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4화. 포획
이은의 설명에 따르면 ‘제왕의 권’은 그녀의 가문에서 내려오는 가장 신비한 무투기 중 하나로,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인재만이 수련할 자격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 그녀의 진지한 눈빛에서 이준은 그 무투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준에게 정말 위급할 때가 아니라면 절대로 제왕의 권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었고, 행여나 누군가가 그 무투기의 정체를 알아보게 된다면 아주 복잡한 일이 생길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었다.
그녀의 가문에서는 ‘제왕의 권’이 절대로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했고, 만에 하나라도 외부인이 그 무투기를 익힌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자를 죽이고 무투기를 회수해 갔다.
이은의 말을 떠올리자, 이준의 눈빛에 더욱 짙은 살기가 어렸다. 상대가 제왕의 권을 알아본 이상 그를 절대로 살려 보낼 수 없었다.
상대가 ‘제왕의 권’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천영호의 얼굴은 완전히 사색이 되어 있었다. 영혼의 궁전에서조차 두려워하는 무투기를 이렇게 새파랗게 어린 놈이 사용한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녹색 수정체를 확인한 천영호는 심각한 표정으로 양손을 휘둘러 염력을 끌어 모았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을 둘러싼 검은 연기가 한 곳으로 모이며 그의 머리통만한 검은 구체로 변화했다.
매끈한 검은 구체가 완성되자, 그는 곧바로 손가락을 굽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청록색의 수정체를 향해 그것을 집어던졌다.
투종 강자조차 두려워할만한 에너지를 가진 청록색 빛과 검은 색의 구체가 맞부딪히는 순간, 사방에 짙은 적막이 깔렸다.
두 개의 거대한 에너지는 공중에서 서로를 집어 삼키려는 듯 뒤엉키며 주위의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정적 속에서 두 개의 거대한 에너지가 충돌하기를 수 분, 마침내 굉음이 폭발하며 하늘 가득히 거대한 파문이 퍼져 나갔다.
* * *
에너지가 천천히 소멸되자, 광풍이 잦아들며 검은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윽……. 어떻게 저 따위 애송이가 제왕의 권을!”
제왕의 권을 사용하는 자를 만나면 가급적 충돌을 피하라는 것이 영혼의 궁전의 명이었다. 그런 비밀스런 무투기를 다루는 강자들은 대부분 신비한 힘을 가진 유서 깊은 가문들과 관련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저 녀석이 우리 영혼의 궁전에서조차 두려워하는 세력의 일원이라는 건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천영호의 심장이 덜컥하고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가 막 몸을 돌리려는 순간, 휘황찬란한 칠색의 염력과 함께 뱀 모양의 장검 하나가 그의 목덜미로 날아들었다.
“어딜 도망가려고!”
“이런 젠장!”
검은 구체를 만들어내느라 온 힘을 다 쏟아 부은 천영호에게는 더 이상 메두사에게 맞설 힘이 없었다. 당황한 영혼의 궁전의 사자는 황망히 달아나며 검은 사슬을 날렸다.
하지만 그런 맥없는 공격 따위가 메두사에게 먹힐 리 없었다. 뱀인간의 여왕은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상대의 사슬을 쳐낸 뒤 곧바로 염력을 끌어 모아 거대한 이무기를 만들어냈다.
일곱 빛깔의 이무기의 외형은 이전의 칠색 이무기와 거의 똑같았다. 다만 칠색 이무기보다 훨씬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 역시 훨씬 더 흉폭하고 무시무시했다.
“가라!”
메두사의 명령이 떨어지자, 거대한 이무기가 꼬리를 흔들며 빠르게 앞으로 날아갔다.
이에 천영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곧바로 등을 돌려 하늘 위 쪽으로 달아났다.
“흥.”
하지만 메두사가 코웃음을 치며 가볍게 손가락을 구부리자, 공간이 왜곡되며 천영호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거대한 칠색 이무기가 그를 집어 삼켰다.
쾅!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에 산과 들이 뒤흔들리고, 하늘에는 거대한 파문이 일었다. 실력이 약한 자들은 어느 세력이고 할 것 없이 갑자기 터져 나온 굉음에 귀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태양처럼 눈부신 칠색의 광채는 한 곳으로 뭉쳤다가 다시 사방으로 뻗어나갔고, 허공 위에는 잠잠한 호수에 돌덩이를 던진 듯 거대한 물결이 일어났다.
이준은 보람의 부축을 받으며 허공에 선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왕의 권을 사용하는 데에는 영혼 에너지가 크게 필요치 않아 화련을 사용할 때처럼 정신을 잃을 일은 없었다는 점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준의 상태가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고, 온 몸에 힘이 빠진 듯 사지를 덜덜 떨고 있었다.
곧이어 온 하늘을 뒤덮은 일곱 빛깔 에너지들 사이를 뚫고 한 까만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까만 형상은 나타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북쪽을 향해 줄행랑을 쳤다. 만신창이가 된 그에게서 더 이상 영혼 사냥꾼의 위엄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던 메두사는 곧바로 온 몸에서 휘황찬란한 염력을 뿜어내며 그의 뒤를 바짝 추격했다.
“으으, 나는 영혼의 궁전의 사람이다! 날 죽이면 영혼의 궁전이 너를 가만둘 것 같으냐!”
메두사가 나타나자 천영호는 본능적으로 검은 안개를 방출하며 상대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안개는 이전과는 비할 바 없이 쇠약해져 있어 가볍게 손을 휘두르기만 해도 흩어져 사라질 것 같았다.
“흥, 그 따위 것을 두려워했다면 처음부터 네 놈과 싸우지도 않았겠지.”
“빌어먹을!”
메두사의 조롱에 다시금 그의 몸속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천영호가 반격을 할 거라 예상하던 그 때, 갑자기 그의 몸이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메두사는 또 다시 도망치는 천영호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한 번 손을 뻗어 그의 속도를 늦춘 뒤 번개처럼 달려들어 그의 등허리를 세차게 가격했다.
메두사의 공격이 적중하자 천영호의 몸에서는 다시 파동이 일어났고, 그를 둘러싼 검은 연기가 산산이 흩어졌다. 그의 기운은 크게 쇠약해져 지금 정도라면 투황 강자라 해도 그를 손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영호의 입에서 검붉은 선혈이 터져 나오자, 메두사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곧이어 일곱 빛깔의 에너지가 사방을 뒤덮더니, 이내 거대한 감옥 같은 형상으로 변해 천영호를 옭아맸다. 순식간에 우리에 갇힌 짐승 꼴이 되어버린 천영호는 미친 듯이 발악하며 검은 사슬을 휘둘러 댔지만, 지금 그의 힘으로는 메두사의 염력 감옥을 부수기는커녕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적을 포획하는데 성공한 메두사는 가볍게 몸을 움직여 이준의 앞으로 날아갔다.
“이미 많이 다쳐서 저항할 힘도 없을 거야. 그 때 그 도영호라는 놈에 비해 훨씬 수월하군.”
감옥 안에 갇힌 천영호는 마치 미친 사람마냥 소리를 지르며 발악을 해대고 있었다.
“그렇게 크게 다쳤는데 아직도 소리 지를 힘이 남아 있다는 게 제일 놀랍군.”
하지만 메두사가 짜증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움직이자, 칠색의 염력이 밧줄처럼 그의 몸을 졸라맸다.
그 순간, 천영호의 몸을 둘러싼 검은 안개가 사라지더니 마침내 완전히 소멸됐다. 드디어 그의 본체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에너지 막 안에는 영혼 하나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영혼은 큰 상처를 입은 듯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투명했다.
“웬 영혼체?”
이준은 눈을 비비며 천영호의 허약한 영혼을 바라봤다. 투종 계급이었던 강자의 실체가 영혼체라니…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 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잘못 잡아들인 건가?”
메두사도 어리둥절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설마, 영혼의 궁전의 강자들은 모두 영혼체인 게 아닐까? 생각해보면 그때 도영호도 끝까지 검은 연기 속에 숨어서 본체를 드러내지 않았잖아.”
이준의 추측에 메두사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되물었다.
“그러니까 저 놈들이 영혼체를 이용해 다른 영혼체를 포획하고 있다는 건가?”
“응. 그럴 가능성이 커. 평범한 염력은 영혼체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않으니까, 같은 영혼체가 나서면 훨씬 더 잡기 쉬워지겠지…….”
이준과 메두사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또 다시 천영호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빌어먹을 놈들! 날 죽이면 영혼의 궁전에서 절대 너흴 가만 두기 않을 거다.”
“걱정 마. 죽일 생각 없으니까. 아직 너한테서 알아내야할 게 많거든……”
하지만 이준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으며 천영호의 영혼체를 덥썩 붙잡았고, 이에 천영호는 분노한 듯 살기로 눈을 번뜩이며 아주 작은 크기의 검은 사슬 수십 개를 소환해 이준에게 날렸다.
“풉.”
이준이 콧방귀를 뀌며 손가락을 튕기자, 무형의 불꽃이 그의 손바닥 위에 소환되어 천영호의 영혼체와 맞부딪혔다.
곧이어 백색의 연기가 치익 하는 소리를 내며 천영호의 몸에서 피어올랐다.
“으아아악! 어, 어떻게 영혼체에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거냐!”
고통에 찬 신음을 내지르는 천영호의 모습에 이준의 얼굴에는 섬뜩한 미소가 번졌다. 이것으로 구름 불꽃이라면 영혼체에게도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구름불꽃의 공격에 더 큰 상처를 입은 천영호의 영혼체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더욱 흐리게 변해갔다.
다시 한 번 이준이 손가락을 까딱 움직이자, 구름불꽃이 천천히 흩어지며 사라져 버렸다. 곧이어 이준은 저장반지 속에서 옥병을 하나 꺼내어 천영호의 영혼을 그 옥병 안에 넣었다.
“일단 이곳에 있어. 일을 해결한 다음에 이것 저것 좀 물어보도록 하지.”
이준은 옥병을 저장반지 속에 넣어뒀다. 그제서야 긴장의 끈을 조금 놓은 모습이었다. 어쨌거나 천영호를 잡겠다는 최종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상태는 어때?”
메두사의 질문에 이준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번졌다.
“염력을 좀 많이 쓰긴 했는데, 그렇다고 어디가 크게 다친 건 아니니까! 조금만 쉬면 금방 회복할 수 있어.”
말을 마친 이준은 씨익 웃으며 메두사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버렸다.
“고마워.”
“네가 이 녀석의 힘을 다 빼놓은 덕분에 쉽게 잡은 것뿐이다.”
이에 메두사는 고개를 홱 돌리며 또 다시 차가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준의 입가에서는 여전히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이준이 무언가 말할 생각으로 입을 떼려던 순간, 공중에 떠 있던 회보랏빛 창살에서 기이한 파동이 느껴졌다.
“승부가 난건가?”
메두사와 이준의 시선이 빠르게 한 곳으로 향했다.
순간 거대한 에너지가 연달아 폭발을 일으키더니, 회보라색 감옥 주위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창살이 하나 하나 부서지기 시작했다.
쾅!
곧이어 또 한 차례 굉음이 울려 퍼지며 아라가 만들어 둔 거대한 염력 감옥이 사라지며 사방으로 회보라색 독 안개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 이런!”
회보라색 독 안개가 퍼지기 시작하자, 이준의 얼굴이 시커멓게 어두워졌다. 아라의 독이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주위에는 지옥도가 펼쳐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준 일행이 사색이 되어 날개를 펼치려는 찰나, 갑자기 독 안개가 멈춰 섰다. 곧이어 마치 무언가에 붙들린 듯 멈춰 섰던 회보라색의 독안개가 빠른 속도로 한 곳에 응집되기 시작했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퍼져나가던 독이 빠르게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자, 그 곳에 서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이 마침내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라의 진한 회색과 보라색 눈동자에서는 기이하고 섬뜩한 빛이 번뜩이고 있었으며, 온 몸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그러나 아라의 맞은편에 서 있는 전필환도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의 온 몸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으며, 전신에 칼자국이 가득했다. 거대한 두 붉은 집게발 중 하나는 이미 끊어져 버렸고,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해 귀신을 연상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