
“악마의 반점이야. 저 나쁜 새끼!”
“악마의 반점이라니 그게 뭔데?”
“구름제국에서 독 염력을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야. 독이 든 염력을 한데 뭉쳐 적의 몸 안에 침투시킨 다음 검은 반점을 만들어내는 거지. 이 반점은 계속해서 독을 퍼뜨리면서 결국 전신으로 퍼져나가지. 시간이 지나면서 온 몸이 썩어 들어가고 결국 고통스럽게 죽게 돼.”
아라의 목소리가 분노로 가느다랗게 떨렸다.
“하지만 이 수를 쓰면 공격자 본인도 모든 염력을 잃게 돼. 그야말로 동반자살이지.”
“어떻게 해야 없앨 수 있지?”
메두사는 어둡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물었다.
“평범한 투왕이나 투황이 만들어낸 악마의 반점이라면 내가 어떻게든 없애보겠지만 전필환의 악마의 반점은 솔직히 말해서 무리야.”
콰광!
아라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메두사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에너지가 폭발하며 짙은 살기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이 개자식, 빨리 해독약을 내놔!”
메두사는 살기 가득한 목소리를 내뱉으며 곧바로 죽어가는 전필환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큭큭. 어차피 나도 얼마 못 사는 목숨이야. 저 녀석이 함께 죽어준다면 외롭지는 않겠군…….”
하지만 전필환은 메두사의 위협에 눈 하나 까딱 않고 피식 웃음을 지을 뿐 이었다.
이에 메두사는 그의 팔을 나뭇가지 꺾듯 잡아 꺾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해. 당장! 손이 없어진 다음은 발이고, 발이 없어진 다음은 네 몸을 갈라 내장을 꺼내주마.”
팔에서 전해지는 강렬한 통증에 전필환의 호흡이 가빠지며 이마에서는 땀이 비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이미 죽음을 앞둔 마당에 그런 고통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전필환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큭큭! 저 놈을 아끼는 모양이구나! 아주 좋아! 내가 바라던 게 바로 이런 거니까!”
콰직! 콰직!
말을 마치기 무섭게 메두사의 발길질에 의해 전필환의 두 무릎이 꺾였다. 그의 양쪽 다리는 기이하게 뒤틀려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메두사의 고문에 전필환의 숨이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짙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널 죽이고 난 다음 전갈문 녀석들도 모조리 네 부장품으로 순장시켜주마!”
“하고 싶은 대로 해. 어차피 나도 별 다른 수가 없거든. 해독약 같은 것도 없고 말이야.”
쾅!
해독약이 없다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메두사의 칼처럼 날카로운 손톱이 전필환의 가슴을 갈랐다. 심장이 파열된 전필환의 눈은 순식간에 생기를 잃었고, 메두사는 그의 가슴에서부터 손을 빼낸 뒤에도 분을 참지 못 하고 이를 갈았다.
전필환을 죽이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메두사는 전갈문 사람들이 있는 곳을 향해 번개처럼 돌진했다. 투종 강자의 몸에서 풍기는 짙은 살기에 전갈문 사람들은 모두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안돼 채린! 돌아와!”
그 때, 익숙한 목소리가 메두사를 불러 세웠다. 그녀는 한참동안 망설이다다가 결국 이준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늘 싸늘하고 독살스런 말을 내뱉던 메두사가 자신의 죽음에 분노하는 모습에 이준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쓴 웃음을 지으며 저장반지 안에서 손수건을 하나 꺼내 피 묻은 메두사의 손을 닦아주었다.
“내가 널 가한제국까지 데리고 가겠다. 만일 고하가 독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널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다른 곳으로 가는거다. 해독약이 없을 리가 없어.”
메두사가 살기 등등한 표정으로 이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에 이준은 다시 한번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끼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그런데, 독을 제일 잘 다루는 사람이 여기 있는데, 굳이 찾아 다닐 필요가 있을까?”
이준은 씩 웃으며 손수건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는 옆에 있던 아라를 바라봤다.
“이거, 정말 방법이 없는 거야?”
아라는 미간을 좁히며 한참을 생각하다가 씁쓸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투종 강자가 만들어낸 악마의 반점은 나라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이 독을 사용한 사람보다 더 강한 자를 찾으면 또 모를까.”
“더 강한 사람이라고? 그럼 투존이잖아.”
“뭐……그렇지. 그리고 악마의 반점이 독의 형태는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야. 그 안에는 전필환의 염력이 모두 들어가 있으니까. 네가 잘 사용하면 그 방대한 염력을 네 것으로 만들 수 있어. 물론 해독을 하지 못하면 단순한 독약에 불과하지만.”
“이 반점이 몸에 퍼지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
이준의 질문에 아라는 잠시 머뭇거리다 할 수 없다는 듯이 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반년이야.”
6개월이라니…이는 반 년 안에 투존 강자를 찾아가 악마의 반점을 제거해달라고 부탁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해독은 해줄 수 없어도 폭발시기를 최대한으로 늦출 수는 있어. 우선 그렇게 하고 전력으로 투존을 찾아보자.”
이준의 눈치를 살피던 아라가 무거운 얼굴로 덧붙였다. 그를 부른 것은 자신이었으니, 자신이 이준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문제를 해결해야했다.
“좋아. 그래도 이 문제를 잘 해결하면 실력을 키울 수 있다니까, 어쩌면 잘 된 일일지도 몰라. 너무 걱정하지 마.”
애써 괜찮은 척 웃어 보이는 이준의 모습에 메두사의 살기 어린 시선이 곧바로 아라에게 꽂혔다. 창살 안에서 전필환을 죽였다면 지금 같은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아라 역시 메두사의 살기등등한 시선을 느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이준을 부른 것도 자신이었고, 전필환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도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그럼 일단 이 곳 상황부터 정리하고 악마의 반점을 어떻게 할지 고민해보자고.”
그 때, 이준이 메두사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곧 두 사람이 싸움을 일으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이에 아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람처럼 땅 위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