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2화. 독의 감옥
“호오, 영혼의 궁전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나보군.”
메두사의 반응에 천영호가 두 눈을 치켜뜨며 되물었다.
“그래, 그 놈도 너처럼 말이 많더군.”
말을 마친 메두사가 염력을 끌어올리자, 천영호의 사슬에서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려 퍼지며 메두사에게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메두사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잡고 있던 장검을 휘둘러 사슬의 연결고리 부분을 내리쳤다. 칠색의 장검과 검은 사슬이 맞부딪히자, 천둥소리와도 같은 굉음이 울려 퍼지며 사슬이 튕겨져 나갔다.
투종 강자 두 명의 불 같은 전투에 주변에 있던 강자들은 너나 할 거 없이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괜히 가까이서 알짱거렸다간 두 사람이 뿜어내는 폭풍같은 에너지에 휘말려 죽음을 면치 못할 게 뻔했다.
갑자기 나타난 투종 강자가 천영호의 앞을 막아서자, 승리를 확신했던 전필환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어쩐지 너무 자신만만하다 했지. 지원군을 불러왔군.”
“그건 네놈도 마찬가지 아닌가?”
아라가 회보랏빛 눈동자로 상대를 위아래로 쓸어보며 말했다.
“어찌됐든 이걸로 독종을 집어삼키려던 네놈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 것 같군.”
“하하. 기뻐하긴 이르지.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겨우 너 같은 애송이 하나 당해내지 못할까.”
전필환이 지팡이로 허공을 내리 찍는 순간, 그의 옷이 찢어지며 가슴에 있던 거대한 전갈 문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빨간 전갈은 살아 있는 것처럼 흉악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 새겨진 문신에는 6레벨 마수인 하늘 전갈보다도 더 강력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혈전갈?”
노인의 가슴에 새겨진 문신을 보자마자 아라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하하. 내가 투종이 된지 얼마 안 돼서 아주 운 좋게 중상을 입은 혈전갈을 만났거든. 제법 애를 먹었지만, 결국 그 녀석의 영혼을 내 몸 속에 봉인 하는데 성공했지.”
곧이어 전필환의 가슴팍에 새겨진 전갈문신이 꿈틀대며 천천히 그의 몸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전갈 문신이 흡수되자, 그의 몸집이 폭발적으로 불어나며 새하얀 뼈가 근육과 피부를 뚫고 솟아나며 그의 주먹이 새빨간 집게발로 변했다.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온 몸에서 새빨간 피를 흘리며 빠르게 반인반수의 형태로 변화하고 있었다. 반인반수가 된 전필환에게서는 5성 투종에 육박하는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천예슬, 이 힘의 첫 제물이 된 걸 영광으로 생각하거라!”
괴물 같은 형상으로 변화한 전필환이 새빨간 집게로 아라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전필환의 기운이 폭등한 것을 느낀 준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어서 아라를 도우러 가야 해. 아니면 정말 죽을 수도 있겠어……’
하지만 이준이 아라를 향해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전산이 곧장 그의 앞을 막아섰다.
“어딜 가려고!”
전산이 자신을 노려보자, 이준은 대답 대신 활화산 같은 염력을 폭발시키며 검은 송곳을 맹렬하게 휘둘렀다.
이준과 전산의 싸움이 재개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전필환도 공격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순식간에 아라의 목덜미를 향해 집게를 휘두르며 전진했고, 아라 역시 날카로운 손톱을 필사적으로 휘두르며 이에 대항했다.
“큭큭……!”
하지만 전필환이 방향을 바꿔 붉은 집게발로 그녀의 손톱을 붙잡자,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아라의 손톱이 잘려나갔다.
일격에 무기를 잃은 아라는 당황한 표정으로 뒤로 몸을 날렸다.
“아까 그 당당하던 모습은 어디 갔지?”
반면 상대의 무기를 부러뜨린 전필환은 우쭐대며 상대를 비웃었다.
다음 순간, 아라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이마에 갖다 댔다. 독향이 풍기는 피가 닿자, 그녀의 이마에 기이한 문양이 나타났다.
이에 아라의 행동을 지켜보던 전필환의 얼굴에 웃음기가 빠르게 사라져갔다.
기이한 문양이 나타나기 무섭게 아라의 눈동자에서는 섬뜩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고, 뒤이어 그녀의 왼쪽 눈은 짙은 보라색, 오른쪽 눈은 회색으로 변했다.
“그래. 너도 내 재난독체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된 걸 영광으로 생각해라.”
말을 마친 아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그녀의 새하얀 머리칼이 미친듯이 휘날리며 이마 위의 새빨간 문양에서 기이한 광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온몸으로 기이한 기운을 발산하는 아라의 모습에 전필환의 안색은 점차 어둡게 내려앉았다.
“재난독체라……. 천영호의 말이 사실이었군. 너 같이 어린 나이에 그 정도 경지에 오른 것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정말로 재난독체였어.”
살기 가득한 보라색과 회색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전필환의 이마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아라가 손을 들어 올리자, 주위에 격렬한 파동이 일어나며 구불거리는 철장이 나타났다.
“독의 감옥!”
다음 순간, 공간이 왜곡되며 아라와 전필환을 중심으로 거대한 염력 감옥이 생겨나 주위의 모든 것으로부터 두 사람을 차단했다.
곧이어 온 끈적한 안개가 아라의 몸 안에서부터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며 빠른 속도로 주위를 뒤덮었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독 안개는 눈 깜짝 할 사이에 염력으로 만들어진 창살 안을 가득 메웠다.
작은 우리 안에 갇힌 전필환은 사색이 된 채로 주변에서 맴도는 회보랏빛 안개를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찬숨을 들이켰다. 그 역시 독술사였지만, 겨우 한 호흡 정도 독을 들이킨 것만으로 온 몸이 무거워지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 무시무시한 독이군. 봉쇄된 공간 안의 모든 에너지를 독으로 오염시키다니……. 함부로 천지의 에너지를 흡수했다가는 순식간에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겠군. 이렇게 되면 지금 가진 염력만 가지고 끝장을 봐야하는데…….’
주변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응시하던 전필환은 빠르게 전신의 모공을 닫고 염력으로 온 몸을 감쌌다.
“그래도 재난독체가 완전히 방출되고 나면 네 년의 몸도 폭발하고 말겠지. 어디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말을 마치기 무섭게 전필환의 몸에서 또 다시 붉은 에너지가 솟구쳤다.
* * *
회색과 보라색이 섞인 거대한 염력 감옥 안에서는 끊임없이 탁한 독 안개가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독이 섞인 안개는 왜곡된 공간의 경계 밖으로는 나오지 못 했다. 마치 작은 독의 세계가 만들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한편, 멀리서 두 사람의 대결을 바라보던 이준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조금 전처럼 크게 걱정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독의 감옥이 생긴 이후 그녀의 염력도 더욱 강해졌고, 공간을 봉쇄한 것은 아라가 상대를 꺾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결과를 기다려보는 수밖에……’
이준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맞은편에 서 있는 전산을 노려봤다.
“전갈문의 문주께서 이토록 저와 싸우고 싶다 하시니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이준의 말투는 덤덤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끝을 알 수 없는 살기가 가득했다.
“건방진 놈! 어린 나이에 투황의 경지에 올랐다고 아주 기고만장하기 이를 데 없구나.”
고함 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과 동시에 은빛 섬광이 폭발하며 전산의 머리 꼭대기 위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의 머리 위에 나타난 검은 그림자는 곧바로 상대의 머리를 향해 거대한 쇳덩이를 내리찍었다.
챙—!
그 순간, 새파란 곤봉과 검은 송곳이 맞부딪히며 새빨간 불똥이 튀었다.
거대한 두 힘이 맞부딪히자, 이준과 전산은 동시에 균형을 잃은 채 뒤로 밀려났다.
염력만 놓고 보자면 전산이 한수 위였지만, 근접전에 있어서는 검은 송곳으로 오랜 시간 단련된 근육을 가진 이준이 더 우세했다.
또 다시 상대의 공격에 밀려났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전산은 균형을 되찾자마자 더욱 세차게 염력을 내뿜었고, 이준 역시 냉랭한 눈빛으로 상대를 쏘아보며 검은 송곳 위에 청록색 불꽃을 덧씌웠다.
검은 송곳에서 피어오르는 청록색 화염이 내뿜는 심상찮은 열기를 감지한 전산은 곧바로 온 힘을 실어 파란 곤봉을 휘두르며 이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태양검!”
다음 순간, 3미터도 넘는 방대한 청록색 불빛이 폭발하며 온 하늘이 일그러졌다.
“하늘의 울림!”
이에 질세라 전산도 이를 악 물고 손에 있던 파란 곤봉을 춤 추듯 휘둘렀고, 이내 눈이 따가울 정도로 강렬한 청색 섬광이 미친 듯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콰광!
청록색의 화염과 청색의 염력이 뒤엉키자, 또 다시 무시무시한 굉음이 귓등을 때렸다.
곤봉을 잡은 전산의 손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곤봉을 타고 미칠듯한 열기가 전해졌다. 하지만 전산은 불에 타는 듯한 고통에도 곤봉을 놓치 않은 채 빠르게 뒤로 몸을 날렸다.
전산이 황급히 후퇴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이준의 발밑에서 또 다시 눈부신 은색 섬광이 일더니, 눈 깜짝할 새에 다시 검은 송곳이 날아들었다.
숨 돌릴 새도 없이 이어지는 공격에 전산은 혼신의 힘을 다해 곤봉을 휘두르며 반격을 꾀했다.
하지만 그가 곤봉을 채 휘두르기도 전에 등 뒤에서 섬뜩한 기운이 느껴지며 돌연 작은 주먹 하나가 날아들었다.
쾅!
전산은 또 다시 황급히 파란 곤봉을 휘둘러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조그마한 주먹을 막아냈다. 그러나 그가 막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파란색 곤봉이 쩍 갈라지며 산산조각 났고, 곧바로 그의 가슴팍을 향해 밤톨만한 주먹 하나가 날아들었다.
유약해 보이던 주먹이 전산의 가슴과 부딪히자, 전산의 얼굴은 붉게 충혈되며 그의 목구멍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
전산은 빨간 피를 토해내며 서둘러 뒤로 몸을 날렸다.
보람의 주먹이 상대방에게 타격을 입힌 것을 확인한 이준은 곧바로 전력을 다해 전산의 앞으로 몸을 날렸고, 이내 은빛 섬광과 함께 그의 머리 위로 묵직한 검은 송곳이 떨어졌다.
갑작스런 기습에 의해 부상을 당한 전산은 이준의 공격에 반격할 힘이 없었는지 다급하게 몸을 돌려 날아오는 송곳을 피했다.
이준의 공격을 간신히 피한 전산은 또 다시 가슴팍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며 황망히 자신의 푸른색 염력 날개를 소환해 전갈문의 입구 쪽으로 미친 듯이 날아갔다.
하지만 멀쩡한 상태에서도 이준의 속도에 절절매던 그가 부상까지 입은 채로 상대의 추격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준은 귀신처럼 잔상을 남기며 날아가 전산의 앞을 가로막았고, 전산의 목구멍에서는 새빨간 핏덩이와 함께 다급한 외침 소리가 튀어나왔다.
“장로들은 어서 돕지 않고 뭐 하는 건가!”
전산의 고함에 장로들은 이를 악물고 죽어라 날갯짓을 해댔다.
“어디가! 이리와!”
그 순간, 문주를 도우러 가던 두 투황의 앞을 쥐방울만한 계집 아이 하나가 막아섰다.
“꺼져!”
머리끝까지 화가 난 두 투황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보람에게 염력을 날렸다.
하지만 두 투황의 협공에도 보람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씩 웃으며 주먹을 움켜쥐었고, 곧바로 그녀의 몸에서 두 갈래 염력이 쏟아져 나오며 상대의 염력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흥! 별 것도 아닌 늙은이들이!”
곧이어 보람의 주먹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귓등을 때리며 두 노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보람의 거침없는 공세에 투황 강자 두 명은 굳은 표정으로 재빨리 염력 보호막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 방어막은 보람의 괴력이 실린 주먹에 맞자마자 곧바로 깨져 버리고 말았다.